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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굴장으로 - 제139회 나오키상 수상작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권남희 옮김 / 시공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누군가를 좋아할 때의 그 가슴 저림을 잊지 못하는 당신의 이야기'라는 혹하는 문구를 띠지에 싣고, '탄탄한 구성, 프로의 문체, 어른의 소설'이라는 극찬이 책 뒷표지에 당당히 실린 이 책. 여성스런 일러스트도 아름답고, 연애소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의외인 <채굴장으로>라는 제목의 이 책. 이노우에 아레노라는 일본 작가 한명을 더 알게 되겠구나, 라며 기대를 갖고 시작한 이 책. 다 읽고 난 지금은 속된 말로 '낚였다.'정도? 내 감성이 무딘 건가, 나는 그동안 자극적인 것에 너무 길들여진 건가.
세이는 아버지가 진료소를 하던 섬에서 학교 양호교사를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본토에서 지내다가 아버지가 실종되면서 섬으로 들어왔는데, 섬처녀 아니 섬아줌마가 되어버렸다. 그래봤자 31살. 아직 젊고 아름답다. 섬이라는 좁고 한정되어 있는 공간에서 가까운 이웃들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세이의 입장에서.
이사와라는 젊은 남자가 학교 음악선생님으로 새로 오면서 세이는 조금씩 흔들린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 이사와가 있고, 왠지 이사와 앞에서는 사투리가 아닌 표준어를 쓰게 되고, 자주 부딪히게 되고. 학교 동료교사인 쓰키에가 불륜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본토씨와의 일들, 몸과 정신이 쇠약해진 시즈카 할머니를 간호하면서 생긴 일들과 더불어 이사와와의 관계가 시종 담담하게 그려진다.
쓰키에와 본토씨, 본토씨의 아내, 이사와. 이렇게 네명의 관계가 오히려 생동감 넘치고, '사건'이라고 명명할 만한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활달하고 자기 주장 강한 쓰키에가 본토씨의 아내와 싸워서 이겼을까, 졌을까. 본토씨와 이사와가 싸워서 누가 이겼을까. 이렇게 궁금해하는 중에 혹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불륜도 사랑일까, 본토씨의 아내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까, 등등.
세이와 남편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보듬어준다. 이상적인 관계라고 생각된다. 세이는 그 관계 속에서 새로 온 선생님 이사와를 조금씩 조금씩 신경쓴다. 책을 읽는 내 입장에서는 그건 정말로 '신경쓴다'는 정도이지, 세이가 이사와를 정말 좋아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나에게 '사랑' 혹은 '좋아하는' 감정은 그 사람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 되고,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감정이 뜨거워서 주체하지 못할 정도가 되는 그 정도인데, 세이가 이사와를 신경쓰는 건 전혀 그 정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인정하지 못하겠다. 물론 남편이 있는 여자인 세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더라도 쓰키에처럼 완전 불륜관계가 되지 않는 이상 그걸 표현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긴 하겠지만, 일상에서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을 간접적으로 겪어보고, 상상해보기 위해 책이나 영화를 접하는 거니까, 그냥 그냥 그냥 그냥 이런 심심한 이야기에 나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고개를 드는 궁금증 하나. 세이가 이사와를 신경쓰는 건 알겠는데, 이사와는 세이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세이의 앞에 불쑥 불쑥 나타나서는 갑자기 휙 사라져버리고.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인 세이를 마음에 품었던 것 아닐까. 그런데 왜 쓰키에와 잤을까.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고, 아무것도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마음이 찝찝하다. 제목처럼 채굴장으로 빠져버린 어둠 속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