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온 지 제법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여전히 날 불편하게 한다.
그들은 함께 모여 있을 땐 내 등 뒤에서 수다를 떨면서 혼자서 있을 때면 나와 마주치는 것조차 거북스러워하는 것 같다.

 

예숙이를 만나러 룸살롱으로 향했다. 여전히 먹다 남은 안주와 맥주 몇 병을 그녀가 허용한다면 돈은 걱정 없었다.

들어갔더니 양복 입은 두 사람이 홀에서 듣는 이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날 발견하고는 내 앞에 앉았다. 
 

“아저씨는 일은 안 하세요?”

만나자마자 날아온 갑작스런 질문에 상당히 당황했다.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비명횡사한 것을 알면서도 룸살롱에서 맥주를 먹다니!’

난 “불법 낙태시술에 대해 조사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뭐 때문에?”

그녀에게 아내의 일까지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일이니까. 그 일이 끝나면 경찰동료에게 일거리를 소개 받거나 류씨 아저씨한테 일자리를 부탁해보려고 해.”

“그 아저씨한텐 기대하지 마세요.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인데.”

그녀가 생각에 잠기는 듯싶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아저씨 얘기를 들으니까 생각이 난 건데...... 여기 오는 단골손님들 중에 의사분이 있거든요. 그 분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임신한 지 13주 된 여자가 불법낙태시술을 받은 후에 한 시간도 안 되어 구급차에 실려 왔더래요. 심한 복통에 구토증상과 함께.  

그런데 자궁의 크기로 봐선 임신 18주는 될 정도더라는 거예요. 알아듣겠어요? 임신 13주에 불법 낙태시술을 받고 실려 왔는데 자궁 크기가 오히려 임신 18주는 된 거야.

초음파인지 뭔지 여러 가지 진단을 해보니 자궁 안에 무엇인가 꽉 차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알겠어요? 창자였어요. 불법낙태업자가 낙태시술 중에 자궁에 구멍을 뚫어 버렸고 그 구멍으로 내장이 자궁 안까지 흘러내려온 상황이었다는 거죠. “

갑자기 구토가 날 것 같았다. 기분이 언짢아졌다.

양복 입은 두 사람은 이제 홀에서 쓰러질 듯 춤을 추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불법시술업자의 소재나 연락처를 파악하기 위해 희미한 단서라도 찾을 기대감으로 다방에 갔다. 그러나 제발 아내가 남긴 물건 속에 수첩이 들어 있기를 바랐던 내 마음과는 달리, 얻은 건 달랑 통장 하나뿐이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되게 중요한 물건 같애서...”

실망감을 비추지 않으려고 내가 화제를 돌렸다.

“전에 있던 이모는 그만두었나요?”

“몸이 아파서 그만뒀어.”

“예전에 오시던 철물점 사장님하고 친구 분들은 지금도 오시나요?”

“이제 못 와. 사장님 돌아가셨어. 벌써 2년 됐어.”

약간 놀랐다. 예전에 내가 알던 그 다방은 이제 없어졌다. 할아버지들이 사온 생닭으로 닭백숙을 끓여 먹던 그 다방은 더 이상 없다. 할머니는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지금은 다른 공간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다방엔 낯선 노인들 대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가끔가다 나직이 말하며 웃어댔지만 웃음 섞인 대화들은, 나 자신에게서 스멀스멀 나오는 암울한 분위기에 눌려 곧 모호해지고 지리멸렬해져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느 하나 완전히 끝이 나는 말이 없었고 대화들은 도중에 공기 중으로 날아가기 일쑤였다.

 

내가 기대하던 수첩이 없었기에 실망했다. 

 ‘내가 무슨 수로 시술업자의 행방을 알 수 있겠는가? 역시 재수사를 통해 경찰이 나서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을 설득할 과거의 사례들이 없다.’

암울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직 오전이었다.

옆방에서 흐느끼는 소리와 토하는 소리가 섞여 났다. 문 밖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난 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구토물을 다 토하고 마지막 헛구역질을 할 때처럼 그런 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선 흐느낌은 멈출 듯 멈출 듯 힘없이 계속되었다.
방문 너머로 예숙이를 불렀다. 울음소리가 잠시 작아졌고, 그녀가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흐느낌이 뒤섞여 알아듣기도 힘든 목소리로, 그녀의 오빠가 집에 와서는 돈을 몽땅 들고 사라졌다고 했다.

