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걷는사람 시인선 39
윤석정 지음 / 걷는사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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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일을 뭘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시에 음조와 멜로디를 입히면 노래가 될까?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김이나작사가가 작사를 두고 이런말을 한적이 있다. 작사란 노래의 몸의 형태를 표현하고 숨쉬게 하는것이라고. 나는 시인은 시를, 그리고 언어에 호흡을 불어넣고, 대중들에게 이미지의 형태로 드러나게 한다고 생각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인간이 시적 존재라는 사실도 그래서 공감이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윤석정시인이 시를 노래로 표현하는 ‘트루베르’라는 밴드의 대표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그 팀의 특징을 시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어쩌면 이게 고집처럼 보여 지기도 한다. 시와 멜로디는 분명히 구분할 수도 있는 문제기도 하니까. 멜로디에 따라 가사의 변화는 반드시 필수불가결하게 요청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를 강조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볼 때 그만큼 문학에 대한 애착도 강하고, 창작자로서 개성(?)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시는 그러니까 입체적이고 독자들에게 호흡이고 삶이어야 한다.

나는 시를 읽으면서 ‘바깥’이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곱씹어볼 수 있었다. “나를 입고 바깥을 맴돌았다 (중략) 무궁한 당신들이 나의 바깥이었다는 것”라는 시인의 말에 대해서 나를 제외한 모든 바깥이라 칭할수 있는 모든 것이 나의 존재이유가 될 수 있겠다는 개인적인 감상과 함께 이름 모를 따스함이 느껴졌다. 반대로 공허함이 시어로부터 내 심장까지 계속해서 들이 닥칠 때마다 슬픔으로 가득했다. ‘얼굴들의 노래’라는 시에서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두고 아버지가 할머니의 뼛조각을 가지런히 모아놓고, 할머니의 얼굴을 살살 만드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애틋함과 애처로움, 그리고 ‘당신은 누구인가’에서 가위에 눌린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생각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당신’에 그저 물어볼 수밖에 없는 묘한 그리움을 나도 동일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삶의 수레바퀴안에서 누군가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우린 만나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소통한다. 바깥은 따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레바퀴를 함께 걸어가는 과정에서 ‘나’를 포함한 ‘당신’, ‘우리’라는 끈으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시는 그렇게 나에게 묻는다.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아니. 바깥을 향해 안부를 묻는 것에 대한 역설. 그렇다면 그것을 하자. 안부를 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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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고 발칙하게
원진주 지음 / 미래와사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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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다와 발칙하다 라는 것은 뭘까? 솔직하다라는 정의는 ‘거짓이나 숨김이 없이 바르고 곧다’라는 뜻이고, 발칙하다라는 뜻은 버릇이 없다 혹은 하는 짓이 아주 꽤심하다라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솔직하다’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한국에서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할 때가 많은 반면에 ‘정직하다’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많이 사용된다. 이유가 뭘까? 정직하다와 솔직하다의 뜻은 동일한데도 말이다. 


그만큼 한국사회에서 솔직하다라는 것이 희귀한 것처럼 보인다. 외국에서 어학원을 다니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한국인들은 자신의 의견을 자신 있게 내세우는 것이 어색하지만, 다른 외국인들은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더라. 나는 이러한 배경을 갖는 이유는 한국사회라는 풍토, 즉, 문화와 역사적인 측면에서 ‘눈치’를 많이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특히 권위에 순종하는 유교적인 문화가 여전히 자연스럽다. 그러다보면 ‘솔직한’사람이왕따를 당하는 분위기가 은연중에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그런 사회에서 사는 우리는 이 책의 제목을 어떻게 받아 들일수 있을까? 우리는 한번쯤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솔직하게 말해볼까? 라며 말이다.


