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1~8 세트 - 전8권
김용 지음, 임홍빈 옮김 / 김영사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의천도룡기란?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는 중국에서 신필이라 칭하는 김용 작가의 무협 소설로, 우리나라, 중국은 물론 아시아권에서 팬층이 두텁다. 김용 작가의 <천룡팔부>는 무협소설임에도 이례적으로 중국 교과서에 수록되어 대대적으로 기사화됐다. 장르 소설의 입지를 뛰어넘어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국내엔 해적판본인 고려원 영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3부 중원의 별이 바로 의천도룡기다. 사조삼부곡 시리즈로 불리며, 사조영웅전, 신조협려의 뒤를 이어 마지막을 맺는 작품이다. 2000년 중후반에 김영사에서 정식으로 사조삼부곡을 출간하였다. 중화권 드라마로 많이 제작되었는데, 1986년 홍콩 tvb판이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주인공이 양조위였으며, 현재까지 뛰어난 연출로 입소문을 탄 작품이다. 알리바바 회장 마윈의 책장에 꽂혀 있다고 하니, 자기계발서 독자는 마윈의 애독책으로 들어봄직도 하다.




2. 내용




제목은 작중 절세 무기인 의천검과 도룡도에서 유래한다. 원나라 말엽, 무림에는 유명한 풍문이 떠돌았다. 의천검과 도룡도를 가진 자 무림을 평정하리라. 주인공 장무기는 무림 정파의 아버지, 사파 거두의 딸을 어머니로 독특한 내력을 지녔다. 이들 부부는 무림에서 악명 높은 금모사왕 사손과 함께 빙화도라는 섬에 불시착했고, 그와 의형제를 맺는다. 사손의 죽은 아들인 무기로 이름을 짓고, 사손을 의부로 모시도록 한다.



무림에선 사손의 행방에 촉각을 세운다. 바로 사손이 가진 도룡보도 때문이다. 장취산 부부가 무림으로 돌아오자, 명문정파를 비롯하여 너나 할 것 없이 도룡보도의 행방을 위해 그들을 압박하고, 부부는 자결한다. 장무기는 깊은 내상을 입고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기연을 만나 절세 무공을 익힌다. 의천검과 도룡도에 얽히고 섥힌 무림의 묵은 원한을 풀고, 원나라 조정에 대항한다. 그리고 영웅에겐 여자가 따르는 법. 각기 다른 매력과 신분을 가진 네 여인과 인연을 맺고 복잡한 애정관계에 시달리는 것도 이야기의 한 줄기를 차지한다.




3. 감상




1) 중화사상




주인공이 역경에 처하지만 절세 무공을 익히고 무림의 평화를 지키는 설정은 여타 무협지와 다르지 않다. 특징으로 지목되는 것 중의 하나가 중화사상이다. 의천검과 도룡도를 만든 인물은 시리즈 첫 작품인 <사조영웅전>의 주인공 곽정과 황용이다. 이들은 송나라 말 몽고의 침략에 맞서 양양성을 이십 여년간 지켰으며, 구국의 염원을 담아 절세 보검과 보도를 남겼다. 곽정의 이름부터가 '정강의 치' 중에 앞글자인 정을 따서 만들어졌다. 정강의 치란 북송 시절 두 황제인 흠종과 휘종이 금나라에 연행된 사건으로, 정강은 흠종의 연호였다. 이민족에게 당한 치욕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인 것이다.



그리고 의천검과 도룡도의 비밀은 뛰어난 무기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병법서와 절세 무공 비급의 행방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 병법서가 바로 <무목유서>다. 무목은 충절로 유명한 악비 장군의 시호로, 바로 그가 남긴 유서이자 병법서다. 악비는 당시 친금파 재상 진회의 간계로 죽음을 당하는데, 결국 의천검과 도룡도의 비밀은 병법과 절세 무공을 익혀 이민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를 되찾자는 염원이었다.



