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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엔 겁을 냈다. 소설책인 주제에 제목에 "수식"이라는 말이 들어있다니. 책 소개글에도 숫자와 수식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박사의 이야기라고 나와있으니 내가 이걸 이해할 수 있겠어? 라는 의구심이 들었고, 막연한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왜 일본에서 서점대상을 받은 소설이고, 많은 사람들이 좋은 책이라고 칭찬을 하는지 궁금증이 일었고, 결국 이 책은 내 손안에 들어오고 말았다. 책 표지는 의외로 작은 소년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박사'와 '수식'이라는 딱딱한 이미지와 달리 어떻게 보면 개구쟁이일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뭔가 많은 걸 알고 있는 듯한 신비한 분위기의 남자아이가 그려져 있다니.. 도대체 이 소설은 뭘 말하려는 거야? .. 드디어 나도 남들 다 읽었다는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아케보노 파출부 소개소에서 소개해준 집에 가서 파출부 일을 하는 나는 어느 날 한 노인의 집으로 일을 하러 가게 된다. 그는 어떤 사고로 인해 1975년에 기억이 멈추어버렸고, 현재의 기억은 단 80분만 지속되는 슬픈 병에 걸려 있었다. (사실 병이라고 하기 보다는, 뇌의 어느 부분에 손상이 간 것이지만,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이 아닐까 생각한다.) 80분만 지속되는 자신이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해 낡은 양복에 수많은 메모지를 끼워놓고 사는 그는 사실 아주 유능한 수학박사였다. 세상에서 수가 가장 아름다우며 그 중에서도 소수를 가장 사랑하고, 하루 종일 수의 세계에 빠져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파출부 일을 하러 온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기는 하지만, 그의 양복엔 '새 파출부'라며 내 얼굴을 엉터리로 그려놓은 메모지가 붙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10살짜리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박사는 기어코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라고 한다. 아이는 엄마를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해서 늙은 박사와 20대의 파출부와 그의 어린 아들, 이 3명의 기묘한 동거(한나절 정도 되는 동거이지만)가 시작된다.
이 소설에서는 실제로 오일러의 공식이라든지, 우애수, 삼각수 등 진짜 수학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나처럼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박사의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 마치 할아버지가 차근 차근 이야기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또 만약 이해가 되지 않는다해도 큰 무리는 없다. 이 책은 수학책이 아니라, 소설책이니까. 소설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수의 완벽함과 아름다움에 빠져있는 한 박사가 파출부와 그 아들 루트에게 우정과 애정을 느끼며 그것을 수로 표현했다는 것이니까. 아이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는 박사도 마음 따뜻해지게 놀랍지만, 무엇보다도 겨우 10살짜리 아이의 속깊은 배려와 어른스러움이 무엇보다도 감동스러웠다. 파출부 일을 하는 엄마때문에 늘 혼자서 밥을 먹고, 숙제를 하고, 늦게 들어오는 엄마를 기다리던 루트는 엄마가 일을 하는 할아버지(박사)의 집에 놀러가게 되면서, 그 할아버지가 겪는 병을 알고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하면서도 아이 특유의 재기발랄함으로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참으로 귀여운 소년이었다. 친할아버지가 아님에도 그의 사랑을 듬뿍 받을 줄 아는 루트의 순수함은 책을 읽고 있는 내 가슴까지 정화시켜 주는 듯했다.
박사와 파출부와 그 아들. 세 명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눈물이 한 방울 또로록 흘러내릴 것 같은 짠한 그리움을 가져다 주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박사의 수식으로 표현한 애정이 부러웠다. 책 띠지에 적혀있는 문구 "한동안 다른 책은 읽고 싶지 않다."가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