원진주작가의 ‘솔직하고 발칙하게’는 이 두가지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중복시킴으로써 작가의 방송에서 경험한 그녀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까발리고 있다. 신입작가로서 겪어야만 했던 부당한 일들, 사회가 요구하는 통념에 대한 의견, 공공연히 일어나는 방송계안에서의 외모평가, 작가로서 맡은 한국사회의 사건들에 대한 안타까움등등에 관하여 방송작가의 시점에서 적나라하게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런 내용이 전부는 아니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삶의 고단함과 편견에 맞서 싸우는 작가의 삶을 다루는 ‘먹고 살기 고달프다’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고, 2부는 ‘나를 버티게 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삶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들에 대하여 쓰여 있다. 책에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는 책의 파트별로 마지막 페이지에 저자가 찍은 사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책을 풍성하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자아내게 하는 포인트가 된다. 예를 들어 매일같이 야근을 하면서 퇴근길에 이용하는 택시에서 아저씨가 ‘초콜릿’을 받은 사진을 쳐다보고 있으면 아직 세상을 살만하구나 생각하게 된다. 


나는 책을 보면서 ‘방송작가’라는 타이틀뒤에 숨어 있는 수많은 땀과 눈물들을 확인할 수 있어 굉장히 흥미로웠다. 사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흔하지 않은 직업이고, 비밀리에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발표되어야 하다보니까 우린 방송작가에 대한 데이터가 별로 없다. 그래서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작가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솔직하고 발칙하게 말하는 방식에 대하여 우린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각자의 세계는 실제로 변화될 수 있다. 편견과 부당함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눈치를 보고 숨기는 것이 아닌 솔직하고 발칙하게 나를 표현하고, 호소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기를 나와 한국 사회에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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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장면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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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엄지 작가의 <겨울장면> 을 읽으면서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적이 있다. “이해 안 가면 그냥 스킵(skip)하세요.” 라고. 우리는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할 때 뒤로 돌아가 그 내용을 다시 한번 더 읽으려 한다. 마치 삼시세끼 밥을 먹어야 건강할 수 있다고 여기거나, 혹은 결혼을 해서 부부로서 당연하게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태도는 책을 읽을 때 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해야만 한다’라는 의식 말이다. 말하자면, 무의식적으로 소설의 내용을 파악해야만 하는 의무를 갖은것처럼 책을 읽게 된다. 하지만 김엄지 작가의 ‘글’은 스토리에 얽매여 있지 않다. 오히려 글이 지녀야 할 통념이나 관습에 의한 글쓰기를 거부하려고 한다. 그래서 장면마다 소설을 읽을 때 상상하게 되는 스토리의 배경과 인물묘사보다 ‘느낌’을 떠올리게 된다. 느낌이란건 무의식을 반영하기 때문에 규칙적이지 않으며, 직관적이며 감각적이다. 이 지점에서 해석의 영역이 강제된다. 마치 ‘시’를 읽는듯하다고 해야 할까? 어떤 시는 마치 수수께끼와 같아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해석하기가 참 어렵다. 아니 실상 완전한 해석이란 건 니체에 말마따나 없는 것 인지도 모른다. 


사실(들)은 없고, 해석(들)만 있다(Tatsachen gibt es nicht, nur Interpretationen)라는 말마따나 해석들로 가득찬 세계에서 우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해석이란 퍼즐에서 작가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즐거운(?)포인트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겨울장면>에서는 겨울의 차갑고 공허한 이미지들이 드러나는데, ‘천장’, ‘얼음호수’ ‘마음’같은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천장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천장이 묘사되는 장면들은 유일하게 이름을 갖고 있는 R의 시선이 향하고 지점을 묘사한다. 기억을 잊은 주인공이 향하고 있는 천장이란 작가의 말대로 확실하지 않은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이 위인지, 아래인지, 허공인지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없다. 다만 내가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라곤 천장은 상상의 펼칠수 있는 공간이고, 가능성의 공간이다. 겨울장면의 시작은 ‘천장’과 함께 시작한다는 점에서 상상력을 펼칠수 있는 도화지와 같다. 천장을 보면서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삶의 부분들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천장 안에 뭐가 가득할 것 같다. 천장 안에 빛이 있다면. 빛이 없을리는 없다. 빛 없고, 보는 눈 없이.”


