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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의 왼쪽 다리에 총을 쐈고 그는 주저앉아 두 손으로 다리를 움켜잡았다.  

“이런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이보단 더 고통스러웠을까?”

그리고 움켜쥔 그 두 손에 망치질을 하듯 한 발씩 침착하게 쐈다. 

“의학에 조예가 깊은 것 같은데 지혈을 잘 하라구, 황 회장. 다리는 모르겠지만 양 손은 앞으로 평생 쓰기가 불편할 것이니 미래에 대한 계획도 미리 생각해보고.”

사무실 책상과 바의 카운터, 그들의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 봐도 달랑 161억 원밖에 없었다.

사무실 책상 위 벽에 물오리와 연꽃이 새겨진 쌍발 엽총이 한 자루 걸려 있었다. 탄환이 두 발밖에 남지 않은 권총을 복대 안에 집어넣고, 그 엽총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엔 161억이 든 비닐백을 들었다. 복대 안의 권총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엽총 탄환은 어디 있나, 황 회장?”
그에게 물었다. 그가 악에 바친 소리로 내뱉었다.
“없어, 이 새끼야!”

“1층 열쇠는?”

그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권총을 다시 꺼내어 그에게 겨누었다.

“아직 총알 있다. 1충 열쇠는 어디 있나?”
그가 울부짖었다.
“서랍 안에 다 있잖아, 이 새끼야!”

나는 서랍을 뒤져 엽총 탄환 네 발과 1층 열쇠를 찾아 가지고 나왔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오니 길거리의 행인 몇 명이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권총과 비닐 백을 차 안에 던져 넣고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1층 셔터 문으로 갔는데 허리를 굽힐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돌아와 그녀에게 열쇠를 주고는 셔터 문을 열어 달라고 말했다.

그녀가 셔터 문을 연 후 엽총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승합차 한 대와 외제차가 있었는데 승합차의 뒷문을 엽총으로 부순 후에 안을 들여다봤더니 금속상자 같은 모양의 물건이 있었다. 한 발을 그 물건에다 대고 쐈다. 다시 두 발을 재장전하여 승합차 본네트에 대고 두 발을 연달아 쐈다.

“이제 가자.”
내가 운전대를 잡으려 했으나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숨조차 쉬기 힘든 상황이어서 그녀에게 운전대를 맡겼다.

시내 외곽을 지나 중심가로 오자 난 그녀에게 차를 세우고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올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조수석에서 약국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누군가가 걸어왔다. 얼굴에선 광채가 나고 금방 잡지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의 아가씨가 한편으로 근심에 찬 표정으로, 다른 한편으론 조심스런 기대감을 드러내는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눈이 부셨다. 피노키오가 인간이 된 후에 저런 표정으로 길거리를 걸었을까?

이제 그녀는 약간은 안심하는 눈으로 옆좌석에서 날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이제 집으로 가는 거죠?”

“물론이지.”

차를 타고 도시를 빠져나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달리던 중이었다.

사찰 앞에서 한 무리의 둔전병(屯田兵)들에게 와이셔츠 차림의 남자가 얻어맞고 있었다. 와이셔츠는 피범벅이 되었고 곧 맞아 죽을 것만 같았다. 

 

서서히 지나쳐 가다가 조금 시간이 지난 뒤 말했다.
“다시 차를 돌려라.”

그녀가 얼어붙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우리가 지나친다면 그 사람이 맞아 죽을 거야. 어서 차를 돌려.”

그녀는 사색이 되었다.

 

차에서 내려 내가 외쳤다.
“당신들이 무슨 권한으로 저 자를 폭행하는가?”

한 무리의 둔전병들이 퍼질러 앉아 있었다. 그 옆엔 피범벅이 된 자가 , 묶여 있지도 않은데 도망갈 생각도 못 하고 주저앉아 있었다.

“이 자는 도둑이다.”
그 중의 한 명이 말했다.

 

“도둑이라도 절차가 있다.”

“이 지역은 경찰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우리가 경찰을 대신하는 상황도 있는 법이다.”

내가 따지고 들었다.
“경찰력이 미치지 않는 문제라면 헌병대가 해결할 문제이지 왜 당신들이 신경을 쓰는가?”

 

무리들이 살벌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당신은 누구인가?”

