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나라 베이커리의 이별 파이
임현지 지음 / 머메이드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별나라 베이커리에서 이별 파이를 주문하려면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바로 자신의 이별 이야기를 기록해서 베이커리 주인 덕호에게 건네야 한다는 것입니다. 덕호는 이별 기록을 보고 그와 어울리는 맛과 향을 지닌 이별 파이를 만듭니다. 당연히 손님의 사연에 따라서 이별 파이의 맛과 향은 바뀝니다. 오더메이드입니다. 맞춤형이라고 하니 왠지 이별 파이를 먹으면 이별로 인한 힘든 감정이나 기억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 덕호는 이별 파이를 먹고 더 힘들어졌다는 이고은에게 이별 파이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이별 파이는 그 사람과의 인연을 건강하게 소화시키는 것을 돕는 장치이지 마치 없던 일처럼 기억을 도려내는 장치가 아니라고.(12) 사람은 음식을 먹으면 소화를 합니다. 소화 과정에서 탈이 나면 병원을 가서 진료를 받고 약을 먹습니다. 음식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고, 사람의 신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소화기관을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원인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별 파이는 이별한 사람의 세밀한 관찰을 도와주는 셈입니다.

 

이고은이 밟은 세밀한 관찰 단계를 살펴봅시다. 일단 관계를 분석합니다. 왜 선호를 좋아하게 됐는지, 왜 선호와 데면데면해졌는지, 왜 선호와 이별할 마음을 굳혔는지. 분석을 거듭하다 보면 저절로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좋은 추억도 떠오르고 나쁜 추억도 떠오릅니다. 추억이 선명해질수록 두 사람이 서로 조금씩 멀어지는 타이밍도 선명해집니다. 그 타이밍을 연인으로 지낸 긴 시간이 빨리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놓아주지 못하도록 했을 뿐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현재에 집중합니다. 현재 맡은 업무를 충실히 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요리해서 먹고,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기분 전환을 합니다. 선호와의 관계가 끝나도, 자신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서로에게 충실했던 마음을, 마음껏 사랑했던 감정을 마음을 전하는 방법을 깨닫습니다. 이고은은 선호를 좋은 추억으로 남길 수 있는 중심을 마련한 셈입니다. 이고은은 그 중심을 세우고 새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이별 파이는 사랑을 쏟았다가 물러나야만 했던 존재가 있다면 누구나 주문해도 좋을 듯합니다. 설령 그 대상이 물건이어도 자신만 간직했던 선택이라도. 이별은 불안한 상황과 부정적 감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들을 단시간에 긍정적인 추억과 감정으로 탈바꿈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랑한 기간이 길수록 사랑의 크기가 클수록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요. 이별을 애도하는 기간, 이별 파이처럼 이별을 관찰하고 긍정적 감정으로 변화할 계기가 찾아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느낍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결국 자신이 현재를, 주위를 살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처님 말씀대로 회사생활 - 직장생활이 어려운 당신을 위한 처방전
댄 지그몬드 지음, 최영열 옮김 / 자음과모음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자신을 톱니바퀴의 날, 쳇바퀴를 도는 햄스터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재미, 즐거움, 기쁨 같은 자극을 원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비슷비슷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요? 저자는 퇴근 후에도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거대한 기계 시스템 속에서 깨어 있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10) 일터에서만 깨어 있다고 느끼지 않고, 일터 이외의 공간에서도 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목에 회사생활이 들어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각각의 공간에서 깨어 있는 시간의 합계를 내 보세요. 아마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길 것입니다. 정규 시간만 계산해도 그러한데, 야근이나 출장 시간을 더하면 더 길어지겠지요. 그래서 깨어 있는 시간이 가장 긴 직장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말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글에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바로 이 책에서 인용한 부처의 말은 누군가 부청의 가르침을 암기한 내용을 부처 사후 수 세기 후에 최초로 글로 옮긴 뒤 번역에 번역을 거듭한 사본을 출처라는 것입니다.(48) , 부처의 말은 시대 상황과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회사생활>2021년도에 출판된 <회사에 부처님 오신 날>의 개정판입니다. 2021년과 2026. 5년 동안 사회는 급속도로 변화했습니다. 인공지능의 등장이 직장인에게 기회 또는 위기 중 어느 쪽인지 대두되는 2026, 부처님은 어떤 조언을 할까요?

 