그리고 독특하게도 이 문장은 수미상관으로 끝 무렵에 또 한번 등장한다. 수미상관은 글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거나 강조할 때 주로 쓰인다. 이뿐만 아니라 중간 중간마다 ‘천장’을 다시 바라보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어떤 쓸쓸함, 고요, 고통과 같은 감정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체감된다. 이러한 반복과 중첩되는 이미지인 천장은 소설의 중요한 키워드이자 작가의 시선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고찰할 수 있는 부분은 보통 작가들은 글을 쓸 때 전체적인 밑 그림을 작품 들어가기 전에 완벽하게 설계하는 부류와, 글을 써가면서 스토리가 덧붙이는 부류들이 존재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그 사이로 보인다. 왜냐하면 수미상관의 차용은 보통은 설계를 하지 않고서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고, 작가의 그동안의 작품세계를 보았을 때 각 장면들의 공백을 직접적으로 채우려는 노력보다 그 공백을 독자들에게 맡기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해석을 강요하게 되는 ‘시’와 같아 보인다. 왜 소설제목을 <겨울장면>으로 했을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겠지만, 처음에 작가도 확신이 없었다고 한다. 인터뷰 중에 작가는 “다시 겨울이고, 다만 겨울이고, 잊히지 않는 것은 장면이다”라고 했다. 겨울이 가진 특별한 온도, 그리고 겨울이 갖고 있는 장면들을 문장 하나하나에서 발산하고 있는데, 그것은 작가의 시선에서의 겨울이지만, 그 겨울이란 이미지를 통해서 독자의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을 하나 둘 씩 꺼내고, 채워나가기를 바라는 시선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책을 읽으면서 


이번겨울이 벌써 후반전을 향해 가고 있다. 사실 이번겨울은 춥지 않았다. 코로나는 겨울을 실종시켜 버렸고, 밖에 내리는 눈을 의식하기도 전에 비가 내려버렸다. 겨울이 녹았다. 겨울이 그리워졌고, 겨울을 읽고 싶어졌다. 겨울을 있는 그대로 상상하고 싶어 질 때도 유학을 실패하고 돌아온 나에게는 지독한 격리로 몸과 마음이 지쳤었다. 그곳에서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어서 빨리 겨울이 지나 따스한 봄이 오기를 간절히 희망했었다. 봄이 오면 괜찮아질까? 겨울이 지나가면 괜찮아질까? 그러나 <겨울장면>은 오히려 나에게 ‘현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겨울장면>은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거나 위로를 주지 않는다. ‘겨울’은 겨울이고, ‘나’는 나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겨울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 겨울을 찍고, 겨울장면을 만들자. 그리고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어제는 밖에서 글을 썼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자전거를 눈앞에 세워두고. 

자전거 안장에 노트북을 얹어놓고.

노트북이 거기 얹히는 것도 신기하지만 타자까지 쳐지니.

내가 되게 작가가 된 기분이었다.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마우스가 저절로 커서를 움직였다.

뭔가 알아서 완성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쓰고 싶은 말들은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결심을 하면서 혼자 재미있었다.   <겨울장면 에세이 중>


리딩투데이에서 협찬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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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와 유대인 선교
폴 모리스 지음, 김광남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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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아있는 이스라엘, 살아가는 이스라엘”


“우리와 그들 사이 & 그들과 우리 사이”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과연 이스라엘은 어떠한 나라인가?

혹시 한국의 속담에서 생각하는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다의 의미”로 유대인을 취급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아니하였는가?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설교가 쏟아져 나오는 이 시대에 유대인은 단순히 구원 받은 이들을 돋보이게 하는 가쉽거리에 불과하지 않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과연 유대인과 이방인의 위치는 그렇게, 혹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만약 그러한 고찰사이에서 부딪혀야 할 관문들이 존재한다면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서 우리와 그들 사이, 그들과 우리 사이에서 고민해야 할 성경적 기준을 정리 정돈 해야 하는 것이 순서 일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대체되어야 하는거지?”

