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가 버리고
에바 린드스트룀 지음, 이유진 옮김 / 단추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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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가 버리고

:생각과 생각이 만들어낸 거리

에바 린드스트룀







금호동에 있는 자그만 그림책 서점인 <카모메 그림책방>에 들렸다가 서점 한 구석에 놓여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연한 노란빛 배경으로 우두커니 먼 곳을 바라보며 서 있는 강아지(?)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해집니다 


 ‘모두 가 버렸어’

가방을 들고 걷고 있는 프랑크의 바닥만 하염없이 내려다 보는 시선과 축 늘어진 팔이 무척 쓸쓸해보입니다. 티티, 레오, 밀란은 그런 프랑크의 마음도 모르고 셋이서 신나게 어울려 놀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슬쩍 바라보는 프랑크의 마음은 점점 더 쓸쓸해집니다. 


‘모든 게 여느 때와 같아.

여느 때와 같기만 할 뿐이야.’

프랑크는 서운하기도 하고 자꾸 쓸쓸해지는 마음을 스스로 달래 보려는 듯 되뇌입니다. 그런 프랑크의 모습은 친구들의 눈에는 무척 바쁘게 보입니다. 티티, 레오, 밀란의 눈길은 그런 프랑크에게 가 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온 프랑크는 잔뜩 서운하고 외로운 감정을 담은 눈물을 뚝뚝 냄비에 흘립니다. 거기에 달콤한 설탕과 외로운 마음이 조금 다독여질 시간을 담아 달콤한 마멀레이드를 만듭니다. 

 '너무 뻑뻑해도 안 돼.

너무 묽어져도 안 돼.’

뭉근하게 끓고 있는 마멀레이드에 조금씩 눈물을 더해 마멀레이드를 만들고 있는 프랭크의 집 창문에 어쩐지 익숙해 보이는 모자가 눈에 띄네요. 마멀레이드를 식히려고 문을 연 프랭크의 눈에 자신의 집 창문에 모여있는 티티, 레오, 밀란의 모습이 보입니다. 


‘여전히 모든 게 여느 때와 같아.’

잠깐! 누가 하는 이야기일까요? 다음 페이지를 펼쳐보니 어쩐지 세 아이들이 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세 아이들도 프랑크와 친해지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식탁 위에는 세 명의 친구들을 위한 빵과 차 그리고 프랑크의 마음이 담긴 마멀레이드가 놓여있습니다. 

자신이 준비한 음식들을 함께 먹자고 수줍게 말을 건낸 프랑크에게 세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 초대에 응합니다. 말끔히 비워져 있는 식탁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프랑크의 집. 프랑크와 세 친구들은 함께 있을까요?










스웨덴 그림책 작가 에바 린드스트룀은 <모두 가 버리고>에서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올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 외로움, 쓸쓸함, 서운함 등을 마멀레이드라는 오랜시간 끓여서 진한 달콤함을 만드는 잼에 비유하여 표현합니다. 프랑크가 만드는 마멀레이드에 들어가는 눈물은 너무 뻑뻑해도, 너무 묽어도 안 될만큼의 양이여야 합니다. 자신의 작아지고 외로워지는 마음을 프랑크는 쏟아내기도 하고, 다독여가며 마멀레이드를 만듭니다. 자신의 감정을 풀어내는 시간이 지나가고, 항상 혼자라고 생각한 프랑크에게 세 친구들이 다가와 있습니다. 


이 그림책을 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다시 살펴보니, 티티, 레오, 밀란은 어울려 놀고 있지만 이 세 아이들의 눈동자는 프랑크에게 가 있습니다. 혼자 걸어가고 있는 프랑크가 어딜 가는지, 무엇을 할 건지 늘 궁금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프랑크처럼 다가가 말을 걸기엔 어쩐지 어려워집니다. 새로운 친구에게 말을 거는 건 쑥쓰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일이니까요. 


에바 린드스트룀은 관계, 외로움이라는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를 양쪽의 시각에서 주고 받듯이 그려냅니다.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 미묘한 관계를 그림과 함께 읽어나가는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두 번째 장에서 혼자 걸어가고 있는 프랑크와 반대 방향으로 나 있는 세 아이들 중 한명의 그림자가 어쩐지 서로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이들의 관계를 이야기 해주는 것 같습니다. 또 화면 안에 프랑크나 다른 친구들의 모습을 클로즈업 하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을 작게 배치하고 화면을 넓게  활용하여 이들 관계의 거리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동시에 그림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의 관계를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듭니다. 