부처는 일을 무언가를 성취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으로 보았다고 합니다.(30) 일 자체가 자아실현인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일이 자아실현이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됩니다. 일을 통해서 얻은 돈과 경험으로 자아실현을 할 다른 방법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든 후자든 일을 해야만 돈과 경험과 성취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처가 일을 필수 요소로 본 이유겠지요.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와 직면합니다. 일과 쉼의 균형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일을 제대로 익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에 집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직장 동료와 대화를 잘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저자는 부처의 말을 현대 방식에 맞게 바꾸어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승가의 규칙 중에는 얼버무리듯 말하고 좌절을 안기는 것을 금한다는 항목이 있다고 합니다.(200) , 구체적이지 않은 지시와 요청은 올바른 결과를 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현대사회의 일의 규칙은 애매모호합니다. 현대사회는 급속도로 변화합니다. 규칙을 구체적으로 세우기도 전에 현대사회는 바뀌기 때문입니다. 사회 변화를 다 포용할 수 있도록. 규칙과 실무를 구분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수를 두어 일의 실무를 가르칩니다. 이 때, 사수는 부하의 수준에 맞는 세부 설명의 범위까지 고려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부하의 수준에 따라서 업무 지시에 대한 이해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하가 잘못 이해하고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됐는지 언급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하도 다음 업무에 반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승가의 규칙은 직장생활에서는 구체적인 지시와 피드백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승가의 규칙을 직장생활에 어떻게 적용하면 되는지, 승가의 규칙처럼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구체적인 방법의 근거로서 수많은 연구와 사례를 듭니다. 그러나 사람은 각자 환경도 성격도 다릅니다. 책 속의 방법들을 모든 독자에게 일률천편으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저자도 이 점을 짚고 넘어갑니다. 당신은 당신만의 것을 찾아야 한다, 무엇이 자신에게 맞는지 혹은 맞지 않는지를 알아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215)

 

부처의 깨달음은 계시가 아닙니다. 부처는 자신의 언행을 일관되게 적용했습니다. 하지만 그 언행이 잘못됐다면 과감히 바꾸었습니다. 일관되게 적용하는 기간이 다를 뿐, 언행을 새롭게 바꾸는 데는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부처는 자신의 깨달음을 언행으로 드러냈습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도 깨달은 바가 있다면 자신의 특성에 맞게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부처의 말은 누군가의 기억과 해석, 번역을 통해서 여러 사람의 특성에 맞게 전해지는 이야기이니까요. 어쩌면 우리도 부처의 말을 새롭게 해석하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긴자 시호도 문구점
우에다 겐지 지음, 최주연 옮김 / 크래커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컴퓨터, 노트북, 태블릿, 스마트폰 등 온갖 디지털 기기는 빠른 속도로 문구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교과 과정에서도 디지털 기기를 도입하는 방식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문구와 디지털 기기를 섞어서 사용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방식을 골라서 쓰고 있습니다. <긴자 시호도 문구점>은 그 중에서 아날로그 방식을 고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할머니로부터 받은 만년필로 편지를 쓰는 신입 사원, 동아리의 연습 일지를 캠퍼스 노트에 기록하는 주장과 부주장, 첫 직장이 정해졌을 때 마담에게서 시스템 다이어리를 선물 받았던 호스티스, 부인에게 100번 째 그림엽서를 적어 주려는 남편, 메모 패드를 활용해서 요리 기술을 익히는 방법을 알려준 이에게 개점 소식을 편지로 보내려는 요리사. 이들은 왜 아날로그 방식을 선택했을까요?

 

서로의 상황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자로 쓴 글씨라면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썼다는 뜻이 됩니다. 휘갈겨 쓴 글씨라면 글씨를 쓸 때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종이에 꾹꾹 눌러쓴 흔적이 있다면 감정을 정제해서 쓰려고 노력했다는 뜻입니다. 잘 어울리는 종이와 펜은 상황과 받는 이를 생각하며 고른 결과물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문구를 주었던, 사용했던, 받았던 경험을 따듯하게 보관합니다. 그 경험의 밑바탕에는 긴자 시호도 문구점 주인 다카라다 겐의 배려가 깔려 있습니다.

 

다카라다 겐은 등장인물들이 문구를 사려는 이유를 듣고 그와 어울리는 문구를 추천합니다. 등장인물들이 마음 편하게 문구를 사용할 시간과 장소도 제공합니다. 등장인물들에게 어떻게 하면 마음을 담아 쓸 수 있는지 알려주는 가이드 역할도 해 줍니다. 문구를 주는 이와 받는 이의 마음뿐만 아니라 문구점을 운영하는 이의 마음도 따듯하게 표현하는 작품입니다.

 

<긴자 시호도 문구점>은 일본에서 문고본이 6권까지 나온 책입니다. 그만큼 문구로 이어지는 인물들의 일상이 깊은 감동을 주는 셈입니다. 한국에는 2권까지 출간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를 계속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트레스는 어떻게 나를 바꾸는가 - 정신과 의사가 알려주는 스트레스의 모든 것
하지현 지음 / 어크로스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목표를 밝힙니다. 스트레스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트레스를 어떻게 보고 다루느냐에 따라 도움이 되거나 해가 될 수 있다는 양면성을 이해하고, 이런 점을 적절히 활용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11) , 독자는 이 책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상황으로만 보지 않고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입니다.

 

이 책은 크게 스트레스의 정의, 스트레스가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 스트레스가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다룹니다. 만약 시간이 많지 않다면 스트레스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을 다루는 6부를 먼저 읽기를 추천합니다. 스트레스에 대응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 상황을 이해하고 싶은 순간이 생깁니다. 그 때, 1~5부를 참고하면 꽤 실용적인 책이 되어줄 것입니다.

