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이장욱 외 지음 / 작가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배수아 때문에 샀고 그녀의 [무종]은 이미 다른 책에서 읽었지만 그래도 다른 한국 작가들의 글을 이렇게 아니면 볼 기회를 갖기 힘듦을 알기에 일부러 주문상품에 추가했던 책.

<변희봉 - 이장욱>
괴물에 나왔던 송강호 아버지가 정말 김인문이었던가 찾아 볼 뻔했다.  (밴희봉) 선생과 닮은 민간인을 보고 진짜로 착각하는 화자. 작가가 부산 사람인지 사투리가 맛깔스러웠다.
그래 어쩌면 배우 자체가 지닌 자신의 이름 변희봉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생선장사 역일 땐 생선장수 아무개, 주례 역일 땐 주례 선생 아무개가 반드시 돼야 그게 진짜 배우니까.
아마도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게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오해를 한번 해본다.

<간과 쓸개 - 김숨>
웬만한 일로는 책을 한 번 이상 읽지 않는 내게 이런 일들은 가끔 기쁨이 되기도 한다. 이상 문학상 수상집에서 봤던가, 그 때의 기억에 좋았던 이 작품을 다시 읽게 되다니!
굉장히 담담하게 써내려간 혼자 사는 노인의 이야기, 그것도 간암에 걸린. 그러고 보니 토론 모임에서 이 작품에 대한 얘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계량기 속에 들어가 사는 곤충은 귀뚜라미가 아니라 따로 있다던 행미씨의 말. 그 곤충이 뭐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사실 난 작가가 놓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했는데, 이것은 어차피 소설이고 곤충을 소재로 잡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보통 인간들이 잘 기억하지 못할 곤충 이름을 굳이 들먹일 필요는 없다 여기고, 특히 여기서는 화자가 60대 할아버지인 만큼 그 곤충이 그냥 귀뚜라미처럼 생겨 보이니 귀뚜라미라 얘기하도록 둔 것이 아닐까 하는.   '누님을 만나러 가야지'를 시작으로 내내 따라다니던 그것을 해낸 어느 날, 결국 두 골목(버섯을 키우는 뿌리와 가지를 잘라낸 나무)은 함께 운다, 아흔이 넘은 하나는 병실 침대에서, 예순이 넘은 하나는 간병인 용 간이침대에서. 어쩌면 그것이 저세상 데려가는 순서라도 되는 듯.

<벌레들 - 김애란>
글이 쓸 데 없이 길다, 지루하기도 하고. 제대로 끝을 맺지도 않고, 어영부영 끝났다.
그녀는 결국  벌레 속에서 아이를 낳게 되겠지.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인지.
글쓰기 연습을 한 것만 같은 이것이 왜 여기 끼게 됐는지 모르겠다.

<유리의 도시 - 김중혁>
아이디어도 뭣도 다 좋은데 이 작품 역시 끝이 제대로 맺어지지 않고 있다. 끝을 상상에 맡기도록 하는 분위기도 아닌 뭐 똥싸고 뒤 닦다 만 느낌이랄까. 초음파 총이 아니어도 날씨가 유리를 수축시킬 수 있었다는 건가? 결국 살인이 아닌 자연재해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무종 - 배수아>
세 번째 읽는 무종. 과연 어떨지!
이 단편이 무종이란 건물을 찾아 헤매는 것인 만큼, 문체 자체도 이랬던 것도 같고 저랬던 것도 같은 아리까리한 분위기. 이것이 바로 재독의 묘미.
다른 책에서 [무종]을 두 번 봤지만 편집이 이렇게 개떡 같기는 처음이다. 띄어쓰기가 엉망진창인 무종이 돼버렸다.
그렇기는 해도 이 책이 아주 의미가 없지 않은 것이 앞에 그녀의 새로 찍은 듯한 사진과 글들 덕에 그녀가 나처럼 충동으로 일생을 꾸린다는 사실 등을 얻어 기쁜 책이 되었다.
우리가 가진 이름,물건,기억들...이런 게 과연 실재하는 것이기는 할까? 갔었지만 없었다고 느꼈던 무종의 탑이, 그 무종의 크림이 발견된 어느 날 크림을 진짜 봤노라고 모형비행수집가에게 말하고 싶어지듯이 과연 진실이라는 것들은!