“얼마나? 액수가 많은가?”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얼마 안 돼?”

이번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다시 모으면 되지 않겠나? 금세 다시 모아질 돈이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울 이유가 없어지지?”

그녀가 아니란다.

“왜? 혈육에 대한 원망 때문에?”

그녀가 역시 아니란다.

“그럼 왜 우니?”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돈은 생활비란 말예요. 오늘부터 당장 어떻게 먹고 살아요?”

난 할 말이 없었다. 난 그 돈이 그녀가 말했던, 악세사리 점을 차리기 위해 따로 저축해놓은 돈인 줄 알았다. 근데 그녀는 이제까지 희망을 위해서 저축해놓은 돈은 없다고 한다.

“울지 마라. 울면 머리만 아프다. 밥 굶지 말고. 저녁때 출근도 해야 되잖아?”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는 그것밖에 없었다.

“사는 게 힘들지? 맘대로 살아지는 게 아니란다. 그래도 노루를 보렴. 노루도 씩씩하게 살고 있잖아?”

그녀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흐느끼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죽은 아내가 떠올랐다. 아내는 결코 운 적이 없었지만 -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와 함께 뮤지컬을 봤을 때를 제외하곤 - 아내에게서 자주 느꼈던 감정을 지금 그녀에게서 똑같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아내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감정은 바로 ‘연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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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배경은 근미래입니다. 

이전에도 흡입 낙태시 공기색전증으로 인한 사망사례가 얼마나 있었는가 알아보기 위해서 또다시 경찰서를 찾아갔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후배에게 더 이상 묻는 것은 실례였다. 하지만 그 이외의 다른 동료에게 물어 봤다가 그 사실이 그에게 들어가는 것은 더 실례였다. 그냥 담당형사였던 그에게 물었다.

“논리가 뜀박질을 한 게로군요.” 
 

그러면서 그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읊조렸다.

“살인사건이 일어나도 수사할 경험 있는 인력이 부족한 판에 자살케이스를 가지고 매달릴 수 있겠습니까? 길거리에 변사체가 누워 있어도 시신 수습하기 바쁜 것이 현실입니다. “

전화 벨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가 대화를 잠시 중단하고 전화를 받았다.
“응, 바쁘다. 이따가 전화해. 경찰부 장관님께 보고중이야, 끊어.” 전화를 끊고 그는 잠시 숨을 내쉬었다.

 

“근데 하시는 일은 있는 겁니까? 밥벌이 말이에요.”

“없다.”

그는 낙태 얘기를 하려면 2층으로 올라가서 맨 오른쪽 사무실의 넙치를 찾으라고 알려 줬다. 계단을 올라가 사무실 문을 열고 넙치를 찾는데 한 사람이 이쪽을 쳐다보며 수화기에다 말을 했다. 

  

“그래, 지금 왔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는 자기가 넙치라고 했다.
난 과거의 사건들 중에서 흡입낙태의 경우 공기색전증으로 사망한 사례가 있었는지 알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그가 말했다.

“흡입낙태시라기보다 사인이 공기색전증인 경우 자체가 드뭅니다. 아니, 들어 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지금 병원에서 공기색전증으로 인한 사망의 경우 신고가 들어온 것은 없습니다. 경찰이 자체적으로 파악한 건수는 한 건 있는데, 자전거포를 운영하는 남편이 아내에게 자전거 타이어용 펌프로 낙태를 시도하다 아내는 즉사, 남편은 아내가 죽은 직후 목을 매고 자살한 경우죠. 불법시술업자가 개입한 것은 아니었고. 물론 이것이 전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대부분의 불법낙태는 드러나는 일이 드물거든요. 불법낙태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더라도 병원에 가질 않습니다. 낙태 받은 자들도 처벌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실태를 파악하기란 힘듭니다. 어느 정도 수치가 있어야 데이터가 만들어지는데 역시 힘듭니다. 관내도 파악이 안 되는데 도시 전역은 파악이 불가능하죠. “

 

그에게서 들은 전형적인 불법 낙태시술의 모습이란 이런 것이었다. 낙태 시술 후 비위생적인 도구나 자궁에 부주의로 아직 남아 있는 태아의 일부나 임신산물로 인해 감염이 일어난다.  

