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생각보다 책이 얇았다. 요즘 일본 소설들의 분량은 극과 극인 것 같다.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처럼 두꺼운 세권짜리 소설도 있고 금방 다 읽은 요시다 슈이치의 <사랑을 말해줘>같이 얇고 가벼운 작은 소설도 있고. 두께와 분량이 소설을 다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책을 처음 만났을 때 첫인상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가볍게 후딱 읽고 말 것 같다는 약간의 실망을 안고서 책을 펼치게 되었다. 기분좋게도, 보기 좋게 그 예상이 빗나가 버렸다.
어느 날, 어느 공원에서 그저 스쳐지나는 인연인 듯 마주친 슌페이와 교코는 한번 두번 만남을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연애지만, 교코가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로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연애가 되어 버린다. 슌페이는 소리가 들리냐, 들리지 않느냐는 것을 따로 의식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보통의 평범한 남성이고. 하지만 둘은 그런 것에는 상관하지 않고 둘만의 소중한 연애를 아름답게 시작한다.
귀가 들리지 않는다거나, 눈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거나 하는 몸의 불편함은 직접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쉽게 문장을 쓰고 있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나 당연히. 그들의 입장이 되지 않는 이상 모르는 일. 그래서 나는 교코가 얼마나 답답하고 적막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얼핏 상상은 할 수 있겠지만 결코 내 상상과 같은 수준이 아닐 것이다. 나와 슌페이의 입장은 똑같았다. 이 소설은 슌페이의 입장에서 쓰여있는데 슌페이의 답답함이나 막막함이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절절히 공감할 수 있었다.
슌페이가 없는 집에서 교코 혼자서 영화를 보고 있는 고요한 장면, 거기서 슌페이는 '너무도 고요한 광기'를 느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원에서 바로 옆에서 건장한 사내 둘이 뒤엉켜 싸움을 하고 있어도 교코는 너무나 해맑고 평온하게 등돌리고 앉아 슌페이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거기서 슌페이는 '너무나 무서운 고요함'을 느꼈다.
슌페이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파키스탄이나 이라크, 탈레반 등등 우리가 뉴스에서 자주 접하는 테러조직과 관련된 일(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사실 어렴풋이 알면서 더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모른다고 여기려고 한다는 식으로 슌페이의 입을 빌려 얘기한다. 바로 나조차도 그렇다. 중동지역, 테러조직, 이슬람 등등을 그저 뭉뚱그려서 '그'와 관련된 일 이라고 얘기해버리며 의식적으로 더이상 알려 하지 않고 무시해버리려고 한다. 더 깊이 알게 되면 머리아프고 복잡해질테니까. 소설을 읽으면서 가슴이 뜨끔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성향을 고치려 들지 않는 나를 보면서 나도 참 고집이 세구나, 생각을 하면서 또한, 인간이란 얼마나 고집과 아집과 위선으로 똘똘 뭉쳐 있는 존재인가..를 생각을 했다면,, 너무 비약이 심할까.)을 하면서 여기저기로 출장을 다니면서 일을 하는데, 워낙에 상황이 긴박하고 분초를 다투는 일이라 교코에게 소홀해지게 되고 본의아니게 상처를 주게 되기도 한다.
그런 장면에서는 갑자기 같은 여자인 교코의 입장이 되어 슌페이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다시 소설 속 슌페이의 시점에서 얘기가 전개되면 엄청나게 피곤하고 일에 대한 중압감으로 지친 슌페이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어쩌면 이해될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마치 남자와 여자의 심리 차이를 설명하는 책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전화를 걸 시간도 없을 수 있다는 슌페이의 주장이 그렇게 뜨악하지 않게 느껴졌다. 정말로 몇일동안 그렇게 바쁠 수도 있는거지, 뭐. 이러면서...
요시다 슈이치의 <사랑을 말해줘>는 하늘색 배경색에 빨간 하트가 인상적인 표지를 입고 있는데, 요시다 슈이치의 연애소설이라며 홍보하고 있는 띠지가 무색해질 정도로 그 속에는 깊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솔직히 단순한 연애소설이라면 술술 읽히고 읽는 순간에 행복한 기분, 슬픈 기분을 느끼고 책을 덮으면 아~ 부러워라.. 정도로 끝을 맺으면 될텐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았다. 확실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분명히 있고(뒷부분에 나오는 스타디움의 꽉찬 관중들의 수많은 얼굴들의 이미지가 무엇인지는 한 번 읽고 난 지금,, 잘 모르겠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언어영역 공부를 할 때 어느 작품의 주제를 말할 때 '현대 사회의 인간 소외와 고독'... 이런 식으로 무겁게만 얘기하던 것이 사실 이 작품에도 적용할 수 있을 듯하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순수한 사랑은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준 이 작품에 마음깊이 고마움을 느끼면서 두어시간만에 읽어버린 이 소설을 다시 한번 정독해서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