<세상 끝의 신발 - 신경숙>
신경숙은 대부분 같은 문체로 자신의 이야기와 주변의 얘기를 그냥 쓰는 작가 같다. 죽어라 죽어라 하는 순옥 언니와 낙천이 아저씨의 인생을 아주 감성적으로 여느 때와 같이 썼다.

<통조림 공장 - 편혜영>
통조림을 밀봉하는 행위. 소비자인 우리는 밀봉된 것을 뜯지만, 그것을 만드는 생산자는 무엇이든 넣고 밀봉하는 작업을 했을 것이란 생각. 그리고 T국에 있는 아내와 아이에게 보낼 음식을 밀봉했듯 그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 역시 현재도 그렇게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진다. 여자가 썼다고 하기엔 독특한 분위기의 이 작품. 편혜영이란 작가 앞으로 살펴봐야겠다.

단편들이 끝나고 뒤에 간단한 서평이 일곱 개 실렸는데 너무 웃기는 게 김이은의 '코끼리가 떴다'를 소개하는 윤후명의 글을 덧붙였다는 것. 몇 권의 책을 찍었는지 모르지만 직원들이 하나 하나 붙이며 시발시발 했을 것을 생각하니 우습기도, 슬프기도. 다시 찍을 만큼 출판사가 여유롭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다음은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띄어쓰기는 표기하지 않겠다,너무 많으니까)

94쪽 8줄, 되도 -> 돼도

111쪽 끝, 얘기에요 -> 얘기예요

131쪽 6줄, 건내준 -> 건네준

150쪽 밑에서 8줄, 의례히 -> 으레

154쪽 12줄, 길다란 -> 기다란

176쪽 밑에서 11줄, 무엇이었을런지 -> 무엇이었을는지

255쪽 1줄, 존재에요 -> 존재예요

258쪽 3줄, 작가에요 -> 작가예요

273쪽 2줄, 상화 -> 상황

278쪽 밑에서 3줄, 울란바트르에요 -> 울란바트르예요

279쪽 6줄, 가지에요 -> 가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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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 마스크 레플리카 이매진 드라마톨로지 1
하일지.정영문.서준환.김경주 지음, 장정일.김경주 기획 / 이매진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희곡이 왜 보기 불편한지 이제야 알았다. 공연한 경험이 있어서 희곡을 보면 반드시 그것을 무대 위에 올려서 해 봐야 할 일임이 내게는 당연한 일이니까. 보지 말고 열심히 연습하고 맞춰서 공연을 올려야 하는데.. 그저 보고 있으려니 몸이 간질간질한 것이다.

<파도를 타고 - 하일지>
언젠가 하일지의 소설 '진술'을 희곡으로 고쳐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던 장정일 생각이 났다.
'진술'은 간 데 없고 갑작스레 희곡을 모아 엮고 있는 주동자인 듯 보이는 가운데 하일지의 희곡이 맨 처음 실린 책이 한 권 나왔구나.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하일지의 '파도를 타고'에서 장정일의 희곡 냄새가 진동을 한다. 