린드스트룀은 주로 종이에 수채물감, 과슈, 연필로 작업을 하는데, 그 중에서 과슈(gauache)는 불투명한 수채물감으로 선명하고 차분한 색감이 매력적인 재료입니다. <모두 가 버리고>는 과슈라는 재료가 만들어내는 색과 색이 겹쳐져서 나오는 색감과 질감이 마치 여려겹으로 쌓여있는 감정을 떠오르게 합니다. 린드스트룀 특유의 색 조합과 섬세한 연필선으로 그려진 세부 묘사들도 무척 매력적입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 안에 가득 차 있는 생각때문에 상대가 멀게 느껴지고 그 관계가 어렵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릅니다. 린드스트룀은 상대를 내가 가진 생각의 눈으로 보지말고 좀 더 다가가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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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Henry (Paperback)
Kerr, Judith / HarperCollins Children's Books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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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HENRY

:함께한 시간과 추억이 만들어낸 그들의 여행

주디스 커 




주디스 커와 남편 나이젤 닐




그림책 서점에 들렀다가, 하퍼 콜린스에서 나온 <My Henry>의 표지에 시선이 갔습니다. 핑크색 하늘 위로 유니콘을 타고 두 사람이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도시 위를 나는 모습입니다. 포근한 솜사탕 같은 하늘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에 걸린 미소에 눈길을 뗄 수가 없어 얼른 사서 서점을 나왔습니다.  <My Henry>는 국내에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제가 어른이 되어 그림책을 다시 읽게 만든 책이기도 하고, 그림책 리뷰를 시작하게 한 첫 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작가 주디스 커와 그녀의 작업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한 번에 그녀가 쓴 모든 책을 읽어버리는 것이 아닌 조금씩 아껴가면서 읽어가고 싶은 주디스 커의 그림책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녀가 주로 사용하는 색연필이라는 재료도 한몫하는 거겠지요. <My Henry>는 이별이 주는 여러 감정들,  상실감, 회한, 쓸쓸함과 같이 누구에게나 아프게 다가오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 하기 힘든 주제에 대해 그녀만의 따스한 시각과 상상력을 보여준 책입니다. 이 책에서 주디스 커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 대해 영원히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과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My Henry>의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흥미롭고 유쾌한 여행은 매일 오후 할머니가 낮잠을 자는 4시부터 7시까지입니다.  이 여행을 함께 하는 사람은 하늘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 헨리입니다. 이 둘만의 여행은 예전에는 두 사람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다양하고 스릴 넘치는 것들로 채워집니다. 무서운 것을 싫어했던 할아버지 헨리는 사자와 노는 것을 즐기고, 공룡을 타기도 하고, 숲에서 동물들과 티타임을 갖고, 높은 것을 무서워했던 할머니가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일들이지요.



하지만 이들의 여행에서 마음이 먹먹해지는 건, 나란히 구름 위에 앉아서 둘이서 만들어 왔던 행복했던 날들을 떠올려 보는 장면입니다. 부부로서 첫 시작인 결혼식과 귀여운 세 아이들이 태어나고 함께 정원을 가꾸고 노년에는 거실에 앉아 각자가 좋아하는 간식을 들고 텔레비전을 보는 소박하고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이지요. 책 속에 설명되어 있지 않은 그 지난날 들에는 분명 힘들고 슬픈 일들도 있었겠지만 하루 중 주어진 짧은 만남에서 두 사람이 떠올리는 날들은 함께이기 때문에 행복하고 소중했던 순간입니다. 그리고 둘만이 나누고 공유한 추억들입니다. 어떤 새로운 흥미로운 일들도 두 사람이 공유한 추억을 이기지는 못합니다. 시간이 먼지처럼 쌓여 만들어내는 기억의 힘은 그렇게 강력한 것인가 봅니다. 


이 그림책을 다 본 후 다시 책의 맨 첫 장으로 돌아와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사진을 고양이에게 보여주며 이야기를 하거나,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한 잠에 빠져들기 전 소파에 앉아 고양이와 의미 심상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는 모습, 그리고 책의 맨 뒤표지에 할아버지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정성껏 닦으며 말을 건네는 모습 등 할아버지와의 여행을 기다리며 보내는 할머니의 일상이 다른 의미로 눈에 들어옵니다. 