대체신학(replacement theology)이라는 용어는 오늘날의 유대인은 더 이상 약속이나 언약의 백성이 아니라는 견해에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 견해는 이스라엘을 기독교 교회로 대체해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어떤 의미도 갖고 있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문제는 성경에 수많은 구절들이 이스라엘의 백성의 고유한 역사적 위치에 대해 지목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그 구절은 대체라는 이름으로 대체 할수 없는 신학이며 성경이 암시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의미를 퇴색시킬 우려가 보인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먼저 맡게 할수 있는 특정한 권한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고, 그것은 신약을 연결하는 중요한 내러티브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체신학이란 용어를 효과적인 두가지의 대안을 제시한다. “배제(exclusion)신학” 그리고 “자랑(boastion)신학” 이다. 배제는 유대 백성의 지속적인 언약 신분을 견지하는 모든 이가 그것을 사용하면서도 서로를 비난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며 자랑은 바울이 사용했던 용어를 취해 이런 잘못된 생각에 대해 반대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 다루기 때문이다(p32).

이 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대체”라는 용어가 발산하고 있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지금도 살아있으며 살아가는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을 성경적, 사회적(환경적), 상황적, 선교적인 입장에서의 분석들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재 메시아닉 유대교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서 한 지체로써 한 소망으로써 부름 받은 교회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눈가에 흘린 두가지의 눈물”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은 긍휼의 눈물이자 평화의 눈물이였다. 이스라엘에게 예고된 구원의 메시아가 그들 앞에 있더라도 그들의 눈은 예수님을 응시하고 있지 않는것만 같았다. 칼빈(기독교 강요 2.7)이 말하듯 분명히 율법은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으며 그 율법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기까지 구원의 희망을 주려고 한 그 목적이 훼손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예수님의 눈물은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율법을 안다고 하는 사두개인, 열심당, 심지어 바리새인들조차도 그 영적인 의미를 분별하지 못했다. 그들 보시고 예수님께서 드러내셨던 표현은 “~했더라면”(if)과 “너조차도”라는 표현이다. 우린 상황윤리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윤리적 당위성을 유지하고 싶은 탐심이 존재한다. 그것은 상실의 문제로써 되풀이 할수 없는 문제에 대한 고립된 정체성을 유대인에게 부여한다. 되풀이 할수 없을뿐더러 그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 그들에게 예고 되어 있으므로 예수님은 안타까운 긍휼의 눈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것은 한결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히브리서 13:8). 


“그러므로 우리와(유대인) 우리는(이방인)”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들이 먼저 하나님과 화해할 때에만 서로 화목하게 된다(p255). 유대인과 이방인이 옛 언약의 생활 방식과 연합함으로써 그둘로부터 한 옛 사람(엡 2:15)이 만들어졌을 것이다(p260).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한 영”으로 인하여) 양자로 부름을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각자의 삶의 패턴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화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유대교 식으로 성장한 이가 선교사가 되어 순회 선교를 할 때 돼지고기가 나왔다면 그것을 쉽사리 먹을수가 없다. 문화적 배경 사이에서 바울의 원칙을 고려하는 것은 유대인 선교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인이다. 

또한 개종한 유대인이라고 해서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전통의 예배 방식들을 함께 고수해야 하는 것이 과연 옳은것인지 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골로새서 2:16-3:3에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어떤 종교적 의식이나 신비로운 통찰에 우월한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는 자들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은 그들이 추구하는 유대교적 의식에 대해서 존경의 표시를 하는 것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닮는”일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성경(고후 3:15-16)은 모세의 글(율법)을 수건이라 표현하고 주께로 간다면 그 수건이 벗겨진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수건은 진리를 밝히 들어내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써 존재할뿐이지 그 행위를 하는것에 진리가 담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 사이에 서 표명해야 한다. 사실 우리와(유대인) 우리는(이방인) 메시아닉 유대교와 개신교 사이에서 따로 분류 되어야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한 성령과 한 세례를 받은 그리고 한몸으로 연합된 공동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함으로 반드시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 그것이 궁극적인 유대인들에 대한 선교의 방향성이다. 사랑가운데 서로를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야 한다(엡 4:2-3).


