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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수용소 생활을 다룬 책과 영화는 수없이 많다. 그런데 이처럼 참혹하지만 별로 참혹하지 않아 보이는 작품은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수용소 Before와 After에 관해 이처럼 억울하지만 억울하지 않을 수밖에 없어 보이도록 엮은 작품은 처음이다. 물론 나의 짧은 문화적 소견이기에 '왜에..이것도 저것도 충분히 그랬었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지금부터 두 번을 정독하며 중간 중간 해둔 메모들을 엮을 작정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설렌다, 아주 병적으로다가.
배우 메릴 스트립을 닮은 작가는 여자인데 신기하게도 화자를 남자로 잡았다. 이건 참 어려운 일일텐데, 쉽게 하겠다고 덤볐다가 나자빠지는 경우도 많고.
심장삽과 함께 삽질을 표현하는 부분은 실제로 남자의 입으로 시를 조금 덖어서 말하는 듯 사실적이지만 아주 문학적이기도 하다. 힘든 노역이었을 삽질을 그저 삽질만은 아님으로, 허기짐의 고통을 배고픈 천사로 변형시키는 그녀의 긍정은 참으로 어여쁘다, 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읽고는 배신감을 조금 느끼고 만다, 실제로 수용됐던 동료의 말을 듣고 함께 만들어낸 작품이란 사실에. 하긴 그가 죽고나서 힘듦을 딛고 나머지를 그녀가 완성하긴 했는데 그녀가 높이 평가되기에 충분한 일, 질투따윈 접고, 어머니의 표현을 듣고 '랑데부'를 떠올린 화자이니 만큼 그는 고기를 찍어야 할 포크(여성의 질에 넣어야 할 성기)로 감자(남성의 항문)를 찍어 감자가 쭉 벌어지는(신축성이 없으니 당연한 일) 일에 수치심과 죄책감이 크게 작용했으니 수용소라는 단어보다 감자와 포크에 더 반응할 수밖에 없는 그는 수용소 행을 조금은 반기고 조바심까지 낼 만했다. 그래서였을까 수용소 안에서 겪은 수많은 인물과 일들을 때로는 애정을 가지고 바꿔보려 노력하고, 때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자신을 타이르기도 한다.
<어미가 없는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와 쥐 이야기>
고양이는 그의 집 세탁실 후미진 양탄자 구석에서, 새끼쥐들은 수용소 베개와 빵보자기 사이에서, 고양이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에 따라 꼬마였던 그의 손가락을 깨물었다가 복수의 본능에 따라 죽임을 당했고, 새끼 쥐들은 그의 생명연장의 보물이나 다름없을 빵이 그네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의 어미가 그곳에 버리고 갔을 터였다. 고양이는 죽였지만, 새끼 쥐들은 그의 빵과 함께 주변의 어느 구덩이에 살 수 있도록 데려다 주었다. 화자는 이 경우를 '의도'에 따라 분리해 말하고 싶어했지만, 의도 외에 더 중요한 것이 숨어 있다. 보호해 주기 위한 행동의 오해로 공격을 받으면 더 큰 보복이 나간다는 건 본능적으로 당연한 일이고, 배고픔 때문에 사람의 빵을 긁어 먹고 있는 쥐들의 본능을 배고픈 천사 덕에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그의 측은지심이 '어미 없는 새끼'라는 이름에 깊이 가 닿았기 때문에 어렵게 굶어가며 모은 빵과 함께 보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인물과 표현>
빵을 배급하는 펜야는 투니에게 빌붙어 있는 베아와는 다르다. 수용소에 있는 여자 중에 극심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겉껍질이 깔끔하고 멀쩡해 보이는 두 여자처럼 보여 같은 곳에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펜야는 순수 능력으로, 베아는 남자를 꼬시는 능력(그게 비굴한 방법이더라도)으로 수용소 안에서 그럴 듯할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남자 인물은 이발사 오스발트 에니예터.
베아에게서 얻은 물물장소 출입증. 행운과 함께 줍게 된 진흙더미 속의 10루블. 어쩌면 행운이라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인생의 소스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년 동안이나 멀건 양배추 수프와 굳은 빵으로 허기를 달랜 속에 엄청난 양의 음식을 갑자기 쏟아 넣었으니 놀란 속이 음식을 튕겨낼 것이란 사실은 아주 당연한 일에 속하니까. 그에게 현실은 그냥 수용소, 필요한 것은 침대 하나와 펜야의 빵과 양철 그릇뿐이니까. 레오 아우베르크라는 그 자신조차 필요하지 않으니까! 이렇듯 레오의 긍정은 그를 죽음에서 끌어냈다. 책의 전반에 걸쳐 끔찍한 상황들이 표현되고 있지만 되도록 인정하고 긍정하고 받아들이려는 한 인간의 안간힘이 드러나고 있다. 배고픈 천사, 우리 작업이야 예술이죠, 뼈와 가죽만의 시간임에도 양배추 수프를 두 개의 병에 나눠 담아 밀봉하는 행위, 화학성분이 가득한 공장의 냄새를 향기의 거리로 바꿔 매력을 찾아보려는 노력, 전나무 대신 초록장갑으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 거는 모습, 모든 게 지나고 저자와 함께 당시가 제대로 보존된 수용소에 갔을 때 팔짝거리며 좋아하던 실재의 그의 얘기를 들으며 글을 썼다지만 그의 긍정은 정말 엄청나다.