전세를 빼 싸구려 고물 배를 사서 바다에 무작정 나서면 뭐하나,
이 세상이란 것이 어딜 가든 지들 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사회' 라는 지긋지긋한 테두리 속에 똑같은 모습일뿐이지. 그냥 무관심하거나 지나친 관심을 가지며 그 나라가 어디건 그냥 살 일이다.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눈먼 노파와 손에 든 권총이 보여주듯 지독하게 독해졌을 영희를 태우고 노인의 관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당나귀들 - 정영문>
말장난으로 가득한데 무언가 의미 있는 것들이 쏙쏙 들어가 있기는 하다. '그 투구에게는 당신의 머리가 잘 어울리지 않는 게 잘 어울려 보여'라는 말이라든지, 상황보고를 하라고 부른 전령이 상황보고를 하기 위해 나무의 생김부터 아주 길게 설명하는 부분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계속되는데 단 한 사람, '장군'만은 그렇지 않지만 슬프게도 생각만 많고 결단력이 없는 우유부단한 작자다. 어째 딱 대한민국 정치판이나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들의 모습을 역사적으로 훑어보는 것 같다. 하긴, 헛소리를 하는 인간들이란 뜻으로 쓰이는 '당나귀들'이 제목이니 이런 내용이 나오는 건 당연하겠지. 장군, 당나귀가 아닌 그가 하는 말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이 작품. '어쩌면 지금의 이 상황은 말이, 아니 그것보다도 생각이 문제가 되는 상황 같아.모든 상황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는 건 생각이지. 지금 또한 생각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야. 생각 때문에
문제가 되는 그 상황이야말로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상황이지.가장 어려운 상황은 언제나 생각 속에 있지.' 라고!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 - 서준환>
냄새 심한 여자 발을 너무 좋아해서 잘라가지고 도망한 남자.
의족을 한 채 변태 남자들을 죽인 뒤 시간(시체를 강간)하는 모습을 쇼로 보여주며 돈을 버는 마담과 미미(루루). 작가는 계속 두 명의 미미와 범죄자를 들먹여 독자를 헷갈림의 늪으로 밀어 넣으려 하지만, 발에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루루(미미)와 정신 이상 변태인 무슈A(무슈M)에 대한 힌트를 얻는 순간 궁금증은 사라진다. 결국 가해자들은 과거 어느 순간에서 피해자였고, 그 상처가 다시 같거나 비슷한 가해의 형체로 나타난다는 것? 나도 성폭력 하는 새끼들 다 모아다 다 죽여 버리고 시간하는 미친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가는.

<블랙박스 - 김경주>
각 작품마다 맨 앞에 작가의 큰 사진과 이력이 나와 있는데 김경주란 작가 어딘가 모르게 친근감이 있다. 아니 잘생겼다^^;
이 사람 시가 당선돼서 등단했다는데 지금 극작가로 활동하면서 실험극 기획, 연출까지 하며 사는 다재다능한 사람인데, 작품은 아주 난해하다, 누가 실험극 연출자 아니랄까봐.

비행기 속에서 단 두 사람 미하엘과 카파가 나누는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작품 역시 '언어'를 직업으로 삼고 사는 카파가 작품의 난해함을 주도하고 있는데, 과연 무대에 올려지면 어떨까를 생각하며 보고 있다. 백년 전에 떠난 구름이 다시 돌아와 그 속에 있다고 말하는 스튜어디스, 비행기는 그래서 그동안 잃은 언어를 다시 배우고 있다고 말하는 스튜어디스와 귀를 핥고 있는 구름 때문에 한 쪽 귀가 막혀 들리지 않는다고 장단 맞추는 카파.

도대체가 정신이상자들이 나오지 않는 희곡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느껴질 만큼 표준 궤도를 벗어난 인간만이 신나게 희곡 속에서 노닌다. 어쩌면 그게 세상의 진실이기 때문이라는 항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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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수용소 생활을 다룬 책과 영화는 수없이 많다. 그런데 이처럼 참혹하지만 별로 참혹하지 않아 보이는 작품은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수용소 Before와 After에 관해 이처럼 억울하지만 억울하지 않을 수밖에 없어 보이도록 엮은 작품은 처음이다. 물론 나의 짧은 문화적 소견이기에 '왜에..이것도 저것도 충분히 그랬었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지금부터 두 번을 정독하며 중간 중간 해둔 메모들을 엮을 작정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설렌다, 아주 병적으로다가.  

배우 메릴 스트립을 닮은 작가는 여자인데 신기하게도 화자를 남자로 잡았다. 이건 참 어려운 일일텐데, 쉽게 하겠다고 덤볐다가 나자빠지는 경우도 많고. 

심장삽과 함께 삽질을 표현하는 부분은 실제로 남자의 입으로 시를 조금 덖어서 말하는 듯 사실적이지만 아주 문학적이기도 하다. 힘든 노역이었을 삽질을 그저 삽질만은 아님으로, 허기짐의 고통을 배고픈 천사로 변형시키는 그녀의 긍정은 참으로 어여쁘다, 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읽고는 배신감을 조금 느끼고 만다, 실제로 수용됐던 동료의 말을 듣고 함께 만들어낸 작품이란 사실에. 하긴 그가 죽고나서 힘듦을 딛고 나머지를 그녀가 완성하긴 했는데 그녀가 높이 평가되기에 충분한 일, 질투따윈 접고, 어머니의 표현을 듣고 '랑데부'를 떠올린 화자이니 만큼 그는 고기를 찍어야 할 포크(여성의 질에 넣어야 할 성기)로 감자(남성의 항문)를 찍어 감자가 쭉 벌어지는(신축성이 없으니 당연한 일) 일에 수치심과 죄책감이 크게 작용했으니 수용소라는 단어보다 감자와 포크에 더 반응할 수밖에 없는 그는 수용소 행을 조금은 반기고 조바심까지 낼 만했다. 그래서였을까 수용소 안에서 겪은 수많은 인물과 일들을 때로는 애정을 가지고 바꿔보려 노력하고, 때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자신을 타이르기도 한다. 