그 다음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남에 따라 병세는 악화되어, 결국 환자 본인이 자기가 죽을 것을 느끼게 되거나 뭔가 일이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다.  

죽기 전에 여인은 불법 시술을 받는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후회스런 한탄을 하거나, 자기는 아무래도 죽을 것 같으니 남아 있는 아이들을 잘 키워 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한다.

 

남편은 불법 낙태에 대한 신고 때문에 병원에 데려갈 수 없어서 민간요법 등에 의지한다. 낙태업자에게선 치료의 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 아내가 죽은 후 낙태업자를 찾아간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내의 죽음에 대한 보상비를 받고 입을 닫는 것이다.  

경찰에겐 낙태 계획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면 ‘외견상’ 아내 혼자 저지른 일이 된다.

 

그가 덧붙였다.

“과망간산칼륨 같은 근거 없는 헛소문에 의지하는 낙태법은 더 비참하죠.
여자들이 과망간산칼륨을 그곳에 집어넣고 사고가 터져도 병원에 갈 생각을 쉽게 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잡혀 갈까 봐.  

현명한 여자들은 병원에 찾아오기도 하지만. 몇 번 봤는데 몸이 고통 때문에 거의 반으로 접히더군요. 과망간산칼륨은 궤양과 출혈을 일으키지 낙태를 일으키진 않거든요.  

이런 상황들은 무언가 정책에 문제가 있으니까 나타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생각에 과망간산칼륨이나 총알낙태같이 말도 안 되는 소문에 의지하는 것은 그들이 무식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바로 그들이 처한 현실이 그만큼 절망적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잠시 있다가 그가 다시 한 마디 했다.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피임기구를 다시 생산하던가......”

내 입장은...생각해본 적이 없다.  

“휴우, 난 정치적인 것들은 잘 모른다.”

 

그가 자료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10년 전에 한 건 있네요. 담당형사는 이름이 돼지님과 같은데 동일인물인지 모르겠네요. 부검기록은 없고, 사인은 공기색전이지만 어떤 낙태수단이었는지는 모르겠네요.”

진공청소기와 비슷한 소음에 대해 그에게 물었다. 그가 말했다.
“그런 소음이 들렸다면 수동식 주사기가 아닌 전기식 펌프를 사용한 것일 테죠. 수동식은 소음이 없습니다.”

 

그가 덧붙였다.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유일합니다. 만약 희생자가 시술업자에게 찾아가서 공기색전증으로 사망했다면, 그의 위치를 대충 가늠하기란 쉽습니다.  

공기색전증이라면 희생자는 몇 발자국 걷질 못하고 죽게 됩니다. 죽음이 설사 지연되더라도 희생자는 대부분의 운동능력을 상실한 상태일 것이며 역시 몇 발자국 걷지 못할 것입니다.  

낙태업자에게는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되는 것이죠. 희생자가 계속 발생하다 보면, 다른 말로 계속 시체를 유기하다 보면, 시체가 발견되는 장소들은 결국 그가 사는 곳을 중심으로 좁은 원을 그려나가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영원히 발견되지 않거나.

하지만 시술업자가 자동차에 기구를 싣고 다니면서 기동력을 발휘한다면 장소를 짐작하기란 불가능해지죠. 지역구분이 필요 없어지기 때문이니까요. 같은 경기북도나 경기남도, 충청권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시술을 할 테니까. “  

한숨이 나왔다.
‘맞다. 그 놈은 자동차에 기구를 싣고 다닌다. 그러니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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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배경은 근미래입니다.

돼지에게 부검기록을 본 사실과 전직 군의관의 의견을 들려주었다. 사후 재분포 현상 때문에 시신의 심장에서 채취한 혈액 샘플의 약물농도는 별 의미가 없으며, 사인은 불법 낙태로 인한 공기색전증의 가능성이 강하게 의심된다고. 하지만 그는 대체적으로 시큰둥했다.

“나는 당신이 이제까지 이렇게 뭔가에 집착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당신은 말도 안 되는 일에 매달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제발 무슨 일이든 일을 해서 먹고 살 궁리를 하게나.”