“나는 경찰이다. 이 자를 내가 데려가야겠다.” 그리고선 마카로프 권총을 꺼내어 겨눴다.

“당신이 경찰 맞나? 언제부터 경찰차가 이런 호화로운 차로 바뀌었나?  우리 병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여기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 년놈들은 100미터도 가기 전에 벌집이 되고 만다.”

결국 최후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자의 몸값을 줄 테니 이 자를 내게 넘겨라.”

그러자 그의 표정이 약간은 누그러졌다.

결국 그들에게 100억을 지불하고 도둑을 내 차에 태울 수 있었다. 

진통제를 먹었지만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심해졌다. 숨을 쉴 때마다 왼쪽 옆구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도둑이 거의 힘없는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40대 후반에서 50대로 보이는 그는 전쟁 전에 학교 선생님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틀을 굶었다고도 했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고, 어지럽고 구토가 나려 한다고 괴로워했다. 그는 앞머리가 많이 벗겨져서 머리의 상처가 그대로 드러났고 상처로부터의 출혈도 더 심해 보였다.

 

소변이 마려웠다.

“어디 쉬었다 갈 만한 곳이 있으면 쉬었다 가자.”
그녀에게 말했다.

 

도둑이 뭐라고 말했다. 몇 번을 되풀이해서 들어 보니 쉬지 말고 그냥 가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쫓아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이미 몸값을 지불했으니 그들이 따라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지만 그는 막무가내였고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의 바짓가랑이가 서서히 젖어 들어갔다. 할 수 없이 쉬지 않고 그냥 가기로 했다.

“이제 안심이 되었소?”
그에게 말했고 그는 더 이상 떨지 않았다.

길가를 걷는 아주머니들이 눈에 띄었다. 차를 세우고 근처에 병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가 떠나온 도시를 제외하면 이 근처엔 병원이 없고 30분쯤 가면 다른 도시가 나온다고 말했다.

나는 복대를 벗고 다시 정상적인 배변주머니로 갈아 끼웠다.

이때서야 든 생각이지만 만약에 그 둔전병들이 우리를 공범으로 몰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직 도시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자 그가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죽어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이미 폭력 전과가 있다.’
잠시 생각했다.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도둑이 죽어 버렸으니 중간에 내려놓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냥 병원으로 가자고 말했지만 난 모든 죄를 몽땅 뒤집어 쓸 수도 있으니 안 된다고 했다.
우리는 결국 한적한 곳에 도둑의 시신을 내려놓고 담배를 한 대 입에 물려 주었다.
“미안하네. 부디 평화로운 곳으로 가게나.” 
 

그리고 다시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에게 61억 밖에 없다고 말을 하면 뭐라고 그럴까?

예숙이는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죽은 도둑에게서 묻었을까? 양 손바닥엔 온통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손부터 씻고 나서 돼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네 얘기하고 상당히 틀리더군. 맞아 죽을 뻔했다.”

돼지가 말했다. “그 놈이 그렇게 대하던가?”

“그렇다네.”

“돈은 받았는가?”

“쥐꼬리만큼.”

내 대답을 들은 다음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고 그렇게 돼지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저녁 때 류씨가 귀가하자 나는 인사를 했다.
“단풍구경 잘 하고 왔습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아직은 이를 줄 알았는데. 근데 몹시 피곤해 보이네요.”

“피곤하네요. 너무 피곤해서 지금 자면 내일 저녁때나 일어날 것 같아요.”

 

모든 게 다 귀찮았다. 배변주머니를 갈아 끼우는 것도 진저리가 났다. 배변주머니를 떼어내고 방 한가운데 잠시 누워 있었다. 인공항문 주변의 피부가 비로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다시 일어나 사탕부케에서 얼마 남지 않은 사탕을 뽑아 입 안에 넣었다.

돼지가 아내에게 곰인형과 사탕 부케를 선물하는 장면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그 나이에 곰인형과 사탕이라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진통제 두 알을 먹고 다시 이불을 쓰고 누웠다. 리튬냄새가 부엌 수챗구멍에서 방으로 몰려들었다. 죽은 아내가 옆에 누워 있었다.

“여보, 오늘은 참 힘든 하루였소.”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아직 저녁인데도 잠을 청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하지, 여보?”

이미 꿈나라로 떠난 아내는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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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작은 2층 건물이었다.

