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배경은 근미래입니다.

돼지에게 부검기록을 본 사실과 전직 군의관의 의견을 들려주었다. 사후 재분포 현상 때문에 시신의 심장에서 채취한 혈액 샘플의 약물농도는 별 의미가 없으며, 사인은 불법 낙태로 인한 공기색전증의 가능성이 강하게 의심된다고. 하지만 그는 대체적으로 시큰둥했다.

“나는 당신이 이제까지 이렇게 뭔가에 집착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당신은 말도 안 되는 일에 매달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제발 무슨 일이든 일을 해서 먹고 살 궁리를 하게나.”

그는 박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나는 담당검시관을 만나 봐야겠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몇 번의 고성이 서로 오간 후에 둘 다 잠잠해졌다.

돼지는 담당 검시관과의 면담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만약 만나고 나서도 부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두 번 다시 이 사건에 대해 말을 꺼내지 말라는 단서를 붙였다.

“동기들이 준 돈도 이제 다 떨어질 때가 되었을 텐데 생계활동은 안 할 작정인가?”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일했던 다방에 들렀다. 경찰서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 다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부분이 노인들이었지만 분위기는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병원 입원실의 분위기 같았다.  

조용조용 일상생활이나 지인들에 대한 안부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야기가 잠시 멈추게 되면 낮게 흘러나오는 한숨들... 그 숨 막힐 것 같은 분위기... 아는 얼굴이 없었다. 나와 아내를 축복해주던 노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새 고인이 되었을까?

 

다방에서 나와 100미터 쯤 걸어갔을 때 누군가 아는 척을 한다. 웬 할머니인가 하고 보았더니 다방 사장이었다.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한참을 쓰다듬었다.

“나왔네.”

“네, 나왔습니다.”

할머니가 나보고 아내의 물건을 보관하고 있으니 가져가란다.
난 나중에 다시 와서 가져가겠다고 말하고 그냥 왔다. 
 

검시관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날, 나는 질문항목을 미리 작성하였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수십 번을 되풀이하여 질문하는 장면을 상상하였으며, 내 질문에 대한 검시관의 대답에 맞받아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나중엔 질문항목을 작성한 메모가 필요 없게 되었다.

검시관과의 만남은 매우 혼잡한 환경에서 이뤄졌으며 지극히 사무적인 대화들이 오고갔다. 질문과 답변 모두 빠르게 이루어졌으며 그는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답변을 하기 일쑤였고, 나는 종종 말의 끝맺음을 생략했다.

우리는 복도에서 만나 커피자판기 앞에서 잠시, 그리고 새똥으로 얼룩진 벤치에서 잠시 이야기를 했다. 

 

먼저 불법 낙태로 인한 후유증이 아내의 사인이었을 가능성에 대한 내 물음에 그가 답했다.        

“자궁과 자궁 표면의 상태를 살펴보았지만 감염의 흔적도, 고름도 없었다. 만약 감염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기록에 나와 있는 것처럼 자궁 표면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상태를 기대할 순 없다.  

불법 낙태에 뒤따르는 감염으로 인한 죽음에 보통 흔히 수반되는 복막염의 흔적도 없었다. 만약 심각한 감염이 일어났다면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다. 비위생적인 불법 낙태나 자궁의 상처 따위로 감염이 일어난 흔적은 전혀 없었다.”

 

내가 물었다.  

“감염 이외의 다른 사인의 가능성은?”

 

“우리나라에서 불법 낙태로 죽어가는 여성 대부분의 사인은 패혈증이나 패혈성 쇼크로 인한 것이다. 그 밖에도 DIC(Diseminated intravascular coagulopathy, 파종성 혈관내 응고장애), 과다 출혈 등 모두 죽은 후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들이다. 자궁 안에 태아나 태반의 일부가 남아서 감염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강력한 화학 물질의 흔적도 없었다. 즉, 불법 낙태시술은 사인과 무관하다.”

“공기색전의 가능성은?”

“거의 100여 년 전에 서구에서 히긴슨식 주사기라는 것이 사용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고무펌프로 관장을 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물건이다.  

그것으로 자궁 안에 비눗물이나 강력한 소독약을 불어넣곤 했다. 물론 낙태의 목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행위이다. 많은 여성들이 공기색전과 비누 중독 따위로 죽어갔다. 지금은 그런 것을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 아주 옛날이야기이다.

지금 불법 낙태로 공기색전증이 발생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나는 보지 못했다.

자궁 내에서 발견된 튜브의 조각으로 볼 때 흡입 낙태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 그 용도로 쓰이는 튜브이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다른 낙태기법도 함께 쓰였을 수도 있다.  

만약에 히긴슨식 주사기나 다른 수단으로 공기가 섞인 액체를 불어넣었고 그 결과 공기색전증으로 사망했다면 자궁 안이 깨끗이 비워질 수는 없다. 이런 위험한 방식들은 자궁 안의 내용물을 흡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에 자궁으로부터 태아를 비롯한 내용물이 배출되기까지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공기색전증이 일어나는 경우 죽음은 급격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공기가 정맥으로 들어가서 사망하기까지 길게 잡아도 10분 이상은 안 걸린다.“ 

 

“전혀 공기색전증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인가?”