그는 박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나는 담당검시관을 만나 봐야겠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몇 번의 고성이 서로 오간 후에 둘 다 잠잠해졌다.

돼지는 담당 검시관과의 면담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만약 만나고 나서도 부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두 번 다시 이 사건에 대해 말을 꺼내지 말라는 단서를 붙였다.

“동기들이 준 돈도 이제 다 떨어질 때가 되었을 텐데 생계활동은 안 할 작정인가?”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일했던 다방에 들렀다. 경찰서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 다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부분이 노인들이었지만 분위기는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병원 입원실의 분위기 같았다.  

조용조용 일상생활이나 지인들에 대한 안부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야기가 잠시 멈추게 되면 낮게 흘러나오는 한숨들... 그 숨 막힐 것 같은 분위기... 아는 얼굴이 없었다. 나와 아내를 축복해주던 노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새 고인이 되었을까?

 

다방에서 나와 100미터 쯤 걸어갔을 때 누군가 아는 척을 한다. 웬 할머니인가 하고 보았더니 다방 사장이었다.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한참을 쓰다듬었다.

“나왔네.”

“네, 나왔습니다.”

할머니가 나보고 아내의 물건을 보관하고 있으니 가져가란다.
난 나중에 다시 와서 가져가겠다고 말하고 그냥 왔다. 
 

검시관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날, 나는 질문항목을 미리 작성하였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수십 번을 되풀이하여 질문하는 장면을 상상하였으며, 내 질문에 대한 검시관의 대답에 맞받아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나중엔 질문항목을 작성한 메모가 필요 없게 되었다.

검시관과의 만남은 매우 혼잡한 환경에서 이뤄졌으며 지극히 사무적인 대화들이 오고갔다. 질문과 답변 모두 빠르게 이루어졌으며 그는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답변을 하기 일쑤였고, 나는 종종 말의 끝맺음을 생략했다.

우리는 복도에서 만나 커피자판기 앞에서 잠시, 그리고 새똥으로 얼룩진 벤치에서 잠시 이야기를 했다. 

 

먼저 불법 낙태로 인한 후유증이 아내의 사인이었을 가능성에 대한 내 물음에 그가 답했다.        

“자궁과 자궁 표면의 상태를 살펴보았지만 감염의 흔적도, 고름도 없었다. 만약 감염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기록에 나와 있는 것처럼 자궁 표면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상태를 기대할 순 없다.  

불법 낙태에 뒤따르는 감염으로 인한 죽음에 보통 흔히 수반되는 복막염의 흔적도 없었다. 만약 심각한 감염이 일어났다면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다. 비위생적인 불법 낙태나 자궁의 상처 따위로 감염이 일어난 흔적은 전혀 없었다.”

 

내가 물었다.  

“감염 이외의 다른 사인의 가능성은?”

 

“우리나라에서 불법 낙태로 죽어가는 여성 대부분의 사인은 패혈증이나 패혈성 쇼크로 인한 것이다. 그 밖에도 DIC(Diseminated intravascular coagulopathy, 파종성 혈관내 응고장애), 과다 출혈 등 모두 죽은 후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들이다. 자궁 안에 태아나 태반의 일부가 남아서 감염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강력한 화학 물질의 흔적도 없었다. 즉, 불법 낙태시술은 사인과 무관하다.”

“공기색전의 가능성은?”

“거의 100여 년 전에 서구에서 히긴슨식 주사기라는 것이 사용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고무펌프로 관장을 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물건이다.  

그것으로 자궁 안에 비눗물이나 강력한 소독약을 불어넣곤 했다. 물론 낙태의 목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행위이다. 많은 여성들이 공기색전과 비누 중독 따위로 죽어갔다. 지금은 그런 것을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 아주 옛날이야기이다.

지금 불법 낙태로 공기색전증이 발생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나는 보지 못했다.

자궁 내에서 발견된 튜브의 조각으로 볼 때 흡입 낙태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 그 용도로 쓰이는 튜브이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다른 낙태기법도 함께 쓰였을 수도 있다.  

