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란 무엇인가
최갑종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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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를 말하는 자, 성화의 삶을 살지어다.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다보면 구원론의 입구이자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대한 교리라고 할수 있는 칭의에 대해 불신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은 “거래”에서 출발해서 조건적으로 인간 사이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의 표현인 칭의라는 개념이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들중에 무료로 롤스로이스나 람보르기니 같은 차를 준다고 했을 때 그것을 은혜로 받아 드릴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 할겁니다. 이게 무슨 신종 사기인가?라는 생각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겐 칭의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칭의를 받았다라는 믿음이 확실하다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최갑종 교수님이 쓰신 책인『칭의란 무엇인가』가 성경적인 적절한 해답과 최근 신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여러 관점들을 정리하고 살펴봄으로 칭의와 성화의 균형 잡힌 시각을 주리라 확신합니다.

일반적으로 칭의는 구원론적인 관점으로 개개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정적 선고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는 신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울에 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해있는지를 지칭하는 교회론적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또한 그들은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보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 이유인 즉슨 칭의가 신학과 윤리의 삶을 서로 분리시켜 복음을 윤리 없는 값싼 복음으로 전락시킨다는 점이 계속해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칭의는 어떨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적 정황은 어떻게 연결 되어 있을까요? 저자는 여기서 샌더스라는 새관점의 출발을 알리는 그를 소개합니다.

여기서 새 관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샌더스는 칭의를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선택과 은혜에 의해 주어진 그들의 특별한 신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p37)로써 전통적으로 우리가 받아 들이는 칭의교리를 수정하려는 시도를 거듭합니다. 이것의 배경은 유대교 문헌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이해가 등장했기 때문에 기존의 잘못된 유대교 이해를 따라 해석된 바울의 칭의 교리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라고 주장입니다. 또한 새관점을 주장하는 던이나 라이트도 의견 같이 하여 칭의 교리를 구약에서의 하나님께서 맺으신 율법의 언약들이 종말론적인 관점 아래에서 해석합니다. 물론 이 의견은 타당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언약은 종말을 향해 모든 사람들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함하여 언약하고 있음을 성경은 자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관점 주의자들은 언약백성으로써 자격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성화를 더 강조하는 경향성이 보입니다. 정통적으로 신학자들은 신명기 27:26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은 율법을 완벽하게 준수 할수 없으므로 인간은 무능력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주님의 은총을 구하게 된다라는 결론이 나오지만 그들은 바울 당대의 유대교의 가르침은 유대인인 바울 자신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거부를 합니다. 

더군다나 샌더스는 바울의 가르침을 수사학적(구원론적·기독론적)으로 판단하여 갈라디아서 3:10-11에서 말하는 율법의 완전한 순종에 대한 요구나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축복“을 말하는 선행 문단과 대조적으로 ”율법“→”저주“를 말하는 데 있다(p117)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관점은 칭의 교리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며 믿음의 행위를 언약백성으로써의 율법 준수에 힘을 쏟게 함으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할수도 있다는 위험성 마저 보입니다. 

율법은 의를 가져다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라고 말씀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의와 구원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경우는 저주를 자초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 성경의 구원관입니다. 더 들어가 바울은 인간이 율법 준수에 문제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믿음의 길처럼 과연 인간에게 의/구원에 이르는 길/수단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더 근원적인 문제로 나아가는 것임을 성경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칭의에 대한 논의가 정리된 우리는 성화를 어떻게 볼 것입니까? 성화는 주로 실천적인 문맥에서 사용되는 것을 볼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칭의와 성화를 비록 다른 각도나 문맥에서 사용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일종의 동의어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의 서신을 보게 되면 “거룩하게 하다”를 9번(롬 15:16; 거잔 1:2 6:11; 7:14, 14; 엡 5:26; 살전 5:23; 딤전 4:5; 딤후 2:21), 명사 “거룩함”을 8번 사용합니다. 어휘적인 용법을 살펴보게 되면 과거나 완료형 그리고 현제 시제로 사용이 됩니다. 성화도 칭의의 경우처럼 이미 이루어진 사건인 동시에 지금도 이루어지는 실제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p222). 디도서 3:4-7절을 보게 되면 구원의 행위를 삼중적으로 표현합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의롭다 하심”으로 표현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것이 칭의와 성화의 순서를 나타내고 있기 보다는 서로 동일한 의미로 구원의 실재를 표현이라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칭의와 성화를 계속해서 살펴보게 되면 칭의와 성화는 서로 분리 되어 있지만 구분되어지지 않음을 우리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할수 있으며 그것은 삼위로 계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아래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칭의란 무엇인가』이지만 구원론의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는 책입니다. 최근에 대두되어 지는 바울의 새관점을 주장하는 샌더스, 던, 라이트의 주장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있으며 그들의 교리의 심장부인 칭의와 성화를 정통적인 교리와의 차이점에 대해 잘 분석하고 있습니다. 구원론의 중심에 서 있는 칭의는 성화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잘 설명하고 한국 교회가 다시 한번 각성해야 할 칭의와 성화를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온전하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되었다라는 것에 대한 감격으로 삶을 살아 갈 때 칭의에 대한 감격과 마땅히 그 감격으로 사랑하는 이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동시적으로 나타나 신자들의 삶을 이끌어 간다는 사실을 조금만 더 이해한다면 이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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