내가 만든 특수한 배변 주머니를 찬 다음, 예숙이보고 한 구획 떨어진 곳에서 차에 타고 기다리라고 했다. 두 명이 밖에 나와 있었다. 1층은 자동차 정비소였는데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그 옆에 작은 입구가 있었다.   

그들과 함께 그 입구에 연결된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2층에 아주 작은 바가 있었다. 여기서 그들이 먼저 몸수색을 했다. 내 튀어나온 배의 이유를 보여 주기 위해 와이셔츠 단추들을 풀자 그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난 이런 거 처음 본다.” 그들이 복대를 젖혀 보라고 했다.

 

‘만지지만 말아라. 제발.’

그 안의 찰흙이 이미 굳어 버려서 만지면 탄로가 날 것만 같았다. 다행히 그들은 배변 주머니를 손으로 쥐어짜거나 만져 보진 않았다. 바의 또 다른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그 곳은 작은 사무실이었다. 의자에 그 놈이 보였다. 그가 나를 보고 짧게 뭐라고 말했는데 전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순간 뭔가 뒤통수를 쳤다. 깨어났을 땐 양손이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옆구리를 야구방망이로 찍혔다. 옆구리에 통증이 밀려오면서 호흡이 곤란해졌다. 양 팔과 손에 계속되는 구타로 호흡은 더 곤란해졌다. 금세 팔과 옆구리가 부어올랐다. 그나마 복부를 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두 팔이 묶여 있으니 배변주머니 안의 물건이 별 소용이 없었다. 소금쟁이 말고도 3명이 더 있었다.

소금쟁이가 자기 부하들에게 말했다.

“전에 감옥에 간 남편을 놔두고 바람을 피우다 죽은 년이 있었지. 자, 이제 그 년 남편이 아내의 죽음을 눈감아 주겠다며 몸값을 받으러 왔네 그려.”

 

“내 동료가 뒤를 많이 봐 주었지 않나?” 나는 고통으로 숨이 차 헐떡거리며 말했다.

“공생관계였지 일방적으로 뒤를 봐 주는 관계가 아니었다. 내 덕분에 많은 불법시술업자를 잡아 실적을 올릴 수 있었지. 이젠 더 이상 누가 누구아래 있다거나 하는 관계가 아니다.”

“내게 보상비를 주기로 되어 있지 않는가?”

“나 같은 사람한테 왔을 때는 그만한 위험은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의사라도 되나? 너 같은 놈들을 보면 짜증부터 난다.”

내가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아내가 바람을 피운 것은 아니다. 정작 나 자신과는 한 번도 부부생활을 한 적이 없으니, 다른 남자와 관계를 했다고 해서 그걸 ‘바람’이라고 표현해도 될까? 너 같은 놈이 모욕할 만한 여자가 아니다, 개새끼야.

“아, 그런가? 이런, 성불구인 줄은 또 몰랐네.”

무엇인가에 맞았는데 어디를 맞는지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예숙이가 옆에서 손수건으로 눈가에 맺힌 피를 닦아 주고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온통 쓰레기더미였다. 쓰레기 매립지로 날 태우고 가는 차를 몰래 뒤따라왔다고 했다.

배변 주머니가 제대로인지 확인했다. 다행히 묵직한 쇳덩이의 느낌은 그대로였다.

“여기까지 온 길 기억하지? 다시 데려다 줘. 아까처럼 한 구획 앞에서 내려 주고 기다려.”

그녀는 펄쩍 뛰었다.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 “이번에 가면 아마 죽을 거예요.”

“돈을 가지고 와야 한다. 그 자가 내게 빚을 졌기 때문이다. 이건 남편의 몫이다. 그리고 그런 놈을 그냥 둘 수는 없다. 그냥 가면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여자들이 비참하게 죽어갈 것이다. 자, 봐라. 권총이지? 이건 내 아내의 몫이다.”

그녀에게 배변 주머니를 보여 주며 말했다.
옆구리가 아파왔다.

 

한 구획 앞에서 차에서 내린 뒤, 천천히 다시 그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천리 길 같았다. 나는 복대 밖으로 배변 주머니를 꺼내어 주머니 아래쪽을 열었다. 말라붙은 찰흙덩어리가 권총에 엉겨 붙어 있어서 계단 손잡이에 배변 주머니를 대고 몇 번 내리쳤다. 권총을 쥔 손이 크게 떨려서 두 손으로 쥐어야 했다.