<어미가 없는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와 쥐 이야기> 

고양이는 그의 집 세탁실 후미진 양탄자 구석에서, 새끼쥐들은 수용소 베개와 빵보자기 사이에서, 고양이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에 따라 꼬마였던 그의 손가락을 깨물었다가 복수의 본능에 따라 죽임을 당했고, 새끼 쥐들은 그의 생명연장의 보물이나 다름없을 빵이 그네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의 어미가 그곳에 버리고 갔을 터였다. 고양이는 죽였지만, 새끼 쥐들은 그의 빵과 함께 주변의 어느 구덩이에 살 수 있도록 데려다 주었다. 화자는 이 경우를 '의도'에 따라 분리해 말하고 싶어했지만, 의도 외에 더 중요한 것이 숨어 있다. 보호해 주기 위한 행동의 오해로 공격을 받으면 더 큰 보복이 나간다는 건 본능적으로 당연한 일이고, 배고픔 때문에 사람의 빵을 긁어 먹고 있는 쥐들의 본능을 배고픈 천사 덕에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그의 측은지심이 '어미 없는 새끼'라는 이름에 깊이 가 닿았기 때문에 어렵게 굶어가며 모은 빵과 함께 보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인물과 표현> 

빵을 배급하는 펜야는 투니에게 빌붙어 있는 베아와는 다르다. 수용소에 있는 여자 중에 극심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겉껍질이 깔끔하고 멀쩡해 보이는 두 여자처럼 보여 같은 곳에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펜야는 순수 능력으로, 베아는 남자를 꼬시는 능력(그게 비굴한 방법이더라도)으로 수용소 안에서 그럴 듯할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남자 인물은 이발사 오스발트 에니예터. 

베아에게서 얻은 물물장소 출입증. 행운과 함께 줍게 된 진흙더미 속의 10루블. 어쩌면 행운이라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인생의 소스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년 동안이나 멀건 양배추 수프와 굳은 빵으로 허기를 달랜 속에 엄청난 양의 음식을 갑자기 쏟아 넣었으니 놀란 속이 음식을 튕겨낼 것이란 사실은 아주 당연한 일에 속하니까. 그에게 현실은 그냥 수용소, 필요한 것은 침대 하나와 펜야의 빵과 양철 그릇뿐이니까. 레오 아우베르크라는 그 자신조차 필요하지 않으니까!  이렇듯 레오의 긍정은 그를 죽음에서 끌어냈다. 책의 전반에 걸쳐 끔찍한 상황들이 표현되고 있지만 되도록 인정하고 긍정하고 받아들이려는 한 인간의 안간힘이 드러나고 있다. 배고픈 천사, 우리 작업이야 예술이죠, 뼈와 가죽만의 시간임에도 양배추 수프를 두 개의 병에 나눠 담아 밀봉하는 행위, 화학성분이 가득한 공장의 냄새를 향기의 거리로 바꿔 매력을 찾아보려는 노력, 전나무 대신 초록장갑으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 거는 모습, 모든 게 지나고 저자와 함께 당시가 제대로 보존된 수용소에 갔을 때 팔짝거리며 좋아하던 실재의 그의 얘기를 들으며 글을 썼다지만 그의 긍정은 정말 엄청나다.  

그의 꿈에 대해 콩점을 쳐주는 부분. 어머니가 그의 대리로 얻은 아들이라는 복선이 될 텐데 작가님께 묻고 싶다. 이것 역시 갑작스레 죽었다는 그 수용소의 시인이 실제로 경험했던 것이냐고! 꿈이라는 그 알 수 없는 존재도 무존재도 아닌 것이 정말 그렇게 들어맞았냐고! 