만약에 히긴슨식 주사기나 다른 수단으로 공기가 섞인 액체를 불어넣었고 그 결과 공기색전증으로 사망했다면 자궁 안이 깨끗이 비워질 수는 없다. 이런 위험한 방식들은 자궁 안의 내용물을 흡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에 자궁으로부터 태아를 비롯한 내용물이 배출되기까지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공기색전증이 일어나는 경우 죽음은 급격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공기가 정맥으로 들어가서 사망하기까지 길게 잡아도 10분 이상은 안 걸린다.“ 

 

“전혀 공기색전증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인가?”

“지금 불법낙태를 하는 자들은 아마 히긴슨식 주사기라는 말도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당신 아내의 경우처럼 대다수의 임신 초기의 불법 낙태는 흡입 낙태 방식이다.  

주사기로 수동식으로 하던지 기계로 전기식으로 하던지 간에 이것은 자궁의 내용물을 흡인하는 기계이지 자궁 안으로 공기를 불어넣는 기계가 아니다. 따라서 공기색전증은 일어나기 힘들다.

과정을 간단히 말하자면, 가느다란 튜브를 자궁 경부를 통해 자궁 안에 집어넣고 진공 상태를 만들어 자궁 안의 내용물을 흡입하는 것이다. 의료지식이 전혀 없는 불법 낙태업자들이 이 방법으로 하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합병증은 자궁에 상처를 낸다든가 자궁 안의 내용물을 완전히 비우지 않아서 감염과 출혈을 일으키거나, 또는 자궁에 구멍을 내는 등의 결과로 일어나는 합병증들이다.“

 

“그래도 심장 안의 거품에 대해서 검사를 해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 의견은 이미 부검기록에 다 쓰여 있다. 난 당신에게 이미 굉장한 특혜를 주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바빠서 일일이 설명하긴 힘들다.”

 

“자궁에 상처는 없었는가?”

“세세하게 어떻게 다 기억할 수 있나? 부검기록에 어떻게 나와 있는가? 부검기록에 그런 언급이 없다면 상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망 이틀 전의 낙태로 인한 죄책감이 우울증을 악화시켜 자살했다는 근거는?”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부검기록에도 그런 말은 없을 것이다. 단지 ‘매우 최근에 받은 낙태의 흔적‘이라고 표현했을 뿐 ’이틀‘이라는 구체적인 기간을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죄책감이나 우울증 같은 것들은 알다시피 내 분야가 아니다. 내게서 나온 말들이 아니다.“

 

‘매우 최근’에 낙태를 받았다는 근거는?”

“자궁의 크기가 아직 임신 이전의 크기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고, 자궁경부도 아직 만년필 굵기 정도로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을 했다.
어떻게 ‘이틀 전’이라고 구체적으로 시점을 알아 낼 수 있겠는가? 그건 내가 추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수사과정에서 알아 낸 것 아닐까? “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정확한 낙태시점은?”

“사망시간으로부터 일주일 이내일 것이다.”

 

“자궁과 자궁경부의 상태를 봐서 그렇다는 이야기인가?”

“자궁경부의 상태를 봐서...... 맞다.”

 

“일주일 이내의 어느 시점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맞다.”

 

“그렇다면 사망 직전에 시술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부검결과만으로는 사망 직전에 낙태 시술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하진 못한다.”

 

“더 확실히 할 순 없는가?”

“그럴 수 없다. 어차피 사인이 낙태의 합병증이 아니기 때문에 불법낙태의 시점은 중요하지 않다.”

 

“불법낙태를 받았다고 어떻게 장담하는가? 합법적인 낙태였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대로 임신이 진행되면 산모의 사망을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질환의 흔적이 부검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에 사망 전 두 달 간의 낙태 허가 신청서 명단에서 사망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 사후 재분포 현상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검시관은 다시 한 번 물었다. 내가 다시 말하자 그가 대답했다.

“알고는 있다.”

“그러면서 혈액 샘플을 심장에서 채취하였나?”

“사후 재분포가 이 건에서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재의 검시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 정황상 자살했을 가능성이 큰 경우엔 부검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진짜 치밀한 부검이 필요한 대형 사건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수 없게 되고 만다.  

할 일은 산더미인데 당신은 내 시간을 많이 빼앗았고 내게 미안해해야 한다.