현재 중국에선 동북 공정 등 이민족 역사 포용하기가 활발하다. 고구려 역사까지 자국내 역사로 편입하려는 까닭에 왜곡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덩달아 충절의 화신 악비 장군의 평가도 절하되었다는데, 잊을 만하면 드라마로 각색되는 김용 작가의 사조삼부곡도 드문한 것을 보니 시류가 무섭긴 한가보다. 게다가 드라마도 원작보다 자체 편집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평가가 박하다. 미우나 고우나 <삼국지연의>에서 촉한정통론을 제외할 수가 없듯이, 사조삼부곡에서 중화사상을 도려내면 스토리에 어긋장이 나 버린다.



2) 양지



김용 작가의 무협지에는 다양한 무공이 나온다. 허투루 나온 것이 아니라, 도가와 불교, <주역>을 인용하여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다. 예컨대, 항룡십팔장에 첫 초식인 항룡유회는 <주역>에서 따왔고, 천룡팔부의 소요파는 <장자>의 소요유에서 인용하였다. 단순히 인용뿐 아니라 무공도 중국고전의 특색을 살렸다.



<의천도룡기>에 주인공 장무기가 익힌 구양신공(九陽神功), 태극권, 태극검, 건곤대나이는 모두 후발이승의 원리를 따른다. 선빵 중심주의가 아니라 적의 공격을 적절히 응용하여 제압한다. 왜 <의천도룡기>는 유독 후발이승의 절세 무공을 배치했을까.



답은 양지에서 찾고 싶다. 양지란 맹자와 양명학에서 나온 개념으로, 마음의 본체를 일컫는다. 성선설에 기반을 하니, 요약하자면 인간의 선한 본성이다. 대하사극 <정도전>에서 정도전이 유배지에서 만난 백성 여인에게 양지란 이름을 붙여준다. 기억은 가물하지만, 배움은 짧으나 선한 본성이 드러난다고 해서였던가, 아니면 타고난 본성을 지키며 살아가라는 교훈에서였던가 아무튼 그랬다.



장취산 부부는 금모사왕 사손과 함께 빙화도(氷火島)에 좌초되는데, 원래 금모사왕 사손은 선비의 기질이 있고 박학다식한 인사였으나, 사부로 모신 성곤에게 일가를 몰살당하는 바람에 복수의 화신으로 변했다. 무림에서 살인을 하고 다니며 원수의 이름을 벽에다 새겼으니, 결국 악인으로 찍혔다.



게다가 복수심과 무공을 익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초기 주화입마 상태에 빠졌는데, 그런 사손이 미쳐돌아가던 와중에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양지가 발동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장무기가 태어나고 울음을 터뜨리자 양지가 발동한다. 장성한 장무기도 마찬가지다. 괴팍한 신의에게 의술을 배워서 명의의 경지에 오르고, 절세 무공을 익힌 뒤에도 부모를 자살하게 만든 무림인사들에게 복수를 하기보다 얽히고 섥힌 원한을 하나씩 풀어간다.  때로는 행보가 답답하지만, 훗날 사파인 명교 교주가 되어 교인을 교화하고, 무림인사들을 규합하는 과정은 바로 사람이 선한 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인지 <의천도룡기>의 절세 무공은 먼저 사람을 헤치기보다 상대의 힘을 이용하고 융화하는 것에 초첨을 둔다. 명교 교주가 대대로 전수한 무공인 건곤대나이는 이런 원리를 따르고 있으나,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무공인지라 은연중에 사악함이 드러난다. 소설 말미에 소림사에 갇힌 의부 사손을 되찾기 위해 소림 신승들과 맞서는 장면에서, 장무기가 건곤대나이로 맞서서 마음에 악심이 생긴 것을 간파한 사손이 불경을 외운다. 바로 양지를 되찾으라는 뜻이다. 여기서도 중화사상이 드러난다. 페르시아 무공은 한마디로 사이비(似而非)인 것이다.



