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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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많은 일본 소설답지 않게 하드커버가 아니어서 맘에 들었다. 한 권의 소설 치고는 짧은 듯한 대부분의 일본 소설들은 내용의 가벼움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쉽게 읽히기도 하지만, 쉽게 잊혀지기도 했다. 하지만 두번째로 만나게 되는 '온다 리쿠'의 작품은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일본 소설들과는 달라서 좋았다. 짧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고. 솔직히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네 편의 이야기 중 마지막 편은 제대로 읽지 못하고 책을 덮어버렸다. 그의 이야기 방식이 한편으로는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에둘러 이야기하는 것이 답답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의 이름과 작품들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호평이 나를 두번째 작품으로 이끌었다. 바로 이 책 <밤의 피크닉>으로. 
 

스물 네시간, 꼬박 하루동안 한 고등학교의 전교생이 하얀 체육복을 입고 무작정 걷기만 하는 행사, 보행제. 다른 특별한 행사가 끼어 있지도 않고, 그저 걷기만 한다. 학교에서 출발하여 정해진 코스를 돌아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매년 열리는 행사. 마라톤도 아니고 어떻게 하루종일 걷기만 시킬 수 있지? 라는 의아함도 잠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고다 다카코의 시선을 따라가며 독자인 나도 그 보행제에 참가하고 보니 이 행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고, 이 행사를 매년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학교의 뚝심에 경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고다 다카코는 고등학교 3학년. 올해가 마지막 보행제이다. 친한 친구인 치아키와 리카와 함께 걸어간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그렇듯이, 일본의 고등학생들도 친구들의 연애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로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면서 단체보행을 하고 있다. 같이 학교를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버린 안나의 부재를 느끼면서 열심히 걷고 있는 다카코는 마음 속으로 한 가지 내기를 한다. 같은 반이 되어버린 이복남매인 도오루에게 말 한 번 걸어보기.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지만 악연이라고 할 수 있는 끈으로 이어진 도오루와 다카코는 서로를 철저히 무시하면서(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주인공은 다카코와 도오루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주변의 친구들에게도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구석구석 어루만져 있다. 도오루를 좋아하는 치아키의 성숙한 마음가짐, 멋진 커플이었지만 진짜 사랑이 아니라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매력만점 미와코, 낮에는 좀비처럼 축 처져 있다가 밤이 되면 살아나서 "행복하십니까아~"를 연발하는 다카미, 믿음직하고 어른스러운 도다 등등. 다카코와 도오루가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그들은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를 궁금해하면서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어느새 나도 그들 친구가 된 마냥 그 속에 녹아 들어갈 수 있었다. 

계속해서 묘사되는 지친 몸의 피로는, 언뜻 반복되어 지루하기도 했지만, 하루종일 걷는 동안 몸이 피곤한 건 사실인데, 뭘. 그걸 읽는 동안 지루하다고 느꼈던 것은 어쩌면 나도 같이 몸이 나른해지고 피곤해진 건 아닐까, 작가는 그걸 노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특별한 하루, 그 보행제가 내 고등학교 시절에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한뼘은 더 클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하는 아쉬움도 든다. 



인상깊은 구절:

"모두 눈이 번들번들하거든. 우리는 내심 오들오들 떨면서도 번들번들거리고 있어. 지금부터 세상의 것을 소에 넣지 않으면 안 되는 한편,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빼앗기고 싶어하지 않아. 그래서 겁을 내면서도 영악해져 있는 거야. 그런데 다카코는, 번들거리지도 않고 오들오들 떨지도 않아." (219쪽)

"좋아한다는 감정에는 답이 없다. 무엇이 해결책인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으며, 스스로도 좀처럼 찾을 수 없다. 훗날의 행복을 위해 가슴속에 간직하고 허둥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23쪽)

"어제부터 걸어온 길의 대부분도 앞으로 두 번 다시 걸을 일 없는 길, 걸을 일 없는 곳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앞으로 얼마만큼 '평생에 한 번'을 되풀이해 갈까. 대체 얼마만큼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을 만나는 걸까. 어쩐지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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