몸에서 담배냄새가 많이 나는데 담배는 끊는 것이 좋다. “

 

담배는 끊는 것이 좋다는 그의 말은 생각해볼수록 날 화나게 만들었다. 그 말 한 마디로 지금까지의 대화는 의사와 환자 간의 만남 같은 것으로 성격이 변질되는 것 같았다.

부검의와 이야기해본 결과, 역시 사망하기 이틀 전에 불법 낙태시술을 받았다고 판단할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난 사망시간과 매우 근접한 시간에 낙태 시술이 있었다고 판단할 만한 증언을 확보해두고 있다.

 

돼지에게 전화를 걸어 검시관과의 대화가 내 입장을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건이 재수사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계획을 말했다. 
 

돼지가 짖었다.  

“부검의의 말은 전혀 다르던데. 의혹이 해소된 것이 아니었나? 이렇게 집요한 이유가 뭐지?  

당신 와이프가 죽기 전에 보험이라도 들어 놓았나? 근데 보험사에서 자살이라 보험금을 안 준다고 했나? 그런 일이 아니라면 이럴 이유가 없다. 재수사란 게 당신이 애써서 되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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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배경은 근미래입니다.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 그녀는 업소에도 나가지 않고 앓아누웠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다.

걱정되어서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간 내 앞에 그녀가 누워 있었다.
내게는 ‘고인에 대해 욕되게 해서 미안하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몸조리나 잘 하라고 말했다.  

 

같은 구조인데도 그녀의 방은 내 방보다 더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보였다. 그리고 내 방에는 없는 거울이 부엌에 걸려 있었다. 출소 후 처음으로 거울을 봤다. 낯선 이가 거울 속에 있었다.

 

속옷을 이틀에 한 번씩은 갈아입을 작정으로 길거리에서 속옷을 몇 벌 샀다.
벌써 길거리에서는 빨간 홍옥을 팔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부엌에서 목욕을 하고 싶어졌다. 팬티와 러닝셔츠는 땀에 흠뻑 젖고 다시 마르고 하는 과정을 수십 차례 반복한 끝에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런 팬티와 러닝셔츠를 몸에서 떼어내고 오랜만에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몸에 조금씩 부었다.
몸에 붙어 있던 속옷의 섬유질들이 때를 미는 대로 국수 가락처럼 말려 떨어져 나가자 기분이 좋아졌다. 샤워를 마친 후 새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감옥에서 나와서 오히려 살이 많이 빠져서 배변 주머니가 인공항문에 잘 맞지 않아 다시 조절을 해야 했다.

물 담은 세숫대야를 수십 번 들었더니 허기가 져서 쓰러질 것 같았다. 목욕을 마치고 사탕을 몇 개 더 뜯어 먹었다.
최대한 배변 주머니를 아끼기 위해서 하루 한 끼만 먹기를 계속했더니,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는지 이제 가을철인데도 방 안에 있으면 겨울의 추위가 느껴졌다.

 

오후가 되어 다시 예숙이의 방에 들어가서 보았더니, 그녀의 사색이 되었던 낯빛에 약간 생명의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술을 무척 많이 마셨나 봐. 적당히 하지.”

“진상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줘서......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 그렇지.”

나의 충고는 바보스러웠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이건 그냥 물어보는 건데 내 눈치 보지 말고 대답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아내가 남자와 함께 집에 온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얼굴은 못 봤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단다.

“왜냐하면 무전기 같은 것에서 쉴 새 없이 소리가 흘러나왔고, 가끔은 무전기에 대고 소리를 질러댔으니까.”   

 

 

이번엔 그녀가 내게 물었다.

“인공항문 때문에 많이 우울한가요?”

다소 복잡한 질문이었다.

“처음에는 지옥에서 살아나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이 오래가진 않았다.  

그 다음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망이 절실했지만 지금은 또 생각이 다르다.  

앞으로 배설하든지 뒤로 배설하든지 본질은 변하지 않아. 단지 위치만 바뀔 뿐이지.  

만약 이전 상태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 인생에서 달라지는 것이 몇 가지나 있을까? 좀 더 편해지겠지만 의외로 달라지는 것이 많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원래 세상이 띄고 있는 회색빛 색조를 제대로 감상하게 되는 것이지. 결국 더 우울해지고 말겠지.”  

