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아직도! 읽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누구나 다 읽은 책 말고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의 <순례자>를 먼저 접하게 되었다. 하얀 표지도 맘에 들었고, 가볍지 않을 것 같은 알 수 없는 무게감도 좋았다. 하지만 그의 문체가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첫부분부터 나오는 '람의 의례'니, '검'이니, '성전'이니 하는 말들에 거부감이 들어서였을까. 이 책은 당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한장 읽는 것도 어찌나 힘들고 더딘지.. 결국 이 책은 내 책장 속에서 고이 잠들어 있었다.
며칠 전, 요즘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을 읽고 있는데, 외국도서가 번역자의 세심한 노력에 의해 탄생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책은 저자의 창작 욕구에 의해 각고의 노력을 거쳐 탄생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내가 내팽겨쳐놓은 <순례자>를 다시 펼쳐들게 되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책을 대해서인지, 아니면 그동안 내가 많이 자란 건지 이번에는 책이 술술 잘 읽혔다. 그 안에 담긴 의미들도 곰곰이 생각하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정성들여 읽어나갔다.
이 책은 주인공인 '나'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라 안내자인 '페트루스'에게 여러가지 의례를 배우고 자신의 검을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솔직히 첫 부분을 집중해서 읽지 못한 탓에 주인공이 왜 브라질의 자신의 생활을 모두 버리고 순례길에 올라 길고 긴 여정을 경험하는지는 다 읽고 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 첫 부분에서 마치 판타지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은 아무래도 '검'이라는 단어 때문이겠지. 그리고 아무래도 기독교 쪽의 종교적인 성향이 강한 책이라서 그것에 대한 거부감이 들어서 이 책에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할 수도 있겠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종교와 상관없이 그저 마음 수련이라는 목적으로 책을 읽고 있다 보면 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종교를 초월해서 우주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책이니까.
인상깊은 구절이나 마음에 드는 문장에는 포스트잇을 붙여 몇번이고 들여다보고 문장을 되새기고는 하는데 이 책에서는 네 군데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다. 첫번째는 "내가 하지 않은 일은 아무 의미가 없고, 앞으로 내가 행할 것들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죠."(52쪽) 과거를 곱씹어보고 돌아보고 후회하는 나의 못난 버릇은 아직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지만 이 말이 갖는 의미는 머리 속으로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머리로 알고 있으니 이미 반은 실현됐고, 이제 실제로 실천만 하면 되는데... 내가 하지 않은 일은 뒤돌아 후회해보았자 역시나 하지 않았고, 물릴 수도 없으며,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지금 올바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실천하자!!
두번째 포스트잇. "인간이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찾아낸 모든 방법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로 인해, 우리를 떠난 누군가로 인해, 그리고 우리를 떠나려 하지 않는 누군가로 인해 고통을 받지요.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고통받고,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을 예속 상태로 변화시키지요.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84쪽) 사람 삶을, 감정을 이렇게 정확하게 꼬집다니.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얘기하다니. 내 모든 괴로움과 우울과 아픔의 원인은 모두 이 문장에 다 들어 있었다. 원인을 알면 해결책도 생기기 마련. 이제 나는 내 아픔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세번째 포스트잇. "사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던 나 자신에 대한 깊은 후회였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충만한 삶을 즐기는 것일진대, 나는 무엇 때문에 거절당할까 두려워하고 하고 싶은 일을 훗날로 미루었던 것일까?"(187쪽)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사는 것 자체, 즉 삶을 두려워한다는 것. 엄청난 반전이 아닐까. 나 역시 삶을 살아내는 것이 두려워 늘 한 자리에서 늘 똑같은 일상을 경멸하면서도 익숙하게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다른 것을 갈망하면서 두려워하는 것. 그래서 내가 스스로 더 한심한 것....
네번째 포스트잇. "몇 분 전 내가 경험한 그 죽음은 나의 친구이자 조언자였다. 나로 하여금 남은 삶의 단 하루라도 비겁하게 살지 않을 것을 결심하게 한. ....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훗날로 미루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치러내야 할 싸움들을 피하게 하지도 않을 것이며, '선한 싸움'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나를 도와줄 것이다. 이제 나는 결코, 어떤 순간에도, 내가 행하는 아주 작은 몸짓 하나라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분명히 말해주었다. 다른 세계로 떠나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가장 큰 죄악과 함께 가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후회라는 죄악이었다."(190쪽) 후회하지 않고 내 목표로 곧게 나아갈 수 있도록,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나는 매일을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 '후회하지 말자'는 아주 흔한 좌우명이 얼마나 지키기 힘든 말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지만, 또 한번 이렇게 다짐해본다.
가슴벅찬 감동으로 위 문장들을 몇번이고 읽고 또 읽고 읽었다. 사실 포스트잇을 붙여놓고도 한두번 읽고는 책장 속으로 직진하는 책들이 많은데, 아마도 이 책은 내 책상 위 책꽂이에, 언제든 내가 손 뻗으면 닿을 곳에 가까이 두고서 자주 자주 읽힐 것 같다. 내가 금방 타이핑한 저 문장들을, 지금도 나는 계속해서 읽고 있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문장들이다. 사실 저 문장들 말고도 각자의 가슴을 울릴 문장들은 여럿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별점이 세개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은 위에서 말했던 너무 종교적인 분위기와 사실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개념들 때문에 읽기 힘들었던 점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파울로 코엘료의 책들이 거기서 거기 라며 피하는 이들도 있던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연금술사>는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책에서는 또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