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어 마스크 레플리카 이매진 드라마톨로지 1
하일지.정영문.서준환.김경주 지음, 장정일.김경주 기획 / 이매진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희곡이 왜 보기 불편한지 이제야 알았다. 공연한 경험이 있어서 희곡을 보면 반드시 그것을 무대 위에 올려서 해 봐야 할 일임이 내게는 당연한 일이니까. 보지 말고 열심히 연습하고 맞춰서 공연을 올려야 하는데.. 그저 보고 있으려니 몸이 간질간질한 것이다.

<파도를 타고 - 하일지>
언젠가 하일지의 소설 '진술'을 희곡으로 고쳐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던 장정일 생각이 났다.
'진술'은 간 데 없고 갑작스레 희곡을 모아 엮고 있는 주동자인 듯 보이는 가운데 하일지의 희곡이 맨 처음 실린 책이 한 권 나왔구나.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하일지의 '파도를 타고'에서 장정일의 희곡 냄새가 진동을 한다. 

전세를 빼 싸구려 고물 배를 사서 바다에 무작정 나서면 뭐하나,
이 세상이란 것이 어딜 가든 지들 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사회' 라는 지긋지긋한 테두리 속에 똑같은 모습일뿐이지. 그냥 무관심하거나 지나친 관심을 가지며 그 나라가 어디건 그냥 살 일이다.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눈먼 노파와 손에 든 권총이 보여주듯 지독하게 독해졌을 영희를 태우고 노인의 관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당나귀들 - 정영문>
말장난으로 가득한데 무언가 의미 있는 것들이 쏙쏙 들어가 있기는 하다. '그 투구에게는 당신의 머리가 잘 어울리지 않는 게 잘 어울려 보여'라는 말이라든지, 상황보고를 하라고 부른 전령이 상황보고를 하기 위해 나무의 생김부터 아주 길게 설명하는 부분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계속되는데 단 한 사람, '장군'만은 그렇지 않지만 슬프게도 생각만 많고 결단력이 없는 우유부단한 작자다. 어째 딱 대한민국 정치판이나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들의 모습을 역사적으로 훑어보는 것 같다. 하긴, 헛소리를 하는 인간들이란 뜻으로 쓰이는 '당나귀들'이 제목이니 이런 내용이 나오는 건 당연하겠지. 장군, 당나귀가 아닌 그가 하는 말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이 작품. '어쩌면 지금의 이 상황은 말이, 아니 그것보다도 생각이 문제가 되는 상황 같아.모든 상황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는 건 생각이지. 지금 또한 생각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야. 생각 때문에
문제가 되는 그 상황이야말로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상황이지.가장 어려운 상황은 언제나 생각 속에 있지.' 라고!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 - 서준환>
냄새 심한 여자 발을 너무 좋아해서 잘라가지고 도망한 남자.
의족을 한 채 변태 남자들을 죽인 뒤 시간(시체를 강간)하는 모습을 쇼로 보여주며 돈을 버는 마담과 미미(루루). 작가는 계속 두 명의 미미와 범죄자를 들먹여 독자를 헷갈림의 늪으로 밀어 넣으려 하지만, 발에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루루(미미)와 정신 이상 변태인 무슈A(무슈M)에 대한 힌트를 얻는 순간 궁금증은 사라진다. 결국 가해자들은 과거 어느 순간에서 피해자였고, 그 상처가 다시 같거나 비슷한 가해의 형체로 나타난다는 것? 나도 성폭력 하는 새끼들 다 모아다 다 죽여 버리고 시간하는 미친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가는.

<블랙박스 - 김경주>
각 작품마다 맨 앞에 작가의 큰 사진과 이력이 나와 있는데 김경주란 작가 어딘가 모르게 친근감이 있다. 아니 잘생겼다^^;
이 사람 시가 당선돼서 등단했다는데 지금 극작가로 활동하면서 실험극 기획, 연출까지 하며 사는 다재다능한 사람인데, 작품은 아주 난해하다, 누가 실험극 연출자 아니랄까봐.

비행기 속에서 단 두 사람 미하엘과 카파가 나누는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작품 역시 '언어'를 직업으로 삼고 사는 카파가 작품의 난해함을 주도하고 있는데, 과연 무대에 올려지면 어떨까를 생각하며 보고 있다. 백년 전에 떠난 구름이 다시 돌아와 그 속에 있다고 말하는 스튜어디스, 비행기는 그래서 그동안 잃은 언어를 다시 배우고 있다고 말하는 스튜어디스와 귀를 핥고 있는 구름 때문에 한 쪽 귀가 막혀 들리지 않는다고 장단 맞추는 카파.

도대체가 정신이상자들이 나오지 않는 희곡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느껴질 만큼 표준 궤도를 벗어난 인간만이 신나게 희곡 속에서 노닌다. 어쩌면 그게 세상의 진실이기 때문이라는 항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