 

조안나 캐리가 쓴 주디스 커의 생애를 담은 책 <주디스 커>를 보면 그녀의 삶과 작업에 있어 든든한 동반자와 지지자가 되어준 남편 나이젤 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실제로 <My Henry>은 그녀가 남편을 사별하고 난 후 그린 그림책입니다. 함께 생을 만들고 꾸려나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면 이 책이 더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주디스 커가 바라보는 이별은 사랑하는 사람과 보냈던 시간들로 인해 만들어진 또 다른 만남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상대를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기억들로 인해 이별을 아픔으로만 보지 않음을 그녀의 밝고, 풍성한 색감을 가진 색연필로 그린 그림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선을 굴려서 표현한 표현과 색연필 특유의 색과 색이 만나 풍성하고 따뜻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느낌은 두 사람의 특별한 여행을 따스하게 만듭니다. 시간을 재촉하듯 시계를 들여다 보는 천사가 야속하게 느껴지네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내일 오후에 다시 만납시다.  

이번에는 달로 소풍이나 갈까요?” 



문득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다음 여행이 궁금해집니다. 






[부부가 함께 읽는 그림책] 함께 읽은 3번째 그림책인 
<MY HENRY>에 대한 남편의 리뷰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https://blog.aladin.co.kr/712851116/1246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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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요안나 콘세이요 지음, 백수린 옮김 / 목요일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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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안개 같은 푸른빛이 감도는, 애정 어린 시선이 담아낸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추억

요안나 콘세이요 지음





요안나 콘세이요(Joanna Concejo)




혹시 그는 어렸을 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깃털처럼 가벼웠던


어린 시절. 성인이 된 누군가가 지나 왔을 어린 시절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항상 누구보다 커다란 어른의 모습을 한 단단하고 고단해 보이는 뒷모습을 가진 나의 아버지라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딸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잘 몰랐던 모든 아버지에게


<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는 작가 요안나콘세이요가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쓴 책입니다. 책 맨 뒤에 써놓은 글을 보며 아버지라는 이름이 가진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어린 시절,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걸어온 시간. 어른이 되어 바라보게 된 삶이라는 여정을 버텨내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묵직한 애정과 뭉클함이 느껴집니다.


<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는 줄거리를 따라서 읽어나가는 책은 아닙니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일상과 함께 했던 시간을 추억하는 모습을 사진을 펼쳐보듯 바라보게 됩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났을 때, 단편적으로 펼쳐지던 이미지는 한 덩어리로 단단하게 뭉쳐져 가슴에 들어옵니다. 요안나 콘세이요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시간의 순서가 아닌 생각의 흐름으로 풀어냅니다.  아버지를 추억하는 그녀의 생각의 리듬을 따라가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책 전체의 부드럽게 깔려있는 안개 같은 푸른색은 앙리가 살아온 시간, 장소의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색이 바랜, 시간을 드러내는 오래된 종이에 푸른색 색연필과 연필, 펜으로 그려낸 이미지들, 스크랩처럼 테이프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에서는 시간의 향기가 맴돕니다.  그녀가 사용한 연필과 색연필은 시간을 들여 그은 선들로 그리고자 하는 것들을 표현하는 재료입니다. 시간과 손의 힘, 선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에 물감과는 다른 깊이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재료기도 합니다. 천천히 흘러가는 이 책 안에서의 시간이 느껴집니다. 바람이 느껴지는 연필 선과 선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울림은 연필이라는 재료가 주는 꾸밈없는 담백함이 주는 깊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합니다. 



앙리는 벤치에 앉았고,

여름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는 


집 나무 벽에 등을 기댔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온 존재를 다해

고양이 털의 부드러운 잿빛 심연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는 이미지로 만들어진 시집으로 읽어집니다. 표지를 넘긴 그 순간부터 삶이 움직이는 그 고요한 움직임과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한 사람이 걸어온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당신은 이 책에서 길을 잃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그래야만 하고요. 사건의 순서를 찾으려 애쓰지 말아요. 들판을 혼자 걸으며 나만의 길을 만들어 보세요. 저는 이 책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려고 해요.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안개 속에 숨어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좋으니까요.” 

- 요안나 콘세이요 






[부부가 함께 읽는 그림책] 남편의 리뷰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https://blog.aladin.co.kr/712851116/1243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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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팡도르
안나마리아 고치 지음,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정원정.박서영 옮김 / 오후의소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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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팡도르

:삶이 만들어 내는 달콤하고 진한 생의 맛

안나마리아 고치 글/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일러스트레이터 비올레타 로피즈( Violeta Lopiz)

copyright 2021. Yoon Young Joo All rights reserved





주변에 설탕과 향신료 향이 가득합니다. 코 끝에 진하고 달콤한 과자 향기가 맴도는군요. 괜히 주변을 둘러보고 하릴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합니다. 범인은 바로 안나마리아 고치가 글을 쓰고 비올레타 로피즈가 그림을 그린 그림책 <할머니의 팡도르>입니다. 