또한 작가는 8페이지에 걸쳐 권태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수용소 안에서의 그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 더욱 끔찍하고 희망도 없지만 읽은 것을 자꾸 되뇌다 보니 이곳도 다른 종류의 수용소라는 생각만 든다. '권태는 불안을 견디는 것이다. 권태가 작정하고 나에게 다가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권태는 그저 가끔 내가 잘 지내는지 알고 싶어할 뿐이다.  

하얀 토끼가 차지해가고 있는 아내의 수프를 매일 훔쳐먹는 법무사 파울 가스트에게 죄를 물을 수 없고, 아내가 죽자마자 그녀의 외투를 입고 아내 대신 법무사의 이불 속 생활을 책임지는 여가수 로니 미히를 나무랄 수 없고, 법무사의 아내 하이드룬 가스트의 수프를, 죄책감은 사라지고 공복이 심하게 다가온 어느 날 레오가 그녀의 수프를 먹는 모습을 보고 같은 일을 내일 해야겠다 말하는 알베르트 기온과 거칠게 다투는 일에도 사회의 균형 잡겠다고 만든 법과 도덕 따위는 아무런 힘이 없다, 누구도 책임이 없었기에 아무도 책임을 질 수 없었다는 화자의 말처럼! 

온통 긍정이고 싶어하는 책 속에서 수많은 고통과 아픔, 처절함을 보았지만 너무 먹먹해서 책장을 넘길 수가 없는 부분이 있다.  

' 내 꿈은 어느 수용소를 맴도는 걸까, 심장삽과 슬래그, 지하실이 정말 존재했는지. 꿈은 관심이나 있었을까. 갇혀 있던 오년으로 충분한데. 꿈은 나를 영원히 강제추방하려 하고, 일곱번째 수용소에서는 일조차 못하게 하려는 걸까, 그것이야말로 모욕이다. 나를 몇 번 강제추방하건, 어느 수용소로 보내건 나는 꿈에 대항할 수 없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또다시 강제추방을 당한다면. 나는 알아야 했다, 어떤 처음들은 내가 원치 않아도 다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 이어짐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 것은 무엇일까. 왜 나는 밤이면 다시 처참해질 권리를 가지려는 것일까. 왜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까. 어째서 나는 수용소가 내 것이기를 강요할까. 향수. 마치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 

모든 상처가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불안함, 계속되고 있을 때의 고통, 그 어떤 대비도 가능하지 않은 현실에서 오는 좌절. 하루키는 그것이 뱃지와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곳에 있으면서 죽을 때까지, 아니면 이제는 떠나도 되겠다 싶을 때까지 죽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인 것이다. 그걸 견디기 힘들어하고 우울해 하다가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것이다. 아주 억울한 경우는 가해자가 분명히 존재할 경우겠고, 우울해 하는 시간이나 기간을 견디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질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나 역시 화자처럼 그것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할까봐 무섭다. 두렵다. 

경비원 카티라는 인물. 바보 천치라서 지금 있는 곳이 수용소인지 뭔지 몰라 언제나 열외가 되는 나름 행복한 인물.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점호시 춤을 출 때 남녀가 몸을 맞대면 조약돌을 던지고, 남자들이 춤을 청하면 깜깜한 곳으로 도망을 가버린다. 그녀는 이미 수용소란 상처 이전에 더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인데, 아마도 그것은 남성에 의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작가는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기에 경비원 카티의 과거 만들기는 독자들의 몫이 되겠지만. 

레오를 버티게 했던 것은 어쩌면 긍정이 아니라 랑데부(동성애)에 대한 죄책감의 면죄부를 위해, 발각될 경우 반드시 죽임을 당할 (당시에는 그것이 죽음까지도 가져올 수 있느 행동이었단다) 상황의 모면을 위해 수용소라는 장소가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950년 1월 초, 레오가 수용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일터에서 돌아오면 할머니의 목에 매달리고 싶기도, 할머니 흉내를 내느라 레오의 이마에 통통한 손을 대며 '왔니' 하는 대리형제의 목을 조르고 싶기도 한 그를 무덤덤한 가족에게서 자란 무덤덤함이 말렸다. 그가 돌아왔을 때 반가움보다 놀라움이 컸고, 집 안에 달갑지 않은 안도감이 퍼졌음을 알게 됐다고, 그가 살아 있음으로써 그들의 추모 기간을 기만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가족들의 잘못이다. 워낙에 무덤덤해서라는 핑계는 그럴 때 통하지 말아야 한다.  

