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온 지 제법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여전히 날 불편하게 한다.
그들은 함께 모여 있을 땐 내 등 뒤에서 수다를 떨면서 혼자서 있을 때면 나와 마주치는 것조차 거북스러워하는 것 같다.

 

예숙이를 만나러 룸살롱으로 향했다. 여전히 먹다 남은 안주와 맥주 몇 병을 그녀가 허용한다면 돈은 걱정 없었다.

들어갔더니 양복 입은 두 사람이 홀에서 듣는 이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날 발견하고는 내 앞에 앉았다. 
 

“아저씨는 일은 안 하세요?”

만나자마자 날아온 갑작스런 질문에 상당히 당황했다.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비명횡사한 것을 알면서도 룸살롱에서 맥주를 먹다니!’

난 “불법 낙태시술에 대해 조사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뭐 때문에?”

그녀에게 아내의 일까지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일이니까. 그 일이 끝나면 경찰동료에게 일거리를 소개 받거나 류씨 아저씨한테 일자리를 부탁해보려고 해.”

“그 아저씨한텐 기대하지 마세요.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인데.”

그녀가 생각에 잠기는 듯싶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아저씨 얘기를 들으니까 생각이 난 건데...... 여기 오는 단골손님들 중에 의사분이 있거든요. 그 분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임신한 지 13주 된 여자가 불법낙태시술을 받은 후에 한 시간도 안 되어 구급차에 실려 왔더래요. 심한 복통에 구토증상과 함께.  

그런데 자궁의 크기로 봐선 임신 18주는 될 정도더라는 거예요. 알아듣겠어요? 임신 13주에 불법 낙태시술을 받고 실려 왔는데 자궁 크기가 오히려 임신 18주는 된 거야.

초음파인지 뭔지 여러 가지 진단을 해보니 자궁 안에 무엇인가 꽉 차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알겠어요? 창자였어요. 불법낙태업자가 낙태시술 중에 자궁에 구멍을 뚫어 버렸고 그 구멍으로 내장이 자궁 안까지 흘러내려온 상황이었다는 거죠. “

갑자기 구토가 날 것 같았다. 기분이 언짢아졌다.

양복 입은 두 사람은 이제 홀에서 쓰러질 듯 춤을 추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불법시술업자의 소재나 연락처를 파악하기 위해 희미한 단서라도 찾을 기대감으로 다방에 갔다. 그러나 제발 아내가 남긴 물건 속에 수첩이 들어 있기를 바랐던 내 마음과는 달리, 얻은 건 달랑 통장 하나뿐이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되게 중요한 물건 같애서...”

실망감을 비추지 않으려고 내가 화제를 돌렸다.

“전에 있던 이모는 그만두었나요?”

“몸이 아파서 그만뒀어.”

“예전에 오시던 철물점 사장님하고 친구 분들은 지금도 오시나요?”

“이제 못 와. 사장님 돌아가셨어. 벌써 2년 됐어.”

약간 놀랐다. 예전에 내가 알던 그 다방은 이제 없어졌다. 할아버지들이 사온 생닭으로 닭백숙을 끓여 먹던 그 다방은 더 이상 없다. 할머니는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지금은 다른 공간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다방엔 낯선 노인들 대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가끔가다 나직이 말하며 웃어댔지만 웃음 섞인 대화들은, 나 자신에게서 스멀스멀 나오는 암울한 분위기에 눌려 곧 모호해지고 지리멸렬해져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느 하나 완전히 끝이 나는 말이 없었고 대화들은 도중에 공기 중으로 날아가기 일쑤였다.

 

내가 기대하던 수첩이 없었기에 실망했다. 

 ‘내가 무슨 수로 시술업자의 행방을 알 수 있겠는가? 역시 재수사를 통해 경찰이 나서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을 설득할 과거의 사례들이 없다.’

암울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직 오전이었다.

옆방에서 흐느끼는 소리와 토하는 소리가 섞여 났다. 문 밖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난 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구토물을 다 토하고 마지막 헛구역질을 할 때처럼 그런 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선 흐느낌은 멈출 듯 멈출 듯 힘없이 계속되었다.
방문 너머로 예숙이를 불렀다. 울음소리가 잠시 작아졌고, 그녀가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흐느낌이 뒤섞여 알아듣기도 힘든 목소리로, 그녀의 오빠가 집에 와서는 돈을 몽땅 들고 사라졌다고 했다.

“얼마나? 액수가 많은가?”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얼마 안 돼?”

이번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다시 모으면 되지 않겠나? 금세 다시 모아질 돈이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울 이유가 없어지지?”

그녀가 아니란다.

“왜? 혈육에 대한 원망 때문에?”

그녀가 역시 아니란다.

“그럼 왜 우니?”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돈은 생활비란 말예요. 오늘부터 당장 어떻게 먹고 살아요?”

난 할 말이 없었다. 난 그 돈이 그녀가 말했던, 악세사리 점을 차리기 위해 따로 저축해놓은 돈인 줄 알았다. 근데 그녀는 이제까지 희망을 위해서 저축해놓은 돈은 없다고 한다.

“울지 마라. 울면 머리만 아프다. 밥 굶지 말고. 저녁때 출근도 해야 되잖아?”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는 그것밖에 없었다.

“사는 게 힘들지? 맘대로 살아지는 게 아니란다. 그래도 노루를 보렴. 노루도 씩씩하게 살고 있잖아?”

그녀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흐느끼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죽은 아내가 떠올랐다. 아내는 결코 운 적이 없었지만 -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와 함께 뮤지컬을 봤을 때를 제외하곤 - 아내에게서 자주 느꼈던 감정을 지금 그녀에게서 똑같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아내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감정은 바로 ‘연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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