옮긴이의 후기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이탈리아의 베피나 전설과 오랜 이탈리아의 전통이 담긴 스폰가타라는 디저트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베피나 전설과 관련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빗자루를 타고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채, 커다란 코를 가진 개구쟁이처럼 보이는 할머니 베피나(Befana)는 매년 1월6일이면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마녀입니다. 베피나는 착한 아이에게는 선물을 그리고 나쁜 아이에게는 숯을 넣고 간다는군요.











마을 외딴집에 살며 고단한 날들 만큼이나 얼굴에 많은 주름이 생긴 할머니에게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사신이 찾아옵니다.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할머니의 특별 레시피로 만들어진 디저트들을 기다릴 아이들을 생각하며 할머니는 자신과 함께 가기를 요구하는 사신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합니다. 할머니의 외딴 집에서 가득한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달콤한 향과 느닷없이 쑥 입안으로 내밀어진 달콤한 맛에 사신은 어떨결에 할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맙니다. ‘비법은 오직 기다림’이라는 바삭바삭한 누가와 하룻밤을 숙성시킨 반죽이 있어야 완성시킬 수 있는 금빛으로 빛나는 팡도르를 완성시키기 위한 할머니와 사신의 밀당이 은근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할머니의 디저트의 달콤함은 삶의 한 부분과 닮았습니다. 그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 노동과 기다리는 시간은 삶의 한 부분입니다. 할머니의 레시피가 만들어진 과정 역시 길게 느껴지던 고단한 날들과 문득 고단한 날의 틈을 비집고 찾아오는 기쁨, 오랜 시간의 기다림 등으로 단단하게 뭉쳐진 세월이 묻어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의 디저트는 사신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삶의 깊은 향을 뿜어냅니다.  찰다(포춘쿠키 같은 이탈리아 과자) 속에 할머니의 인생의 비밀을 남기고 생의 달콤한 맛을 아이들과 나눈 후, 할머니는 앞치마를 풀고 사신에게‘이제 갈 시간'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책의 그림을 그린 비올레타 로피즈는 은유적으로 그림을 풀어냅니다. 여인의 목소리를 가진 자루 형태의 사신. 일반적인 사신의 이미지에 익숙한 우리에게 <할머니의 팡도르> 속 사신은 무척 생소합니다. 비올레타 로페즈는 글에서 묘사된 사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자리를 남겨 놓습니다. 할머니가 만들어내는 디저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붉은 색의 색연필로 표현된 빨간 공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가 할머니의 디저트들을 그림으로 직접적으로 표현했다면, 책을 읽는 내내 떠오르는 맛과 향은 나지 않았겠지요. 무조건 글에 있는 이미지들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만이 내용을 잘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할머니가 찰다 속에 숨겨 놓은 인생의 비밀은 어떤 단단하고 진한 향기를 품은 채 세상에 남아 있을까요? 죽음은 항상 우리 삶 속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그 주제가 가진 무게감을 다루기는 쉽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팡도르>는 한 사람의 삶이 만들어낸 흔적이 연결되어 이어진다는 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이야기의 연결입니다.  우리가 누군가 우리의 삶에서 떠나간 후에도 그 사람의 흔적들을 이야기하고 되새기는 것처럼 말이죠. 그건 한 그릇의 음식일 수도 있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식 등 다양한 형태입니다. 삶이 남겨 놓은 흔적은 비슷한 형태이지만 또 다른 삶이 더해져 발전해 나갑니다. 누군가와 보내는 이 시간이, 음식이, 함께 하는 작은 일상들이 소중해집니다. 언젠가는 내가 향을 더해 만들어 내야 할 생의 맛 일 테니까요. 




[부부가 함께 읽는 그림책]연재의 첫 시작으로 <할머니의 팡도르>를 골랐습니다. 남편이 이 책에 대해 쓴 글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aladin.co.kr/712851116/12409611

소매를 걷어붙인 채 반죽을 미는 할머니의 얇은 입술 끝에 미소가 걸려 있었습니다. 막 반죽 속에 인생의 비밀을 숨겨 놓은 참이었거든요.

빵 속에는 온갖 풍미가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생의 맛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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