“아저씨가 감옥에 갈 만한 짓을 했다고는 상상이 안 되는데......”

“성기능을 회복시켜 주겠다며 사기 치던 놈을 바보같이 믿다가 전기구이가 될 뻔했지. 그것도 세 차례에 걸쳐. 나중에 원리를 알고 보니 전기 충격기를 개조한 것이었어.
병원에 물어보니 ‘전기 자극을 어디다 준다는 말인가? 신경이고 전립샘이고 다 없어져서 그런 방법은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었고.
없는 신경에 어떻게 자극을 주느냐는 것이지.
그래서 권총을 들고 가서 위협사격을 한 뒤, 죽지 않을 만큼 그 사기꾼을 패줬지. 문제는 그 ‘죽지 않을 만큼’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주관적인 것이어서......“

그녀의 질문이 끝없이 이어질 듯했다.

“그럼 성욕을 느끼지 못해서 우울한가요?”

“모르겠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성욕을 느끼는 것과 못 느끼는 것이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우울하다. 그것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지. 내가 다시 성욕을 느낀다고 해도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이진 않을 듯하구나.”

“그럼 왜 돌팔이를 찾아갔었어요?”

“내가 돌팔이를 찾아갔던 것은 아내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어서였어. 나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  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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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고통스러웠을까요?”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낙태 후에, 또는 낙태 중에 죽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순식간에 죽었다면, 그래서 이미 죽은 후에 흡입시술이 이루어졌다면 고통은 없었을 테지.”

“만약 낙태 후에 죽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박사가 날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원래 흡입 낙태는 전신마취는 안 하고 자궁 경부 주변에 차단마취(paracervical block)를 하지만 불법일 경우는 아예 마취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그럴 경우 진통제 정도로 끝나고 말지.  

고통의 정도는 유감이지만 뼈가 부러지는 정도의 통증과 비슷할 걸세.”

“마취 없이 시술을 한다는 게 가능합니까?”

“옛날 아프리카 국가들이나 동남아에서는 흔하게 행해지던 일이네.”

방귀소리와 함께 배변주머니가 약간 부풀어 올랐다. 군의관에게 인공항문 이야기를 하고 양해를 구했다.

“마취를 하고 수술했을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없네. 왜냐하면 병원이 아니면 국소마취제를 구할 수도 없고 음성적으로라도 국소마취제를 구했다손 치더라도 자궁 경부 주변 차단마취를 시술하다 잘못해서 혈관이라도 찌르면,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른 채 주사하여 국소마취제가 혈관을 타고 들어가면 큰일이 나지.  

차단마취를 시술하기 위해선 주사바늘이 들어가는 깊이도 일정하게 정해져 있고 위치도 정해져 있지. 마취제가 있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 거야.  

불법 시술업자들은 임산부가 국소마취제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거나 독성증상이 나타나도 어떻게 손을 쓸 시설도 못 갖추고 있을 걸세. 그렇다고 불법 낙태업자들이 구급차를 부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

 

비통한 기분이 되었다.  

 

박사가 간 후 홀로 남아서 맥주를 몇 병 더 마셨다. 혼자 마신 맥주들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맥주에 취했다. 맥줏집을 나와 계단을 걸어 내려오자마자 어지러워졌다.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웠고 머리도 아팠다. 구토가 나오려 했다. 점점 눈앞이 희미해졌다.  

나는 천천히 주저앉아 그대로 땅바닥에 누워 버렸다. 내가 누워 있다는 것 외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고 시간이 얼마나 흘러가는지 느낌도 없었다.
잠시 후 다시 정신을 차렸지만 곧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며 지나갔다. 식은땀으로 번들거리는 배변주머니가 한쪽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서서히 일어서서 걸었다. 처음엔 비틀거렸으나 한 모퉁이를 돌자 정상적인 표정으로 걸을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집에 들렀다가 다시 영업을 재개했다는, 예숙이가 일하는 룸살롱에 갔다. 양주는 사양하고 병맥주 몇 병을 시켰다. 안주는 역시 손님들이 먹다 남긴 마른안주 부스러기였다.

그녀가 말했다.  

“처음엔 젠틀해서 좋아했는데 이젠 아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 같다.”  

이른 시간부터 취기가 느껴지는 말투였고, 태도가 다소 공격적이었다.  

