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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는 베르사체를 입고 도시에서는 아르마니를 입는다 - 패션 컨설턴트가 30년 동안 들여다본 이탈리아의 속살
장명숙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유럽'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유럽풍의 어떤 그 무엇이 떠오른다. 그 무엇은 고풍스런 성당이 될 수도 있고, 스테이크와 빵과 와인이 곁들여진 근사한 식탁이 될 수도 있고, 키크고 얼굴 하얗고 푸른 서양인이 될 수도 있다. 수도원과 교회와 성당과 교황과 신부와 수녀 등의 종교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떠오르는 나라와 도시들.. 프랑스하면 파리, 영국하면 런던, 독일하면 베를린, 뮌헨, 이탈리아하면 로마,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 피렌체, 시칠리아 섬.. 의외로 이탈리아의 도시나 지명 이름이 생각이 많이 난다. 프랑스와 영국은 파리나 런던이 수도로서 너무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걸까?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들이 제각각 개성을 가지고 그 특성을 세계적인 이미지로 잘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내가 하나하나 기억하는 걸까..
패션컨설턴트인 장명숙이 이탈리아, 특히 밀라노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이탈리아인들과 부대끼며 지낸 시간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패션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며, 더욱이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도시 이름 말고는 아는 것이 없지만 하얀 책 표지에 도도하게 서 있는 모델 포즈의 여성 그림과 긴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책을 펼쳐들게 되었다. <바다에서는 베르사체를 입고 도시에서는 아르마니를 입는다>라... 패션강국인 이탈리아 이야기를 하다보니 명품 이름을 책 제목에 그럴듯하게 넣었나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 보니 그런 단순한 제목이 아니었다. 패션과 이탈리아의 특성을 그대로 한 줄의 제목에 잘 녹아낸 것이었다. 왜 그런고 하니.. 이탈리아는 긴 장화 모양의 반도인데 남부와 북부의 지방특성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고 한다. 따뜻한 기후에 바다와 가까이 있는 남부지방 사람들은 아프리카 쪽 피가 섞여 있고, 성격이 화끈하고 열정적이며 밝은 터라 베르사체의 화려한 무늬의 옷을 입고, 북부지방의 사람들은 차가운 기후에 게르만족의 피가 섞여 있고, 깍쟁이에 차갑고 이성적인 편이며 무채색에 은근한 실루엣을 드러내는 아르마니를 입는다는 것이다. 표지에 '베르사체' 글자에는 원색이 뒤섞여 있고, '아르마니' 글자에는 회색과 검정색이 오묘하게 섞여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식사를 할 때 반드시 하얀 식탁보를 깔고 제대로 갖춰서 식사를 한다는 점이 상당히 인상이 깊었고, 또 '이탈리아의 결혼풍속도'에서도 마음에 남는 글귀가 있었다. '배우자를 이탈리아 말로 '콘소르테consorte'라고 한다. 여기서 'con'은 '함께'라는 말이고 'sorte'는 운명을 뜻한다. 곧 운명을 함께하는 존재가 배우자라는 뜻이다. 이런 정의를 되새기면 결혼의 의미가 묵직하게 다가온다.'(216쪽) 참 아름다운 말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결혼을 신성하게 여긴다면 이혼이란 건 없을텐데.. 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이탈리아에는 이렇게 결혼과 배우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중요하고 무거운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만 하거나, 연인관계만 유지하는 커플도 허다하게 많다고 한다.
'이탈리아 할머니에게 배우는 멋있게 늙어가는 방법'에서 저자가 소개한 마팔다 팔로라는 90세 할머니의 이야기도 내게 한동안 가슴에 좋은 울림을 선사해주었다. 전쟁에 끌려가 포로수용소에서 2년간 고생하다 돌아온 애인과 결혼하여 살다가, 남편이 그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주말이면 늘 밀라노 외곽의 공동묘지로 남편을 만나러 간다고 한다. 30년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그 지고지순한 사랑이 아름다워서 가슴이 찡해졌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마팔다 할머니는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의 식사를 하고 90세의 나이임에도 여성성을 포기하지 않고 의관을 정제하며 꾸미고, 새로운 책을 읽으며 늘 정갈하게 사신다고 한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도 이렇게 깨끗하게, 정갈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꿈을 꿔본다. 또다른 할머니들인 안나리사와 그분의 동갑내기 올케는 두분이서 85세의 나이에 정정하게 봉사활동을 하러 다니며 늘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분주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노인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쓸쓸하게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에 비하면 아주 활동적이고 보람되게 인생을 살고 계신 것이다. 나도 꼭 그렇게 되리라 다짐해본다.
이탈리아하면 패션, 디자인만 떠올랐는데 장명숙이 만난 이탈리아인들의 따뜻한 품성과 사람냄새나는 그들의 생활을 엿보고 나니 그들도 똑같은 사람들이고,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들이 본인들의 나라로 돌아가 혹시나 한국사람들, 한국 생활에 대해 책을 쓴다면 이렇게 따뜻하게 써줄 수 있을까.. 이탈리아의 고즈넉한 성당 뒷골목을 걸어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