바에 들어가니 두 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를 보기도 전에 한 명의 다리를 향해 한 발을 발사했다. 나머지 한 명도 다리에 총을 맞고 이내 고꾸라졌다.  

좁은 곳에서 권총을 쏜 까닭에 귀에서는 귀뚜라미 소리가 났다.

안으로 들어가자 소금쟁이가 책상 서랍을 필사적으로 뒤지고 있었다.

내가 권총을 겨눈 채 물었다.
아내가 어떻게 죽었는가? 흡입시술을 했잖은가?”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공기색전증이 발생했는가?”

“그걸 공기색전증이라고 하나? 튜브를 잘못 꽂았어. 원래는 그런 실수를 안 하는데, 그 날은 일진이 안 좋았나봐. 그러니까...흡기구와 배기구가 있는데 흡기구에 튜브를 꽂을 걸 배기구에 꽂았지 뭐야. 다시 바로잡긴 했는데......”

“언제 그녀가 죽었는가? 시술 전인가? 아니면 시술 중이었나?”

“튜브를 다시 꽂고, 시술을 마쳤는데... 그때 죽은 줄 알았다. 언제 죽었는지는 모른다.”

“잘 생각해봐라. 나나 내 아내에게 몹시 중요한 문제다. 뼈가 부러지는 고통의 문제이다.”

“정말 모르겠어. 사실은 그날 좀 취했었는데, 이보게, 잠깐만 여유를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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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변 주머니에 약간의 개조를 했다. 일단 반투명한 주머니 안의 내용물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안쪽을 변 색깔과 유사한 찰흙으로 얇게 발랐다. 그 안에 마카로프 권총을 넣자 느낌이 묵직했다. 너무 묵직해서 배변 주머니의 접착판이 인공항문에서 떨어지려 했기 때문에, 복대를 구해서 배변 주머니를 지지하는 역할로 배에 차야만 했다.

이것을 차면 배변 주머니로서의 역할을 기대해선 안 된다. 막상 시술업자를 만날 때만 이것을 찰 생각이다.

류 씨에게 예숙이와 둘이 며칠 단풍구경을 하고 올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류 씨가 미소를 띤 채 ‘날씨가 참 좋지요? 나도 따라가고 싶네.’라고 했다.

 

마지막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서 렌트카를 한 대 마련했다. 그리 고급스럽진 않았지만 경찰차에 비하면 호화로운 편이었다.

몇 달치의 배변주머니를 살 돈마저 남김없이 가지고 가기로 했다. 얼마 되지도 않지만.

비록 류 씨에겐 단풍구경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예숙이에게 말했듯이, 목적지인 도시의 외곽에 있는, 놀이기구들과 동물원이 있는 유원지를 구경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떠났다. 막상 그 유원지에 도착해보니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분위기는 유원지라기보다 절간 같았다.

 

동물원에 먼저 갔는데 노루 두 마리가 맨 처음 우리를 맞이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이 우리를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군데군데 털이 빠지고 눈곱이 낀 눈에는 졸음이 가득한, 그런 모습으로 길게 누운 채 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동물원에서 한 10년은 묵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외에는 처음 보는 동물들이 태반이었는데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오직 퀴퀴한 냄새만이 인상적이어서 놀이기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우리는 잠시 벤치에 앉아 어느 놀이기구가 가장 비명소리가 많이 나는지, 그리고 어느 놀이기구가 타기에 적당한지 바라보고 있었다.

돼지는 호칭에 주의를 줬었다. 

 ‘그 자는 소금쟁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지만 자네는 소금쟁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네. 황 사장이라고 불러야지. 이것도 거래인데 피차 예의는 차려야 되지 않겠나?’

 

“별명이 소금쟁이라는군. 특이한 별명이지.” 나는 예숙이에게 말했다.

옆 벤치에 앉아 있던 자가 노골적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신경이 쓰였지만 그 자의 시선을 무시해버렸다. 그 자는 한참동안이나 날 쳐다본 다음 예숙이를 훑어보고 길게 한숨을 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가 버렸다.

그 자가 가버린 후 예숙이나 나나 서로 말이 없었다.  

 

돈이 빠듯했다. 일단 예숙이에게 곰인형을 하나 사주었고, 사진사를 불러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숙박비와 기름값을 제외하고 우리가 가진 모든 돈을 써야 했다.

