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와 유대인 선교
폴 모리스 지음, 김광남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살아있는 이스라엘, 살아가는 이스라엘”


“우리와 그들 사이 & 그들과 우리 사이”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과연 이스라엘은 어떠한 나라인가?

혹시 한국의 속담에서 생각하는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다의 의미”로 유대인을 취급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아니하였는가?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설교가 쏟아져 나오는 이 시대에 유대인은 단순히 구원 받은 이들을 돋보이게 하는 가쉽거리에 불과하지 않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과연 유대인과 이방인의 위치는 그렇게, 혹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만약 그러한 고찰사이에서 부딪혀야 할 관문들이 존재한다면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서 우리와 그들 사이, 그들과 우리 사이에서 고민해야 할 성경적 기준을 정리 정돈 해야 하는 것이 순서 일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대체되어야 하는거지?”

대체신학(replacement theology)이라는 용어는 오늘날의 유대인은 더 이상 약속이나 언약의 백성이 아니라는 견해에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 견해는 이스라엘을 기독교 교회로 대체해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어떤 의미도 갖고 있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문제는 성경에 수많은 구절들이 이스라엘의 백성의 고유한 역사적 위치에 대해 지목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그 구절은 대체라는 이름으로 대체 할수 없는 신학이며 성경이 암시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의미를 퇴색시킬 우려가 보인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먼저 맡게 할수 있는 특정한 권한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고, 그것은 신약을 연결하는 중요한 내러티브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체신학이란 용어를 효과적인 두가지의 대안을 제시한다. “배제(exclusion)신학” 그리고 “자랑(boastion)신학” 이다. 배제는 유대 백성의 지속적인 언약 신분을 견지하는 모든 이가 그것을 사용하면서도 서로를 비난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며 자랑은 바울이 사용했던 용어를 취해 이런 잘못된 생각에 대해 반대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 다루기 때문이다(p32).

이 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대체”라는 용어가 발산하고 있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지금도 살아있으며 살아가는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을 성경적, 사회적(환경적), 상황적, 선교적인 입장에서의 분석들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재 메시아닉 유대교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서 한 지체로써 한 소망으로써 부름 받은 교회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눈가에 흘린 두가지의 눈물”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은 긍휼의 눈물이자 평화의 눈물이였다. 이스라엘에게 예고된 구원의 메시아가 그들 앞에 있더라도 그들의 눈은 예수님을 응시하고 있지 않는것만 같았다. 칼빈(기독교 강요 2.7)이 말하듯 분명히 율법은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으며 그 율법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기까지 구원의 희망을 주려고 한 그 목적이 훼손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예수님의 눈물은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율법을 안다고 하는 사두개인, 열심당, 심지어 바리새인들조차도 그 영적인 의미를 분별하지 못했다. 그들 보시고 예수님께서 드러내셨던 표현은 “~했더라면”(if)과 “너조차도”라는 표현이다. 우린 상황윤리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윤리적 당위성을 유지하고 싶은 탐심이 존재한다. 그것은 상실의 문제로써 되풀이 할수 없는 문제에 대한 고립된 정체성을 유대인에게 부여한다. 되풀이 할수 없을뿐더러 그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 그들에게 예고 되어 있으므로 예수님은 안타까운 긍휼의 눈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것은 한결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히브리서 13:8). 


“그러므로 우리와(유대인) 우리는(이방인)”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들이 먼저 하나님과 화해할 때에만 서로 화목하게 된다(p255). 유대인과 이방인이 옛 언약의 생활 방식과 연합함으로써 그둘로부터 한 옛 사람(엡 2:15)이 만들어졌을 것이다(p260).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한 영”으로 인하여) 양자로 부름을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각자의 삶의 패턴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화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유대교 식으로 성장한 이가 선교사가 되어 순회 선교를 할 때 돼지고기가 나왔다면 그것을 쉽사리 먹을수가 없다. 문화적 배경 사이에서 바울의 원칙을 고려하는 것은 유대인 선교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인이다. 

또한 개종한 유대인이라고 해서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전통의 예배 방식들을 함께 고수해야 하는 것이 과연 옳은것인지 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골로새서 2:16-3:3에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어떤 종교적 의식이나 신비로운 통찰에 우월한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는 자들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은 그들이 추구하는 유대교적 의식에 대해서 존경의 표시를 하는 것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닮는”일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성경(고후 3:15-16)은 모세의 글(율법)을 수건이라 표현하고 주께로 간다면 그 수건이 벗겨진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수건은 진리를 밝히 들어내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써 존재할뿐이지 그 행위를 하는것에 진리가 담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 사이에 서 표명해야 한다. 사실 우리와(유대인) 우리는(이방인) 메시아닉 유대교와 개신교 사이에서 따로 분류 되어야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한 성령과 한 세례를 받은 그리고 한몸으로 연합된 공동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함으로 반드시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 그것이 궁극적인 유대인들에 대한 선교의 방향성이다. 사랑가운데 서로를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야 한다(엡 4:2-3).


앞으로 우리(이방인)와 우리(유대인)는?

최초에 하나님께서 언약백성으로 부름 받은 유대인에 대한 오해를 이방인은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유대인과의 관계를 끊고 이방인에게 집중하고 계시다는 편협한 생각을 바울은 지적했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이제는 자신들이 진정한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있다는 어떤 우월성에 사로잡혀서 유대인들을 구원에서 탈락한 존재로써 방관해버린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듯이 저도 이스라엘 사람이며 아브라함에 씨에서 낳고 베냐민 지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탈락시키지 않았습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방적이고 전적인 구원은 자신이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다. 예를 들어 아무리 기독교를 박해하는 김정은과 같은 위치에 서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불가항적으로 은혜를 베푸심으로 그를 구원하실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라는 존재가 다르지 않다라는 전제를 제시 한 다음에 그 다음 순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결론적으로 서로를 필요로 한다라는 것이다(p408).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었고, 이스라엘은 이방인이 받은 긍휼의 결과로 긍휼을 받는다고 한다(롬 11:31).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여전히 계획들을 갖고 계시는 것이다. 이방인으로써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들은 계속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게 바로 유대인에게 받은 “빚”과 같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언약백성으로 출생한 우리는 칼빈이 말하듯 율법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기까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희망을 소망케하려는 의도에서 작정되고 작성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먼저 맡고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 많은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방인으로써 빚과 같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방인은 그 긍휼로 나음을 얻었고, 아직 그 나음을 얻지 못한 그들에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복음의 필요성은 불가결해 보이는게 우리(이방인)와 우리(유대인)의 입장인 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선교의 역사의 현장 가운데 우리가 기필코 다뤄야 할 유대인의 선교는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있어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고, 우리라는 공동체로 연합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앞으로도 믿는 자로써 그들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 나라에 신랑과 신부로써 입장해야 할 같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로 바라볼뿐만 아니라 구약성서로 바라볼때도 유대인에겐 구원이 필요함으로 모든 성경 가운데 모든 선교의 현장 가운데 계신 그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찬양하며 그 깊으신 뜻에 흠뻑 매료되는 아주 귀한 경험을 책을 통해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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