그의 꿈에 대해 콩점을 쳐주는 부분. 어머니가 그의 대리로 얻은 아들이라는 복선이 될 텐데 작가님께 묻고 싶다. 이것 역시 갑작스레 죽었다는 그 수용소의 시인이 실제로 경험했던 것이냐고! 꿈이라는 그 알 수 없는 존재도 무존재도 아닌 것이 정말 그렇게 들어맞았냐고!
또한 작가는 8페이지에 걸쳐 권태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수용소 안에서의 그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 더욱 끔찍하고 희망도 없지만 읽은 것을 자꾸 되뇌다 보니 이곳도 다른 종류의 수용소라는 생각만 든다. '권태는 불안을 견디는 것이다. 권태가 작정하고 나에게 다가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권태는 그저 가끔 내가 잘 지내는지 알고 싶어할 뿐이다.
하얀 토끼가 차지해가고 있는 아내의 수프를 매일 훔쳐먹는 법무사 파울 가스트에게 죄를 물을 수 없고, 아내가 죽자마자 그녀의 외투를 입고 아내 대신 법무사의 이불 속 생활을 책임지는 여가수 로니 미히를 나무랄 수 없고, 법무사의 아내 하이드룬 가스트의 수프를, 죄책감은 사라지고 공복이 심하게 다가온 어느 날 레오가 그녀의 수프를 먹는 모습을 보고 같은 일을 내일 해야겠다 말하는 알베르트 기온과 거칠게 다투는 일에도 사회의 균형 잡겠다고 만든 법과 도덕 따위는 아무런 힘이 없다, 누구도 책임이 없었기에 아무도 책임을 질 수 없었다는 화자의 말처럼!
온통 긍정이고 싶어하는 책 속에서 수많은 고통과 아픔, 처절함을 보았지만 너무 먹먹해서 책장을 넘길 수가 없는 부분이 있다.
' 내 꿈은 어느 수용소를 맴도는 걸까, 심장삽과 슬래그, 지하실이 정말 존재했는지. 꿈은 관심이나 있었을까. 갇혀 있던 오년으로 충분한데. 꿈은 나를 영원히 강제추방하려 하고, 일곱번째 수용소에서는 일조차 못하게 하려는 걸까, 그것이야말로 모욕이다. 나를 몇 번 강제추방하건, 어느 수용소로 보내건 나는 꿈에 대항할 수 없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또다시 강제추방을 당한다면. 나는 알아야 했다, 어떤 처음들은 내가 원치 않아도 다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 이어짐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 것은 무엇일까. 왜 나는 밤이면 다시 처참해질 권리를 가지려는 것일까. 왜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까. 어째서 나는 수용소가 내 것이기를 강요할까. 향수. 마치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
모든 상처가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불안함, 계속되고 있을 때의 고통, 그 어떤 대비도 가능하지 않은 현실에서 오는 좌절. 하루키는 그것이 뱃지와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곳에 있으면서 죽을 때까지, 아니면 이제는 떠나도 되겠다 싶을 때까지 죽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인 것이다. 그걸 견디기 힘들어하고 우울해 하다가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것이다. 아주 억울한 경우는 가해자가 분명히 존재할 경우겠고, 우울해 하는 시간이나 기간을 견디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질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나 역시 화자처럼 그것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할까봐 무섭다. 두렵다.
경비원 카티라는 인물. 바보 천치라서 지금 있는 곳이 수용소인지 뭔지 몰라 언제나 열외가 되는 나름 행복한 인물.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점호시 춤을 출 때 남녀가 몸을 맞대면 조약돌을 던지고, 남자들이 춤을 청하면 깜깜한 곳으로 도망을 가버린다. 그녀는 이미 수용소란 상처 이전에 더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인데, 아마도 그것은 남성에 의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작가는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기에 경비원 카티의 과거 만들기는 독자들의 몫이 되겠지만.
레오를 버티게 했던 것은 어쩌면 긍정이 아니라 랑데부(동성애)에 대한 죄책감의 면죄부를 위해, 발각될 경우 반드시 죽임을 당할 (당시에는 그것이 죽음까지도 가져올 수 있느 행동이었단다) 상황의 모면을 위해 수용소라는 장소가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950년 1월 초, 레오가 수용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일터에서 돌아오면 할머니의 목에 매달리고 싶기도, 할머니 흉내를 내느라 레오의 이마에 통통한 손을 대며 '왔니' 하는 대리형제의 목을 조르고 싶기도 한 그를 무덤덤한 가족에게서 자란 무덤덤함이 말렸다. 그가 돌아왔을 때 반가움보다 놀라움이 컸고, 집 안에 달갑지 않은 안도감이 퍼졌음을 알게 됐다고, 그가 살아 있음으로써 그들의 추모 기간을 기만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가족들의 잘못이다. 워낙에 무덤덤해서라는 핑계는 그럴 때 통하지 말아야 한다.
투어 푸리쿨리치의 보물 이야기. 작은 보물이란 나 여기 있다라고 적힌 것들, 그것보다 조금 큰 보물은 아직 기억나니라고 적힌 것들, 무엇보다 큰 보물은 나 거기 있었다라고 적힌 것들. 레오의 주머니에 쑤셔넣어진 대리형제의 모피를 보물이라 표현한 그의 아버지는 투어처럼 보물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화자. 그래 17년을 함께 살고 겨우 5년을 떠났다 온 상처 받은 영혼을 다독이지 못하는 가족은 그저 당장 함께 대리아들로서 필요했던 로베르트를 보물이라 여겼을 테니까.
이런 경험을 하고 저런 느낌을 갖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수용소를 경험한 시인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표정을 하고 세상을 떠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