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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 개정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이혜승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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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나보코프만큼이나 극단적으로 추종하는 세력이 나뉘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국, 미국 및 다양한 지역의 비평가와 많은 소설가, 대표적으로 디킨스 같은 경우가 그러했듯이 그의 문체에 운명적으로 사로잡힌 작가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나열했던 톨스토이, 고골, 체호프, 투르게네프 작가들의 순위를 누군가는 격양된 태도로 관조할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나보코프의 주체적인 관점이 러시아 문학을 해체하는 이 작업은 제법 유의미한 성찰로 읽힌다. 러시아의 검열로 인해 글쓰기가 제한되기 전의 작가들의 작품을 다채로운 방식과 관점으로 분류하고 분석하는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있어 탄탄한 토양 아래 세워진 러시아 문학의 가능성을 묵도하게 만든다. 나보코프의 강의는 온전히 각기 다른 작가들이 가진 문체, 사상과 시대적 배경과 경험들이 함의하는 언어의 기호들을 뚜렷하게 응시한다. 그의 작가들을 향한 정의는 그의 주관이 귀납적 논거를 반영한 객관적인 선택으로 수긍할 수밖에 없도록 정의된다. 그에게 있어 고골은 이상한 존재였고, 투르게네프는 읽기 편한 작가일 뿐 위대한 작가라 일갈하였으며, 체호프는 작가로 모든 형태의 불의에 저항한 인물, 그리고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라고 말했다. 


이 책에선 ‘소설의 구조’의 지적으로 이해하는 열쇠들이 곳곳에 배치된다. 가령 톨스토이의 대작으로 칭송하는 <안나 카레니나>의 구조를 해석할 때 그는 먼저 ‘시간의 배열을 고려하는 것’을 우선으로 말한다. 등장인물의 삶 간의 동시화에 대한 전제를 언급함으로 기술되는 효과는 그의 말대로 ‘즐거움’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되풀이해서 문학은 일반 사상에 속한 것이 아닌 구체적인 말과 이미지”라고 말했다. 대체로 그의 비평이 본문을 근거로 논증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기반을 다지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보코프의 글은 작가들이 가진 보석과 같은 광채를 정교하게 채굴함과 동시에 자신의 논점을 맹렬하게 진술한다. 분명히 독자는 나보코프가 가진 엄밀한 태도들을 통해 비평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지만, 그의 비평을 전부 다 추종한다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문학의 가치는 순위를 매기거나 폄하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등장하는 비평의 논지는 누군가에겐 공격적으로 감지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마치 방대한 이야기를 요약하는 안내서 같은 느낌이라 높은 러시아 문학에 등반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첫 번째 매뉴얼로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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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투명성 또는 불투명성, 따라서 언어에 의해 말해지는 바가 표현의 수단인 말에 현존하는 방식의 문제를 어김없이 제기한다. 내용과 형식의 대립이 점차 뚜렷이 드러나 마침내 우리가 알고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중의 근본적 필요성으로부터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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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가 말하듯이 "말이란 말하는 사람이 품고 있는 관념의 기호이고,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정신 속에 지니고 있는 관념 이외의 다른 것에 말을 기호로서 직접 적용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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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부뉴엘 - 마지막 숨결 현대 예술의 거장
루이스 부뉴엘 지음, 이윤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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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를 처음 접한 건 그의 유작인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 )이었다. 당황스럽게도 두 명의 여인이 동일한 인물을 연기하는 것인지, 그들이 별개의 인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인지를 처음에는 알 길이 없었다. 또한 어린 여자를 지독히도 사랑하는 찌질한 남성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이상한 정열>(1953)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났던 부유한 중년 남성의 이미지가 부뉴엘의 영화를 관통하는 코드라면 필시 그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문뜩 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시인이 시로 자신의 내면에 귀속된 무의식의 언어를 드러내는 발화자라면, 영화감독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을유에서 발간된 루이스 부뉴엘: 마지막 숨결은 그의 영화 인생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경유한 초현실주의자들의 그림자들을 함께 첨부함으로 하나의 흥미로운 대서사시로 완성되었다. 루이스 부뉴엘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영화와 삶을 설명한 책들은 많을 것으로 사료되지만, 이 책은 오로지 그의 회고로만 쓰였다. 


1983년 7월 29일 멕시코시티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이 책을 사망하기 전인 1982년에 발표하였다. 간격이 짧은 만큼 그의 전 생애를 각별하게 관찰할 수 있는 책이다.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학창 시절은 쥘 베른Jules Verne『그랜트 선장의 아이들Les Enfants Du Capitaine Grant』연극에 대한 황홀했던 기억으로 시작하여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관한 의심을 가졌던 것과 당시에 횡행했던 매춘행위를 시도했던 내용들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청년을 맞이한 그가 알베르티, 로르카, 달리와 같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이야기하는 건 그들의 작품을 체감하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일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1)에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 주인공이 당대의 예술가들과 얼굴을 대면할 때만큼이나 이 책에선 그를 스쳐 지나갔던 최고의 예술가, 감독들을 직, 간접적으로 마주하는 느낌을 준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찰리 채플린, 조셉 폰 스턴버그,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자크 페데르 등이 언급되는 건 시네필들에게 감개무량한 일이다. 