예숙이가 물었다.
“배변주머니 살 돈은 남겨 놨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진 돈을 몽땅 쓸 작정이에요?”

“돈을 받으면 되는데 뭐가 걱정이야?”

“돈을 못 받으면 어쩌게? 요강 단지를 안고 다니게요?”

“돈을 못 받으면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고? 글쎄,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마음속으론 이렇게 외쳤다.
‘어차피 돈을 못 받는 상황이라면 배변주머니가 문제가 아닐 정도의 상태가 될 것이다.’

 

저녁때가 되어서 우리는 하얀 벽을 가진 모텔로 들어갔다. 모텔의 이름은 특이하게도 ‘실락원’이었다.

화장실이 너무 좋아서 샤워가 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샤워는 됐다며 그냥 침대에 누워 버렸다. 그리고 누운 채 재잘거렸다.
“근데 그 시술업자 말이에요.”  

예숙이가 불만에 찬 듯 말했다. 

 “자기가 돈을 들고 오든지 통장으로 돈을 송금하든지 할 일이지 왜 아저씨더러 돈을 받으러 오래요?”

욕실에서 옷을 벗으며 나는 말했다. 
 “아마 아쉬운 놈이 오라는 거겠지.”

“사장이라는 것을 보니 끄나풀 정도가 아닌 모양이네요.”

“그런 부류들을 많이 봐서 잘 알고 있다. 처음엔 살벌한 세상으로 보이지만 곧 힘을 기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가소롭게 보이지. 그 불법낙태업자도 그런 부류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샤워기를 틀었다.

 

다음날 10시가 되어서야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 그녀를 깨운 후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약속장소를 찾아 나섰다.

 

돼지가 가르쳐 준 번호는 그 자의 전화번호가 아니라 이를테면 대표전화번호인 듯했다.

“황 사장님?”

“황 회장님을 찾는 거예요?”

순간 멈칫했다가 곧 대답을 했다.

“아, 예. 황 회장님을 만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오.”

“서울에서 왔어요?”

“예, 재래시장까지 왔소만, 아파트도 보이네요.”

그가 길안내를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 번 미로에 빠졌고 그 때마다 다시 전화로 물어 봤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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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자리에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다음번에 현장을 덮친다는 말은 믿을 만한 이야기가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돼지는 그가 잡히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돈을 받으면 그걸로 더 이상 사건의 해결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없게 된다. 돼지는 일단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깡통 더미에 둘러싸인 상관이 생각났다. 남은 인생을 그렇게 살 텐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산 사람은 살아야 하나?  

내가 재수사 대신복수를 원한다고 돼지한테 말하면 그가 시술업자가 누구였는지 가르쳐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복수를 하고 나면? 복수를 하고 나서도 삶은 계속되지 않는가?

 

며칠의 시간 동안 한 가지 생각만 가득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다.  

돼지와 아내와의 일은 잊기로 했다. 그리고 돼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재수사를 하든 복수를 하든 그 이후에도 삶은 계속 되기 때문이다. 계속 이대로 생활할 수는 없단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아내의 ‘고상한 우울함보다 비천한 생동감이 좋다.’ 라는 말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간신히 기력을 회복하여 일상생활로 돌아온 예숙이에게 불을 지펴 놓았다.
“나한테 계획이 있는데 잘만 되면 악세사리 가게가 문제가 아니다. 실은 내 아내는 불법낙태를 받다가 죽었어. 내 아내의 죽음에 대해 보상비를 받아 줄, 힘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도와주겠다고 하거든, 지금.”

 

그리고 그녀에게 이렇게 고백을 했다.

 

하나 털어놓을 게 있는데, 이전에 성욕이 다시 회복되어도 달라지는 점이 없을 거라는 이야기는 틀린 얘기다. 사실은 많은 것이 달라진다고 본다. 맞다. 이런 생활과 정상적인 생활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차이가 크다. 꿈속에서는 정상적인 성욕을 느낀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기가 싫다. 이러다 미쳐 버릴 것 같다. 내 아내가 살았던 방식으로 나도 꿈을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삼으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으려면, 궁극적으로 난 수술을 해야 한다.

전에는 내가 얘기했듯이, 내가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내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단 한번 만이라도 남편 구실을 해보고 싶어서 돌팔이를 찾아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기가 다르다.