앞으로 우리(이방인)와 우리(유대인)는?

최초에 하나님께서 언약백성으로 부름 받은 유대인에 대한 오해를 이방인은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유대인과의 관계를 끊고 이방인에게 집중하고 계시다는 편협한 생각을 바울은 지적했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이제는 자신들이 진정한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있다는 어떤 우월성에 사로잡혀서 유대인들을 구원에서 탈락한 존재로써 방관해버린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듯이 저도 이스라엘 사람이며 아브라함에 씨에서 낳고 베냐민 지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탈락시키지 않았습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방적이고 전적인 구원은 자신이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다. 예를 들어 아무리 기독교를 박해하는 김정은과 같은 위치에 서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불가항적으로 은혜를 베푸심으로 그를 구원하실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라는 존재가 다르지 않다라는 전제를 제시 한 다음에 그 다음 순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결론적으로 서로를 필요로 한다라는 것이다(p408).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었고, 이스라엘은 이방인이 받은 긍휼의 결과로 긍휼을 받는다고 한다(롬 11:31).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여전히 계획들을 갖고 계시는 것이다. 이방인으로써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들은 계속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게 바로 유대인에게 받은 “빚”과 같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언약백성으로 출생한 우리는 칼빈이 말하듯 율법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기까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희망을 소망케하려는 의도에서 작정되고 작성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먼저 맡고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 많은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방인으로써 빚과 같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방인은 그 긍휼로 나음을 얻었고, 아직 그 나음을 얻지 못한 그들에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복음의 필요성은 불가결해 보이는게 우리(이방인)와 우리(유대인)의 입장인 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선교의 역사의 현장 가운데 우리가 기필코 다뤄야 할 유대인의 선교는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있어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고, 우리라는 공동체로 연합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앞으로도 믿는 자로써 그들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 나라에 신랑과 신부로써 입장해야 할 같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로 바라볼뿐만 아니라 구약성서로 바라볼때도 유대인에겐 구원이 필요함으로 모든 성경 가운데 모든 선교의 현장 가운데 계신 그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찬양하며 그 깊으신 뜻에 흠뻑 매료되는 아주 귀한 경험을 책을 통해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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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란 무엇인가
최갑종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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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를 말하는 자, 성화의 삶을 살지어다.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다보면 구원론의 입구이자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대한 교리라고 할수 있는 칭의에 대해 불신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은 “거래”에서 출발해서 조건적으로 인간 사이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의 표현인 칭의라는 개념이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들중에 무료로 롤스로이스나 람보르기니 같은 차를 준다고 했을 때 그것을 은혜로 받아 드릴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 할겁니다. 이게 무슨 신종 사기인가?라는 생각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겐 칭의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칭의를 받았다라는 믿음이 확실하다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최갑종 교수님이 쓰신 책인『칭의란 무엇인가』가 성경적인 적절한 해답과 최근 신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여러 관점들을 정리하고 살펴봄으로 칭의와 성화의 균형 잡힌 시각을 주리라 확신합니다.

일반적으로 칭의는 구원론적인 관점으로 개개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정적 선고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는 신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울에 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해있는지를 지칭하는 교회론적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또한 그들은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보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 이유인 즉슨 칭의가 신학과 윤리의 삶을 서로 분리시켜 복음을 윤리 없는 값싼 복음으로 전락시킨다는 점이 계속해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칭의는 어떨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적 정황은 어떻게 연결 되어 있을까요? 저자는 여기서 샌더스라는 새관점의 출발을 알리는 그를 소개합니다.