투어 푸리쿨리치의 보물 이야기. 작은 보물이란 나 여기 있다라고 적힌 것들, 그것보다 조금 큰 보물은 아직 기억나니라고 적힌 것들, 무엇보다 큰 보물은 나 거기 있었다라고 적힌 것들. 레오의 주머니에 쑤셔넣어진 대리형제의 모피를 보물이라 표현한 그의 아버지는 투어처럼 보물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화자. 그래 17년을 함께 살고 겨우 5년을 떠났다 온 상처 받은 영혼을 다독이지 못하는 가족은 그저 당장 함께 대리아들로서 필요했던 로베르트를 보물이라 여겼을 테니까. 

이런 경험을 하고 저런 느낌을 갖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수용소를 경험한 시인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표정을 하고 세상을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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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강석경 외 지음 / 열화당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문학인 71 명의 자신이 왜 문학을 하게 되었는가 또는 왜 하고 있는가에 대한 글.

이런 종류의 책은 신기하게도 각 작가들의 작품을 일일이 찾아 읽는 것보다 그에 대한 훨씬 커다란 정보가 된다. 왜 문학을 하는가와 자신의 작품은 닮아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배수아 때문에 산 책.
그녀의 글을 보니 역시 그녀의 작품이 보이는구나.
71 편의 글이 모두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시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글은 고은 시인을 제외하고
그저 그랬던 듯싶다, 여기서 시보다 소설을 선호하는 내 취향이
또 한번 드러나는 것.
 

모르는 작가가 꽤 됐는데, 기형도 시인을 좋아하고 이 중 시인들을 대부분 만나 술잔을 나눴을  
권차장님께 이 책과 기형도 전집을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만간 이사를 도와주러 오시면 그 때 드려야지. 