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얻고 싶다. 먹고 배설하는 일 이외에서. 다시 정상적인 성생활도 하고 싶다. 그것이 말 그대로 ‘비천한 생동감’일지라도 좋다. 이대로 늙기는 싫다.  

 

대충 이런 얘기였다.

 

나는 전쟁 전 여성지에 실렸던 병원 광고를 보여주며 또 말했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마련해 이 광고처럼 인공 보형물 삽입시술을 받고 싶다. 일단 돈이 생기면 악세사리 점을 열려무나. 장사가 잘 되어 내가 준 돈을 갚으면 나는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생필품을 팔고 싶다. 돈을 더 모아야지.  

아니면 우리가 함께 운영하는 가게를 열  수도 있겠지. 그리고 내 계획대로만 되면 너는 네 소망을, 나는 내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거야. 그러니 내 계획이 어떠냐?”

 

“언제요?” 그녀가 물었다.

 

“곧. 내 친구와 오늘이나 내일 이야기를 해보고 나서야 언제가 될지 알 수 있지. 일단 근처의 유원지가 있으니 함께 가서 동물원이랑 놀이기구도 타고 그 다음엔 돈을 받는 것이 순서이니 그 도시로 같이 가서 돈만 받아오면 그걸로 끝이고 즐거운 여행이 되는 것이지.” 
 

아내와 결혼하던 날 갔던 단골 맥줏집에 다시 가서 앉았다. 몇 년 만인가. 몇 년 안 되었지만 마치 십수 년이 흐른 것 같았다. 살아서 아마 마지막이리라. 이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50대 후반이 되었을 주인아저씨가 날 알아보고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동안 잘 지냈나? 아이는 낳았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예, 둘 있습니다.”

“사내? 여자아이?”

“사내 한 명하고 여자아이 한 명......”

“왜 부인이랑 같이 안 오고?”

“그 사람이 일이 있어서 혼자 왔어요. 다음에는 둘이 같이 올게요.”

여전히 벽엔 독일의 잔치 풍경이 붙어 있었다. 이젠 빛이 바랜 그 풍경을 예전에 그러했듯이 바라봤다. 아주 멀리 있는 어느 나라의  풍경처럼 느껴졌고, 그런 느낌은 당연한 것이었다. 

 

마을 언덕에 한 밤중에 삽을 들고 가서 땅을 팠다. 0.5미터쯤 나무 아래를 파내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직후에 감추어 뒀던, 비닐 안에 들어 있는 자그마한 중국제 마카로프 권총과 탄환 13발을 꺼냈다. 권총의 원래 주인은 내가 설치한 부비트랩에 걸려 벌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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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배경은 근미래입니다.  

 

막상 아내의 통장을 열어보니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그리 흔하지 않은 돼지의 이름이 통장에 가득했다. 통장의 내용으로 보아하니,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생활비 정도의 돈을 아내에게 송금해오고 있었으며 총 일 년 반 동안이나 송금은 계속되었다.  

최근 석 달 전까지 송금은 계속되었고, 한 동안 중단되었다가 아내가 죽기 2주일 전에 한꺼번에 매달치의 여섯 배의 돈이 들어왔다. 그 돈은 아내가 죽기 하루 전인 30일에 인출이 되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입이 달려 일제히 ‘바보’라고 내게 외치는 듯했다. 
 

돼지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퇴근 후에 만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무엇 때문이냐고 물었다. 난 돈 문제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오늘은 안 되고 내일 예전에 자주 들렀던 그 다방에서 보자고 했다. 

돼지가 다방에 들어서자마자 할머니에게 내가 물었던 것과 비슷한 질문을 했다.  

“이모는 그만두었나요?”

곧이어 맨 구석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와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앉자마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곧 가봐야 한다고 말했다.
난 그에게 통장을 보여 주고는 내 아내의 통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통장에서 확인했으니 이제 내 말을 들어 보라고 했다.

“설마 자네와 아무 상관도 없는 태아를 지우기 위해 거액을 송금해준 건 아니겠지?”

돼지는 묵묵부답이었다.

마침 커피가 나오자 우린 약속이나 한 것처럼, 기계적으로 커피에 설탕을 탔고 크림을 넣어 휘저었다.

난 다시 물었다. “내 아내와는 언제부터 사귀었나?”