무엇보다 내가 부뉴엘이 살아있다면 질문하고 싶었던 점은 <안달루시아의 개>(1929)에 관한 것이었다.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던 그의 첫 번째 영화인 <안달루시아의 개>(1929)가 어떤 방식으로 촬영이 되었고, 제작 동기에 대한 구체적인 그의 코멘트를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나는 그를 인터뷰하러 외국이라도 갈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 부뉴엘 : 마지막 숨결에는 내가 원하는 내용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두 개의 꿈이 만나면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이 영화는 꿈의 이미지만을 형상화한 영화이다. 설명할 수 없는 아이디어와 이미지만을 수용하는 규칙을 통해 생성된 이 영화는 그의 초현실적인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 영화의 기묘함 때문에 정상적인 제작사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부뉴엘의 어머니의 지원을 통해 시작되었다는 지점에서 나는 그가 어떤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 야망보다 그가 언급하듯 초현실적 예술에 대한 일종의 호소 혹은 포효처럼 느껴진다.


아마 이 영화의 아이러니한 성공에는 인간의 무의식에 잠재하고 있는 일종의 균열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긴 모욕과 위협의 시작이었던 <안달루시아의 개>(1929)는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시발점이었다. 그는 취미로 여행을 해본 적이 없고, 알지 못할 나라들에 대해서 어떤 호기심도 느껴본 적이 없으며, 자신이 살았던 장소, 추억이 서린 장소에 계속해서 되돌아가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스페인 내전 등의 상황과 자신의 영화의 가치를 세상에 꺼내놓기 위해서 여러 나라를 방랑객으로 살았다. 그럼에도 마지막 숨결을 그가 내뱉을 때까지 그는 영화에 대한 열정을 늦추지 않았다. 이번 을유에서 출간된 <루이스 부뉴엘 : 마지막 숨결>은 그의 전 생애를 연결하는 초현실주의자의 삶과 영화를 동시에 포착할 수 있는 고백록(정성일 평론가의 추천의 글을 인용하자면)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아직 감상을 마치지 못한 그의 영화들을 다시금 찾아보고 싶어졌다. 그의 숨결은 국경을 넘어 그리고 의식을 넘어 나에게도 끝끝내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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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자들의 은밀한 매력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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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년도부터 영화 웹진에 기고자로 활동하면서 영화와 미술의 관계가 무엇인지 골똘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최근에 <미션임파서블 : 루벤>(2018)이란 애니메이션에서 나열되는 12개의 작품들은 기존에 정형화된 회화에서부터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들이 변형된 형태로 표현된 것을 감상하면서 예술의 기원과 의미의 문제를 고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먼저 나는 장 뤽 고다르가 즐겨 인용하는 앙드레 바쟁의 “원근법은 서구 회화”의 원죄라는 금언에서 그 관계의 실마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원근법은 오랜 시간 동안 서구 회화를 장악하고 있었던 코드였으며, 예술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사실’을 묘사할 뿐이었다. 

발터 벤야민 역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비슷한 지적을 했었다. 예술이 “제의”적 가치에서 “전시”적 가치로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은 분명 인식론적인 틀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칭할 수 있는 속성의 것이었다. 신적 가치를 수여받은 사람들의 전유물에서 일상적 세계로 내려온 예술이란 매개는 필시 그 계기란 존재하는 법이다. 그 중심에는 세계대전이 있었다. 이상과 관념을 ‘실존주의’와 ‘초현실주의’의 등장은 예술계의 지반을 뒤흔들어 놓았고, 예술은 ‘의미’와 ‘해석’의 문제로 진전되었다. 나는 책을 읽기 전에 초현실주의자들의 생애는 물론이고, 그들의 이름, 작품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다만 왜 그들이 전복적인 시도를 했는가에 대한 희미한 펼쳐진 동인들만 파악하고 있을 뿐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은밀한 매력>은 각각의 ‘작가’들의 생애와 작가의 성향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일목요연한 서술이 특징인 책이다. 일반적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들을 떠올릴 때 주로 피카소의 그림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의미를 파악할 수없이 조각 조각난 혼재된 ‘선’과 ‘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노라면 그들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미학의 문외인인 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초현실주의 작가를 한 대로 묶어 ‘피카소’의 큐비즘으로 치부하는 선입견들이 있다. 당장 르네 마그리트만 보더라도 그는 전통적인 기법으로 그림을 완성했지만, 그 안에 예술이란 부조리를 담아내는 불합리한 예술가적 기질이 있었다는 점들을 미뤄보아 다양한 부류의 작품이 작가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구현되고 있었음을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반항아 적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작품에선 동등했다. 

그들 중에 대다수는 초현실주의 공동체를 조직하여 협업을 하면서 예술의 지평들을 넓혀나가기도 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은밀한 매력>에서 가장 큰 별미는 화가들의 생애에 대한 묘사이다. 작품의 광기에서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초현실주의자들이 사람들과의 관계, 특히 이성 관계, 부부 관계에서 무너진 삶을 살았다. 예술계의 혁명을 주도했던 이들은 과연 세계를 변화시켰는가를 묻는다면 적확하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예술의 자율성을 개방했다는 지점에서 그들의 업적은 충만하게 내재하고 있다. 

이 책을 보며 루이스 부뉴엘과 살바도르 달리가 함께 작업한 <안달루시아의 개>(1928)를 유튜브에서 찾아보았다. 한없이 인간적이면서도 기묘하게 혼재된 이미지들은 의식 너머 무의식에 착상하는 영화의 또 다른 출현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은밀한 매력> 덕분에 나는 교양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예술을 보는 시각을 확장할 수 있었다.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렇게 유형의 예술과 무형의 의식을 창출했다.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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