강석경 ㅣ 나의 한가운데로 가는 여정
강은교 ㅣ 마중물을 찾아서 -'나의 하루'를 따라
고은    ㅣ 나의 문학은 폐허로부터 시작됐다
고형렬 ㅣ 세상에 시 한 송이 바친다
공지영 ㅣ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나뿐이므로
구효서 ㅣ 문학, 그 신비한 질문의 늪으로의 여정
김광규 ㅣ 중얼거리기 위하여
김기택 ㅣ 나를 견디는 일
김명인 ㅣ 우연과 필연
김성동 ㅣ 홀로 피어나는 '그늘의 꽃'
김연수 ㅣ Ten days of happiness
김영현 ㅣ 문학, '깊은 강'을 건너온 나의 숙명
김용택 ㅣ 문득 시가 내게로 왔다
김원우 ㅣ '현대' 소설의 위상에 대한 자성
김원일 ㅣ 고단한 기억을 치유하기 위하여
김정환 ㅣ '글의 독재' 넘어 예술의 민주주의로
김주영 ㅣ 자유는 나의 숙명, 고통은 나의 벗
김지하 ㅣ 어둠 속 '흰 그늘'과도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
김혜순 ㅣ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남진우 ㅣ 내 마음속 순결한 설산을 향해 걸어갈 뿐
도종환 ㅣ 시는 내 인생의 길이었다
마종기 ㅣ 신명나는 놀이, 혹은 황홀
박범신 ㅣ 부러진 가위
박상우 ㅣ 나는 내가 왜 문학을 하는지 모른다
박영한 ㅣ 미스 스윙
박태순 ㅣ 부드러운 세상을 위하여
배수아 ㅣ 엄격에 사로잡힌 이유
복거일 ㅣ 수성(獸性)의 옹호
서정인 ㅣ 왜 쓰냐?
성석제 ㅣ 호랑이 발자국
신경림 ㅣ 시는 스스로 충만한 한 그루 나무
신경숙 ㅣ 해결되지 않는 것들을 향하여
심상대 ㅣ 문학이 나를 탐낸다
안도현 ㅣ 이 세상과의 연애
안정효 ㅣ 글을 써야 하는 이유
윤후명 ㅣ '나'를 찾아가는 길: 내 꿈은 살아 있다
윤흥길 ㅣ 내 영혼의 빈 그릇을 채우기 위하여
이강백 ㅣ 겹겹의 과거를 현재진행형으로 풀어내는 희곡
이동하 ㅣ 전쟁의 상처와 무능한 손
이문열 ㅣ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
이성복 ㅣ 시는 '머리의 언어' 전복시키는 '몸의 언어'
이성부 ㅣ 마음밭 일구는 내면의 파수꾼
이시영 ㅣ 잃어버린 지명, 잃어버린 고향
이윤기 ㅣ '삶의 텍스트' 번역하면 내 몸이 가벼워진다
이윤택 ㅣ 삶의 본질에 가 닿는 시적 상상을 맘껏 부리리라
이인성 ㅣ 자문자답
이청준 ㅣ 밤 산길을 헤매는 독행자
이형기 ㅣ 통념과 상식의 초극을 위하여
이혜경 ㅣ 제대로 할 때까지 다시 한번
임철우 ㅣ 무엇이 내게 소설을 쓰게 하는가
장석남 ㅣ 대나무와 누에고치와 그 '비스므리한' 어떤 것이 있어서
전경린 ㅣ 작가에 대한 일곱 가지 기대에 관한 추억
전상국 ㅣ 문학은 내 삶의 구원자이자 존재이유
정일근 ㅣ 시와 사람이 한 몸인, 자연 속의 시인이 되기 위하여
정찬    ㅣ 인간이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
정호승 ㅣ 시의 수련이 되고 싶다
조성기 ㅣ 문학이 내 마음을 두드렸다
조정래 ㅣ 왜 문학을 하는가
최윤    ㅣ 숨쉬기와 중독
최인석 ㅣ 수상쩍은 짓
최인호 ㅣ 문학은 세상의 고통에 감응하는 하소연의 눈물
최하림 ㅣ 두 강이 만나는 마을에서
하성란 ㅣ 시선에 대하여
한수산 ㅣ 문학,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유일한 의례
한승원 ㅣ 살아 있는 한 쓸 것이고, 쓰는 한 살아 있을 것이다
허만하 ㅣ 끝없는 시의 길 위에서
허수경 ㅣ 살기, 기억하기, 쓰기
현기영 ㅣ 변신의 즐거움
황동규 ㅣ 최대 노력으로 최소 만족, 그 바보스런 매력
황석영 ㅣ 말라 버려선 안 될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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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총 4장으로 나뉜 작품.

처음엔 오,,뭔가 나오겠는데 싶어서 빠져들고 관심과 호기심 그 외 것들로 열심히 읽다가 두터운 요 책을 다 읽고 나니, 머리에 든 그 많은 것들을 기준 없이 마구 쏟아 놓은 것밖에 되지
않는 뭐 그런 똥 싸다 뒤를 덜 닦아서 구린 그런 느낌.

쓰기 방식이 특이하고 새롭고 어쩌고 하지만, 이미 많은 작가들이 시도한 것인데 단지 그는 미스터리 전용 작가인 듯 보인다는 것 때문에 뭐라 더 쓴 소리는 말아야지.

거울에 대한 복선도 너무 쉬워 미리 맞혀버려 찝찝했고, 초반에만 신나게 사람을 흥분하게 해서 뭔가 속은 느낌에 또 억울하기도 하고, 뭐 그렇다고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다시 한번 얄밉게 빠져 나오는 말을 한 뒤 난 쏙 빠짐.

스토리 공장에서 같은 느낌이지만 다른 모양의 물건을 열심히 찍어내는 듯한 일본 작가들의 책을 읽지 말아야지 해놓고, 약간의 활자 중독이 있는 나는 그새 읽을 거리가 없다고 언니네 책장에서 빨간 표지가 맘에 들어 고른 작품,
온다 리쿠를 처음 봤고 어떤 작가인지 맛을 봤으니 이것으로도 난 고맙고 기쁘고 그렇다.
하지만 미스테리랑 나랑은 좀 안 맞는 것은 진실.  

그것은 이미 영화나 다큐에서 너무 많이 다뤄서 그것만 열심히
챙겨 봐도 미스터리적 부족함을 메우기엔 충분하다고. 

다음은 오탈자.

152쪽 10줄과 264쪽 12줄 : 검정색 -> 검정 또는 검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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