“지금 불법낙태를 하는 자들은 아마 히긴슨식 주사기라는 말도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당신 아내의 경우처럼 대다수의 임신 초기의 불법 낙태는 흡입 낙태 방식이다.  

주사기로 수동식으로 하던지 기계로 전기식으로 하던지 간에 이것은 자궁의 내용물을 흡인하는 기계이지 자궁 안으로 공기를 불어넣는 기계가 아니다. 따라서 공기색전증은 일어나기 힘들다.

과정을 간단히 말하자면, 가느다란 튜브를 자궁 경부를 통해 자궁 안에 집어넣고 진공 상태를 만들어 자궁 안의 내용물을 흡입하는 것이다. 의료지식이 전혀 없는 불법 낙태업자들이 이 방법으로 하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합병증은 자궁에 상처를 낸다든가 자궁 안의 내용물을 완전히 비우지 않아서 감염과 출혈을 일으키거나, 또는 자궁에 구멍을 내는 등의 결과로 일어나는 합병증들이다.“

 

“그래도 심장 안의 거품에 대해서 검사를 해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 의견은 이미 부검기록에 다 쓰여 있다. 난 당신에게 이미 굉장한 특혜를 주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바빠서 일일이 설명하긴 힘들다.”

 

“자궁에 상처는 없었는가?”

“세세하게 어떻게 다 기억할 수 있나? 부검기록에 어떻게 나와 있는가? 부검기록에 그런 언급이 없다면 상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망 이틀 전의 낙태로 인한 죄책감이 우울증을 악화시켜 자살했다는 근거는?”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부검기록에도 그런 말은 없을 것이다. 단지 ‘매우 최근에 받은 낙태의 흔적‘이라고 표현했을 뿐 ’이틀‘이라는 구체적인 기간을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죄책감이나 우울증 같은 것들은 알다시피 내 분야가 아니다. 내게서 나온 말들이 아니다.“

 

‘매우 최근’에 낙태를 받았다는 근거는?”

“자궁의 크기가 아직 임신 이전의 크기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고, 자궁경부도 아직 만년필 굵기 정도로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을 했다.
어떻게 ‘이틀 전’이라고 구체적으로 시점을 알아 낼 수 있겠는가? 그건 내가 추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수사과정에서 알아 낸 것 아닐까? “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정확한 낙태시점은?”

“사망시간으로부터 일주일 이내일 것이다.”

 

“자궁과 자궁경부의 상태를 봐서 그렇다는 이야기인가?”

“자궁경부의 상태를 봐서...... 맞다.”

 

“일주일 이내의 어느 시점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맞다.”

 

“그렇다면 사망 직전에 시술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부검결과만으로는 사망 직전에 낙태 시술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하진 못한다.”

 

“더 확실히 할 순 없는가?”

“그럴 수 없다. 어차피 사인이 낙태의 합병증이 아니기 때문에 불법낙태의 시점은 중요하지 않다.”

 

“불법낙태를 받았다고 어떻게 장담하는가? 합법적인 낙태였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대로 임신이 진행되면 산모의 사망을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질환의 흔적이 부검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에 사망 전 두 달 간의 낙태 허가 신청서 명단에서 사망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 사후 재분포 현상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검시관은 다시 한 번 물었다. 내가 다시 말하자 그가 대답했다.

“알고는 있다.”

“그러면서 혈액 샘플을 심장에서 채취하였나?”

“사후 재분포가 이 건에서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재의 검시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 정황상 자살했을 가능성이 큰 경우엔 부검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진짜 치밀한 부검이 필요한 대형 사건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수 없게 되고 만다.  

할 일은 산더미인데 당신은 내 시간을 많이 빼앗았고 내게 미안해해야 한다.

몸에서 담배냄새가 많이 나는데 담배는 끊는 것이 좋다. “

 

담배는 끊는 것이 좋다는 그의 말은 생각해볼수록 날 화나게 만들었다. 그 말 한 마디로 지금까지의 대화는 의사와 환자 간의 만남 같은 것으로 성격이 변질되는 것 같았다.

부검의와 이야기해본 결과, 역시 사망하기 이틀 전에 불법 낙태시술을 받았다고 판단할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난 사망시간과 매우 근접한 시간에 낙태 시술이 있었다고 판단할 만한 증언을 확보해두고 있다.

 

돼지에게 전화를 걸어 검시관과의 대화가 내 입장을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건이 재수사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계획을 말했다. 
 

돼지가 짖었다.  

“부검의의 말은 전혀 다르던데. 의혹이 해소된 것이 아니었나? 이렇게 집요한 이유가 뭐지?  

당신 와이프가 죽기 전에 보험이라도 들어 놓았나? 근데 보험사에서 자살이라 보험금을 안 준다고 했나? 그런 일이 아니라면 이럴 이유가 없다. 재수사란 게 당신이 애써서 되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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