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팡도르
안나마리아 고치 지음,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정원정.박서영 옮김 / 오후의소묘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할머니의 팡도르

:삶이 만들어 내는 달콤하고 진한 생의 맛

안나마리아 고치 글/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일러스트레이터 비올레타 로피즈( Violeta Lopiz)

copyright 2021. Yoon Young Joo All rights reserved





주변에 설탕과 향신료 향이 가득합니다. 코 끝에 진하고 달콤한 과자 향기가 맴도는군요. 괜히 주변을 둘러보고 하릴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합니다. 범인은 바로 안나마리아 고치가 글을 쓰고 비올레타 로피즈가 그림을 그린 그림책 <할머니의 팡도르>입니다. 


옮긴이의 후기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이탈리아의 베피나 전설과 오랜 이탈리아의 전통이 담긴 스폰가타라는 디저트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베피나 전설과 관련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빗자루를 타고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채, 커다란 코를 가진 개구쟁이처럼 보이는 할머니 베피나(Befana)는 매년 1월6일이면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마녀입니다. 베피나는 착한 아이에게는 선물을 그리고 나쁜 아이에게는 숯을 넣고 간다는군요.











마을 외딴집에 살며 고단한 날들 만큼이나 얼굴에 많은 주름이 생긴 할머니에게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사신이 찾아옵니다.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할머니의 특별 레시피로 만들어진 디저트들을 기다릴 아이들을 생각하며 할머니는 자신과 함께 가기를 요구하는 사신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합니다. 할머니의 외딴 집에서 가득한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달콤한 향과 느닷없이 쑥 입안으로 내밀어진 달콤한 맛에 사신은 어떨결에 할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맙니다. ‘비법은 오직 기다림’이라는 바삭바삭한 누가와 하룻밤을 숙성시킨 반죽이 있어야 완성시킬 수 있는 금빛으로 빛나는 팡도르를 완성시키기 위한 할머니와 사신의 밀당이 은근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할머니의 디저트의 달콤함은 삶의 한 부분과 닮았습니다. 그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 노동과 기다리는 시간은 삶의 한 부분입니다. 할머니의 레시피가 만들어진 과정 역시 길게 느껴지던 고단한 날들과 문득 고단한 날의 틈을 비집고 찾아오는 기쁨, 오랜 시간의 기다림 등으로 단단하게 뭉쳐진 세월이 묻어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의 디저트는 사신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삶의 깊은 향을 뿜어냅니다.  찰다(포춘쿠키 같은 이탈리아 과자) 속에 할머니의 인생의 비밀을 남기고 생의 달콤한 맛을 아이들과 나눈 후, 할머니는 앞치마를 풀고 사신에게‘이제 갈 시간'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책의 그림을 그린 비올레타 로피즈는 은유적으로 그림을 풀어냅니다. 여인의 목소리를 가진 자루 형태의 사신. 일반적인 사신의 이미지에 익숙한 우리에게 <할머니의 팡도르> 속 사신은 무척 생소합니다. 비올레타 로페즈는 글에서 묘사된 사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자리를 남겨 놓습니다. 할머니가 만들어내는 디저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붉은 색의 색연필로 표현된 빨간 공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가 할머니의 디저트들을 그림으로 직접적으로 표현했다면, 책을 읽는 내내 떠오르는 맛과 향은 나지 않았겠지요. 무조건 글에 있는 이미지들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만이 내용을 잘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할머니가 찰다 속에 숨겨 놓은 인생의 비밀은 어떤 단단하고 진한 향기를 품은 채 세상에 남아 있을까요? 죽음은 항상 우리 삶 속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그 주제가 가진 무게감을 다루기는 쉽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팡도르>는 한 사람의 삶이 만들어낸 흔적이 연결되어 이어진다는 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이야기의 연결입니다.  우리가 누군가 우리의 삶에서 떠나간 후에도 그 사람의 흔적들을 이야기하고 되새기는 것처럼 말이죠. 그건 한 그릇의 음식일 수도 있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식 등 다양한 형태입니다. 삶이 남겨 놓은 흔적은 비슷한 형태이지만 또 다른 삶이 더해져 발전해 나갑니다. 누군가와 보내는 이 시간이, 음식이, 함께 하는 작은 일상들이 소중해집니다. 언젠가는 내가 향을 더해 만들어 내야 할 생의 맛 일 테니까요. 




[부부가 함께 읽는 그림책]연재의 첫 시작으로 <할머니의 팡도르>를 골랐습니다. 남편이 이 책에 대해 쓴 글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aladin.co.kr/712851116/12409611

소매를 걷어붙인 채 반죽을 미는 할머니의 얇은 입술 끝에 미소가 걸려 있었습니다. 막 반죽 속에 인생의 비밀을 숨겨 놓은 참이었거든요.

빵 속에는 온갖 풍미가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생의 맛이었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