그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얼마 되지 않는다. 2년 정도? 어느 날 전화를 하더군. 나한테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데 이 다방에 다시 나온다고 하더라.  

난 계획적이지 않았다. 형편 되는대로 그때마다 그냥 도와줬지. 근데 어느 날은 고맙다고 선물을 사들고 오더라.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녀가 그러더군.  

처음엔 당신이 자기가 생각하던 천국과 같은 천국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더라. 근데 살아 보니 자기가 생각하던 천국이 당신이 이야기하던 천국과 다르더라고 하더군.”        

 

난 31일 밤에 낙태 시술이 이루어졌다는 증언을 확보해두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통장에 아내가 사망하기 약 2주 전에 입금된 불법 낙태 비용은 30일에 빠져나갔다는 것을 확인시켜 줬다.  

과연 시술업자가 29일에 시술을 하고 그 다음날 돈을 받았을지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그러니 시술을 31일 밤에 받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네 생각엔 31일 밤에 낙태 시술을 받은 지 몇 시간 안에 자살했다는 것이 논리적인가 아니면 그 날 밤 낙태 시술 중에 즉사했다는 것이 논리적인가?”

 

“당신 말을 들으니 자살이 아닌 것 같군.”

“처음부터 자살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나?”

“맹세코 몰랐네. 지금까지 그 놈이 29일에 온 줄 알았다. 29일에 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날이 맞는다면 시술에서 사망까지 이틀간의 시차가 나기 때문에 공기색전증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놈이라니, 낙태업자를 알고 있나?”

그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네가 알선을 한 게로구나.”

“예전에 내 정보 제공원이었네.”

“네가 알고 있는 날짜보다 이틀 뒤에서야 낙태가 이루어졌다. 31일 밤에 그 놈이 와서 낙태 시술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화연락은 없었는가?”

“없었네. 그녀의 전화번호를 직접 알려 줬다. 그녀에게도 그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네 의견대로 그녀가 자살했다 하더라도 죄책감은 느꼈을 것 아닌가?”

“그녀는 우울증 환자였지 않은가? 불륜에 대한 죄책감은 물론 가지고 있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충격도 물론 받았고.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이미 몇 달 전에 끝나 있었어.”

잠시 그는 관계가 끝난 것은 그녀가 죽기 벌써 몇 달 전이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낙태를 원한 건 너였나? 아내였나?”

“맹세코 그녀였다. 알지 않는가? 그녀는 자기 자신의 신체에 대해, 그리고 주변 환경에 대해 항상 완전히 통제를 할 수 있기를 바랐지, 그치? 난 승진도 앞두고 있네. 이 일이 아니면 승진이 예상된다네.
동기 중에선 최초로 그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 자리에 오르면 정책을 세울 수도 있네. 강력한 치안정책으로 불법낙태시술업자들을 깡그리 잡아들일 수도 있지. 이 일이 나와 연관되는 것은 나로선 감당하기 힘들다네.”

 

내가 물었다.
“연관되는 정도가 아니라 명백한 불법낙태의 알선인데 단지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가?”

“그래, 그 말이 옳겠지.”

그가 당황스런 미소를 지었다.

“난 그 놈을 잡아들이길 원한다. 그러려면 재수사가 전제되어야 한다.”  

재수사를 하지 않으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불륜과 낙태시술을 알선한 사실을 공개할 것이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당신 친구인 나까지 잡혀가길 원하는가?”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와 내가.” 내가 반문했다.

“내게 계획이 있다.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일단 들어 봐라.”

그는 이번 사건은 자살로 그냥 덮어두고, 그 대신 낙태 비용의 몇 배에 달하는 금액을 보상으로 받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비교적 가까운, 다른 도시에 있는 시술업자는 자기와 연락이 되고 예전에 자기의 끄나풀이었기 때문에 뒤를 많이 봐 주었다고 이야기했다.  

“이거 봐, 친구. 내가 지불한 금액이 거마비에다 위험수당까지 포함해서 굉장히 많다. 통장을 보면 알겠지만.  

지불한 금액의 몇 배를 위약금으로 주도록 내가 이야기를 해서 서로 정리를 하게 해줄 테니 그 돈으로 뭘 하나 차리던가 하면 어떨까?  

그리고서 그 자가 다음에 불법낙태를 저지를 때 현장을 덮치면 어떻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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