 

먼저 스트레스 정의를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스트레스는 외부와 내부의 위험이 될 만한 자극에 대응하기 위해 자기 안의 자원을 동원할 때 나타나는 반응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 갑자기 집중력이 높아지는 일, 갑자기 신체 부위가 아픈 일 모두 스트레스가 작용해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현상들은 좋은 일을 겪을 때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좋지 않은 일로 경험할 때는 디스트레스, 좋은 일로 경험할 때는 유스트레스라고 합니다.(22) 스트레스를 긍정적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스트레스를 긍정적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트레스를 적절히 해소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령대별로 직업별로 해야만 하는 업이 있습니다. 그 업을 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스트레스가 낮을 때는 스트레스에 대응할 자원이 많기 때문에 수행 결과가 좋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쌓이기만 하면 스트레스에 대응할 자원이 적기 때문에 수행 결과가 나쁩니다. 따라서 스트레스를 주기적으로 해소해서 스트레스 지수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만약 자신이 후자의 상태라면 전자의 상태로 돌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저자는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주의 분산, 호흡 조절, 뇌의 습관화, 관점 변환법 등 다양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손쉽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주의 분산입니다. 지금 당신이 어떤 공간에서 무엇을 하며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그 상황과 정반대의 상황을 만들어 보세요. 야외에서 일하고 있다면 카페 같은 실내로 들어가 음료를 마시고, 실내에서 일하고 있다면 공원 같은 야외로 나가서 걸어보세요. 바뀐 공간에서 자신이 맡은 업무와 관련 없는 걸 해 보세요. 이 때, 디지털 기기 사용은 최소한으로 줄이세요. 현대사회는 디지털 기기로 업무 연락을 합니다.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다 업무 사항을 확인하게 되면 주의 분산의 효과가 낮아질 확률이 높아지니까요.

 

다른 방법으로는 현재 하는 업무와 방식이 다른 업무를 해 보세요. 서류 작성을 하면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잠시 데스크 정리를 해 보세요. 서류 작성은 컴퓨터 앞에 가만히 앉아서 화면만 응시하는 업무입니다. 몸이 경직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과도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데스크 정리를 하면 현재 업무에 불필요한 서류나 물건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으면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작은 움직임에도 몸의 경직이 풀립니다. 다시 데스크에 앉았을 때, 스트레스가 적정 수준으로 가라앉으면서 서류 작성을 위해 다시 집중을 발휘하게 됩니다.

 

위의 사례처럼 주의 분산은 현재 상황을 잠시 잊고 다시 집중할 타이밍을 만들어 주는 방법입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있습니다. 주의 분산이 지나치면 문제 회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적정 수준으로 조절하는 것처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도 적정한 강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스트레스 조절을 통해 심신이 편안해지기를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6 제1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채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작품집에는 젊은 작가의 작품에 젊은 평론가의 평론이 실려 있습니다. 분석을 통한 서평은 젊은 평론가에게 맡기고 저는 감상에 가까운 글을 써 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별 세 개가 떨어지다>입니다.

 

<별 세 개가 떨어지다>에 주목한 이유는 종묘원 때문입니다. 종묘원은 나의 할아버지가 식물을 가꾸는 공간입니다. 종묘원은 반원형입니다.(19) 왜 반원형일까요? 반원형도 원형입니다. 원형은 어느 한 곳에 틈이 생겼을 경우 모양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틈이 생기면 주위도 함께 무너지며 원이 아니게 됩니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반원형을 유지하는 데 공을 들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식물이 길이가 달라도, 잎의 크기가 달라도 반원을 유지한다면 모두 살아있는 생명으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한편 종묘원은 작은 야생 숲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19) 그 이유는 반원형의 중심에서 벗어날수록 잡초가 무성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식물들을 온실 속에서 기르지 않습니다. 햇빛을 받으며 자유롭게 자랄 수 있도록 돌봅니다. 잎이 큰 식물들이 만들어내는 그늘도 존재합니다. 햇빛을 쐬다가 힘들면 쉴 수 있는 그늘이 공존하는 종묘원이야말로 할아버지의 은신처입니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과거 한계까지 내몰린 순간을 잊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뜨거운 빛에 적응하는 과정 없이 태양 아래에 내몰려서 살아온 삶. 태양 아래에서 할아버지가 겪은 삶은 어떤 고비로 이루어져 있었을까요? 전진과 쉼의 균형을 이룬 삶은 아니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할아버지는 손주들이 태어날 때마다 태어났다, 말하며 머리를 크게 쓰다듬어 주었다고 합니다.(24) 할아버지는 자신이 어린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했다고 확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에게 자식이 태어납니다. 할아버지는 자식을 기르며 자신에게 없었던 과정을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과정이 서투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자식들이 손주를 낳았습니다. 손주를 돌볼 때는 전진과 쉼의 균형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에 태어났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생각이 종묘원에 그대로 반영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종묘원을 가꾸고 있습니다. 잡초가 무성한 종묘원입니다. 그만큼 메워 나갈 하루를 겪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전진과 쉼을 오가며 종묘원을 가꾸고 있습니다. 종묘원을 제대로 가꾸지 못한다고 해서 상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햇빛을 받으며 자란 큰 잎사귀가 쉴 그늘을 만들어 줄지도 모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