그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나를 교과서 취급하고 있었다.

그녀가 덧붙였다. 자기는 이제까지 나한테 대단한 특혜를 주고 있으며, 그걸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영문을 몰라 하자 그녀는 여기 오는 모든 손님들은 양주를 마셔야 한다고 말했다. 맥주는 양주의 안주로 쓰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여길 올 때마다 달랑 병맥주 5병씩만 시켰기 때문에, 또 자기가 그것을 허용해주었기 때문에 자기 입장도 무척 난처하다고 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오늘은 돈이 없어서 안 되지만 다음부터는 올 때 양주를 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중요한 건 양주가 아니라 내가 베풀어준 호의란 말이에요. 사람이 호의를 베풀 땐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무슨 말인지 술에 취한 내 머리로는 파악이 되질 않았다. 단지 아내가 죽을 때 겪었을지도 모르는 ‘뼈가 부러지는 고통’ 만이 생각났다. 나는 예숙이의 눈치를 보다가 계산을 하고 적당히 빠져나왔다.

그날 밤새 방귀가 나왔다. 자주 배변주머니에서 가스를 빼내려고 일어나야만 했다. 가스가 아니더라도 복잡한 기분 때문에 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공기색전이라... 공기와는 상관없지만 색전(embolism)이라는 말을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전장에 있을 때가 떠올랐다. 야전병원에서였다. 내가 수술을 마치고 정신이 들었을 때 내 옆엔 두 다리가 부러진 병사가 누워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말했다.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괜찮아요?”

그는 장갑차 위에 타고 있었다고 했다. 달리던 장갑차가 지뢰를 밟는 바람에 양쪽 허벅지가 부러졌다고 했다. 부러진 두 다리에 피가 쏠릴 때면 참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고도 했다.  

멀쩡하던 그가 다음날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고 하더니 중환자실로 실려 갔다.  

그날 저녁때 군의관이 오더니 그가 지방색전(fat embolism syndrom)으로 죽었다고 했다. 양 허벅지 뼈가 부러지면서 뼛속의 골수성분이나 지방성분이 흘러나와 정맥을 타고 폐로 들어가서, 아주 드문 일이지만 폐를 통과한 다음, 동맥으로 흘러들어가 중요한 혈관들을 막았다고 했다. 허벅지 뼈가 부러지는 것만으로도 운이 없으면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빗소리와 함께 서서히 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이나 지났을까?
웬 여자가 술에 취해 내 방문을 두들겼다.

“그 여자도 할 짓 다 하던 걸요!”라고 밖에서 고함을 지르고 나를 비난했다. 예숙이였다. 그 여자란 내 아내를 말하는 것이리라.

왜 자기를 소 닭 보듯 하냐고도 했다.

그녀가 계속 떠들어댔기 때문에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비에 흠뻑 젖은 그녀가 거기 있었다. 그녀는 이제 조용히, 그냥 서 있었다.  

 

나는 내가 왜 냉담할 수밖에 없는지 이유를 알려주면 조용히 하겠느냐고 이야기하고 셔츠를 들어 올려 가스가 약간 찬 배변 주머니를 공개했다.

“2028년 겨울, 평양시가전에서 얻은 부상이다. 내가 널 소 닭 보듯 하는 이유는 널 여자로 보지 않아서도 아니고 죽은 아내에 대해 죄 짓는 것 같아서도 아니다.  

전에 훈장을 탄 이야기를 했었지? 이건 훈장의 대가다. 항문은 막혀 있고 항상 이 주머니를 차고 있어야 하지. 게다가 난 성욕을 느끼지도 못하고 남성로서의 기능도 잃었어. 왜냐하면 총알이 아랫배로 들어가서 궁둥이로 나왔기 때문이지.
나보고 점잖은 손님이라고 말했었지? 그래서 내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을 테고. 나의 점잖음은 내 부상의 후유증에서 나오는 것이야. 그러니 진짜로 점잖은 것은 아니지.”

 

류씨네 방의 문이 열렸다가 조용히 닫혔다.
갑자기 내 모습이, 그리고 그녀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만두자. 이게 다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녀가 갑자기 화장실로 뛰어갔다.

밤새 그녀가 토하는 소리가 내 방까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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