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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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를 읽고


  ‘유다’는 아모스 오즈의 유작으로써 그가 그동안 삶을 통해 개진해왔던 사유를 개성이 강한 캐릭터들과 언급하기 민감할 수 있는 세계관안에서 자유롭게 펼친다. 제목이 바로 그런 점을 부각시키는데,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배신자’로 언급되어지는 ‘유다’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유다라는 이름은 저주의 대상, 혹은 경멸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사실 이 소설은 ‘배신자’유다가 아닌 색다른 가능성에 대해 제시해주는 것 같지만, 새삼 이런 사유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유다의 배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됨을 도운 인물로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즉 대속의 과정을 치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라는 주장이 존재했다. 소설안에서 전체적인 맥락은 이런 가능성을 지지하는 비중이 더욱 높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독특하고 흥미로운 지점은 ‘기독교’배경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배신하고, 심지어 팔아넘긴 유다라는 존재가 유대사회에서는 어떻게 비춰지는가 하는 점과 무엇보다 유대인인 저자가 말하는 ‘유다’는 누구인가라는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호하게 펼쳐진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정답’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라 ‘유다’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탐구’하고 ‘질문’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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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등장인물인 스물다섯 살의 슈무엘 이치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기를 좋아하고, 사회주의 제도 개혁을 논의하는 것을 사랑하는 학생이다. 또한 그는 인류애를 가진 박애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런 열정과는 별개로 천식 이 있어서 휴대용 호흡기를 늘 지니고 다녀야만 했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감성주의자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아르데나라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은 어울리지 않았다. 슈무엘은 그녀의 필요와는 관계없이 열렬한 강의를 했으며, 그녀는 그의 태도를 늘 비난했다. 결국에 아르데나는 전에 사귀던 남자 친구가 청혼하자 슈무엘과 이별하고 결혼하게 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부모님이 파산하면서 그는 자신의 논문주제인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라는 논문주제를 포기하고, 이사를 준비 하던 중에 운명처럼 카페테리아 계단 옆에 광고지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 광고지는 앞으로 만나게 될 주요인물인 아탈리야와 게르숌 발드과의 만남에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게르숌 발드라는 인물은 일흔살의 장애인으로 자신의 외아들인 미카를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에서 잃고 난 뒤에 자신의 며느리였던 아탈리야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발드는 슈무엘 이치와는 달리 보편적인 사랑을 믿지 않고, 세상의 회복 따위는 믿지 않는 인물이다. 그들은 계약에 따라 청자이자 화자로서 끊임없는 논쟁들을 통해서 서로의 간격을 점차 좁혀나간다. 매력적인 여인으로 묘사되는 아탈리야는 소설의 긴장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슈무엘 이치의 욕망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아탈리야는 불운한 가족사를 갖고 있는데, 특별히 아버지인 아브라바넬의 이야기가 그렇다. 흡사 그의 삶은 ‘유다’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다. 이는 시온주의를 배격한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배신자’라는 호칭을 받고, 비극적인 사건으로 삶을 마감한다. 그녀에겐 자신의 남편인 미카와 아버지 아브라바넬에 대한 죽음 때문에 더 이상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아탈리야는 그저 슈무엘 이치를 연민하고 동정하는, 아니 함께 생활하면서 만난 모든 남자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태도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시온주의(유대주의)를 지지했던 남편인 미카와 반대로 이스라엘의 건국을 반대했던 아브라바넬 사이에서 발생한 어쩌면 비극적인 일들을 관망하면서 발생한 감정들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소설에서 캐릭터가 갖고 있는 가장 큰 힘은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소설의 현장감과 생동감을 부여하며, 성경의 가룟 유다와 시대별로 ‘어쩔 수 없이’ 사랑을 위한 희생으로 여겨지는 또 다른 가룟 유다들과 대화들을 연결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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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탐독하면서 가장 놀라 웠던 것은 문체가 굉장히 정교하고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나는 아모스 오즈의 소설을 처음 접하였는데, 살면서 보았던 소설 중에 머릿속으로 구체적인 상황이 그림처럼 그려지는 작가로서 본받아야 할 최고의 소설 중에 하나가 되었다. 가령 소설에서 자세히 묘사 될 필요가 없어 보이는 그저 스쳐가는 주변인물도 허투루 표현하지 않는다. 매번 슈무엘 이치와 아탈리야가 마주치는 일상의 환경에서도 시간이 몇시 인지 그녀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표정이 어떤지 등등을 성실하게 묘사한다. 사실 이런 부분을 간과하여 대중들에게 불친절한 문체들이 현대문학에서는 종종 있는데, 그런 태도를 찾아볼 수 없는 책이다. 최근에 ‘벌새’를 보고 김보라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본 적이 있다. 한 관객이 ‘클리셰’를 피하는 방법에 대해서 물어보았는데, 그때 김보라의 감독의 선생님의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보편의 감정에 닿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유다’라는 책은 성경에 대해서 아예 알지 못하거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모른다면 독해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를 어느정도 반영하기 때문에 책을 읽기 전에 필요한 정보를 찾고 본다면 훨씬 더 넓은 시야로 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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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는 “나는 지도와 달력도 없는 것에 대해서는 탐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는 축적되어 있는 만남과 헤어짐이 무수하게 반복되어 생긴 담론의 장이다. 지도와 달력이란 명확한 도구가 없이는 이해의 시야는 한 없이 축소된다. 그것을 확대하는 방법은 미세한 정보이지만, 그것도 매순간 바뀔 가능성도 동시에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건이 어떤 인과관계에 의해서 점철되었는가 하는 질문과도 연관 되어 진다. 삶은 고정되어 있는가? 아닐지도 모르고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성경에 있는 ‘유다’만을 기억 할지 모른다. ‘배신자’ 유다 말이다. 반면에 예수를 얼마나 사랑 했을까에 대해선 기억하고 상상하지 않는다. 기억은 보통 권력의 부산물, 혹은 결과물로 치부되어질 때가 많다. 이러한 보편을 탈피해서 한번 소설이 말하는 지점으로 뚜벅 뚜벅 걸어 가보자. 배신자들의 광적인 사랑의 출처가 어디에 존재했는지. 그리고 ‘유다’의 사랑, 더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총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아모스 오즈가 ‘유다’를 통해서 유대인에게 제시하고 싶은 것을 이제야 알겠다.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인’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격정적이며 찬연한 빛의 순간들이었다는 사실을. 



추신)


 소설에 뒷부분쯤에 샤르트르나 카프카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의 책이 서재에 꽂혀진 부분들이나 카뮈를 두 번인가? 세 번 정도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저자가 사유하는 ‘실존’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더 나아가 소설에서 카뮈의 초상화가 존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대작인 ‘이방인’에서 프랑스인 주인공이 아랍인을 쏴 죽인 사건을 중점으로 펼쳐진다는 점은 반 유대주의적 사유가 팽배했던 당시 프랑스에서 발생했던 드레퓌스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 왠지 유대사회를 상징하는 것 같은 아브나바넬의 방에 카뮈가 존재하는 것은 굉장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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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unhi 2021-03-18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이 번역 되어 나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고, 오늘에야 새책 인쇄냄새가 배여있는 책이 왔습니다.
부자가 된듯합니다 다읽고 다음글을 올리겠습니다.

yeunhi 2021-03-18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이 번역 되어 나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고, 오늘에야 새책 인쇄냄새가 배여있는 책이 왔습니다.
부자가 된듯합니다 다읽고 다음글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