여기서 새 관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샌더스는 칭의를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선택과 은혜에 의해 주어진 그들의 특별한 신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p37)로써 전통적으로 우리가 받아 들이는 칭의교리를 수정하려는 시도를 거듭합니다. 이것의 배경은 유대교 문헌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이해가 등장했기 때문에 기존의 잘못된 유대교 이해를 따라 해석된 바울의 칭의 교리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라고 주장입니다. 또한 새관점을 주장하는 던이나 라이트도 의견 같이 하여 칭의 교리를 구약에서의 하나님께서 맺으신 율법의 언약들이 종말론적인 관점 아래에서 해석합니다. 물론 이 의견은 타당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언약은 종말을 향해 모든 사람들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함하여 언약하고 있음을 성경은 자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관점 주의자들은 언약백성으로써 자격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성화를 더 강조하는 경향성이 보입니다. 정통적으로 신학자들은 신명기 27:26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은 율법을 완벽하게 준수 할수 없으므로 인간은 무능력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주님의 은총을 구하게 된다라는 결론이 나오지만 그들은 바울 당대의 유대교의 가르침은 유대인인 바울 자신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거부를 합니다. 

더군다나 샌더스는 바울의 가르침을 수사학적(구원론적·기독론적)으로 판단하여 갈라디아서 3:10-11에서 말하는 율법의 완전한 순종에 대한 요구나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축복“을 말하는 선행 문단과 대조적으로 ”율법“→”저주“를 말하는 데 있다(p117)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관점은 칭의 교리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며 믿음의 행위를 언약백성으로써의 율법 준수에 힘을 쏟게 함으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할수도 있다는 위험성 마저 보입니다. 

율법은 의를 가져다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라고 말씀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의와 구원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경우는 저주를 자초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 성경의 구원관입니다. 더 들어가 바울은 인간이 율법 준수에 문제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믿음의 길처럼 과연 인간에게 의/구원에 이르는 길/수단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더 근원적인 문제로 나아가는 것임을 성경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칭의에 대한 논의가 정리된 우리는 성화를 어떻게 볼 것입니까? 성화는 주로 실천적인 문맥에서 사용되는 것을 볼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칭의와 성화를 비록 다른 각도나 문맥에서 사용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일종의 동의어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의 서신을 보게 되면 “거룩하게 하다”를 9번(롬 15:16; 거잔 1:2 6:11; 7:14, 14; 엡 5:26; 살전 5:23; 딤전 4:5; 딤후 2:21), 명사 “거룩함”을 8번 사용합니다. 어휘적인 용법을 살펴보게 되면 과거나 완료형 그리고 현제 시제로 사용이 됩니다. 성화도 칭의의 경우처럼 이미 이루어진 사건인 동시에 지금도 이루어지는 실제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p222). 디도서 3:4-7절을 보게 되면 구원의 행위를 삼중적으로 표현합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의롭다 하심”으로 표현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것이 칭의와 성화의 순서를 나타내고 있기 보다는 서로 동일한 의미로 구원의 실재를 표현이라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칭의와 성화를 계속해서 살펴보게 되면 칭의와 성화는 서로 분리 되어 있지만 구분되어지지 않음을 우리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할수 있으며 그것은 삼위로 계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아래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칭의란 무엇인가』이지만 구원론의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는 책입니다. 최근에 대두되어 지는 바울의 새관점을 주장하는 샌더스, 던, 라이트의 주장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있으며 그들의 교리의 심장부인 칭의와 성화를 정통적인 교리와의 차이점에 대해 잘 분석하고 있습니다. 구원론의 중심에 서 있는 칭의는 성화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잘 설명하고 한국 교회가 다시 한번 각성해야 할 칭의와 성화를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온전하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되었다라는 것에 대한 감격으로 삶을 살아 갈 때 칭의에 대한 감격과 마땅히 그 감격으로 사랑하는 이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동시적으로 나타나 신자들의 삶을 이끌어 간다는 사실을 조금만 더 이해한다면 이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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