반면에, <소호강호>의 무공은 선발이승이다. 우리나라에선 임청화 주연의 <동방불패>로 잘 알려져 있다. 작품은 누가 선빵을 빨리 날리는가, 누가 쾌속 검법으로 상대의 초식을 파훼하는가 싸움이다. 무공은 크게 독고구검 대 규화보전의 대결이다. 주인공 화산파 영호충은 독고구검을 익히는데, 무엇보다 무초승유초, 무형의 초식으로 유형의 초식을 격파하는 것이 관건이다. 정파, 사파의 굴레에 맹목적으로 얽메여서 인간의 본래 가치를 도외시하거나, 명예욕의 화신이 되어 자신과 주변인들을 무참하게 해치는 이율배반 행태에 대한 반발심리가 강하다. 독고구검의 적수는 규화보전인데, 명나라 환관이 저술한 무공 비급이다. 이를 연마하려면 먼저 거세를 해야 한다. 권력과 명예에 눈이 먼 무림인사들은 규화보전의 행방에 촉각을 세우고, 칼부림과 살육이 벌어진다. 정파도 예외일 수가 없다. 군자검이라 칭송받던 화산파 장문인 악불군은 무림맹주가 되기 위해 규화보전의 파생검법을 손에 넣고, 결국 거세까지 한다. 위선의 극치다.



무초승유초는 허례허식과 위선, 명예심에 맞서서, 자유와 인간 본성을 향한 검법이다. 그래서 선발 중심이고 시원한 쾌속이 중요하다. 자유롭게, 혹은 빠르고 매섭게 세상의 위선과 모순을 찔러야 한다. 반면, <의천도룡기>에서 장무기는 후발이승의 원리, 상대의 힘을 융화하고 반탄시키는 무공을 주로 활용한다. 태극권과 태극검은 마음과 의지에 몸이 따라간다. 마음이 중요하고, 마음의 본체는 양지에 있다. 그래서 선빵이 아니라 상대의 힘을 제어하는 데 중점을 두게 된다. 이처럼 김용 작가의 무협지는 작품의 주제에 맞게 무공을 설정하고, 문파나 작중 배경의 특색에 맞는 무공이 나온다.     



4. <의천도룡기> 주제는 양지다.



<의천도룡기>의 핵심 주제는 양지다. 중화주의, 주인공이 초야로 떠나는 결말은 김용 소설의 단골 레퍼토리다. 장무기 부모가 좌초된 곳이 빙화도인데, 풀이하자면 얼음과 불의 섬이다. 겉으로는 빙산인 듯 하지만, 섬 안에는 화산이 있어서 초목과 짐승이 자란다. 그 섬에서 의부 사손이 미쳐가던 와중에 생명의 탄생을 접하고 양지를 찾는다는 구절이 나온다. 또한 장무기가 먼저 접곡의선 호청우를 만나 의술을 배우는 과정이나, 그가 쓴 후발이승 원리의 무공들, 복수보다 치유와 화해의 행보를 보여준다. 장무기를 만난 사파 명교의 무리와 무림인사들은 장무기에게 감화되어 선심이 발동한다. 물론 끝까지 악당도 있고, 장무기가 마음이 선하여 우유부단한 행보를 보이는 탓에 당하는 내용도 있지만, 결국 장무기는 타고난 착한 본성을 외면하지 않는다.



왜 갑자기 <의천도룡기>가 떠올랐을까. 작금의 현실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갈수록 사회적 신뢰가 하락하고 있다. 신뢰는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고,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선 이러한 성숙한 문화 자본이 필요하다는 주장엔 이론이 없다. 그러나 형벌은 사기, 기만에 관하여 얼마나 관대한가. 일단 잇속을 위해서 챙기고 보자는 심보를 조장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개인적 문제로 중개업자를 만났는데, 책임을 안 지려고 헛소리와 아무말 대잔치 향연을 벌이는 게 장기인 인간이었다. 한동안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던 <개소리에 대하여>란 책을 주문했다. 시국으로 가자면 최근 국정농단이 그렇다. 당사자들은 자기가 얼마나 천인공노한 짓을 한지를 깨닫지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는다. 변호인단의 변론도 마치 아무말 대잔치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일까. 드라마 <정도전>과 <의천도룡기>를 다시 보고 있다. 마음이 진정되었다. 먼 곳을 바라보지 않으면 발 밑에 근심이 쌓인다고 하였던가. 우선 나부터 울화를 다스리고 양지를 되찾아야지 싶다. 다만 무협지 주인공은 절세 무공을 익혔는데, 과연 나에겐 무엇이 있어 의지처를 삼을까. <숫다니파타>의 구절처럼 스스로 의지처를 삼아야겠지만, 헛헛한 마음이 자꾸 앞을 가로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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