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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평점 :
1분에 250명의 아기가 이 지구상에 새로이 태어나는데, 그중 197명이 이른바 제3세계라 불리는 122개 나라에서 태어난단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가 곧 이런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에 묻히는 운명을 맞는 거야. / 프랑스의 철학자 레지 드브레는 이들을 가리켜 "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힌 아이들"이라고 표현했어.(,p.79~80)
기아와 관련된 언론 매체의 기사, 프로그램을 보면서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론 안도했다. 굶주림은 아프리카 등 일부 빈민국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막연한 동정심에 기부를 하며 안도를 했다. 적어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기 전까지 만성적인 기아가 이렇게 전세계에 만연한 문제였고, 희생자 수가 심각한지 깨닫지 못했다.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 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에 1명꼴이다. 그리고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 기아에 희생당하는 사람이 2000년 이후 1,200만 명이나 증가한 것이다.(p.32)
10여 년이 지난 일이니 많이 개선되었을까. 만성 영양실조 인구가 "2015년 유엔 기아보고서에 의하면 기아 인구는 7억 9,500만 명으로 다소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세계 식량수급의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1990년에 8억 2,200만 명이었던 수치가 2005년에 도리어 증가했던 전례를 볼 때, 이러한 수치는 유동적일 뿐이라는 절망적인 추정을 하게 만든다.
식량 생산량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다. 이미 세계 식량생산량은 이미 1984년 기준 120억 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 자급력이 충분했다. 2015년 세계 인구가 73억 명이니 식량은 넉넉하다. 19세기 토마스 멜서스의 '자연도태' 관점으로 죄책감을 씻을 명분이 없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는 이러한 구조적 부조리를 파헤쳤고, 장기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이번에 최근의 자료와 수치들을 업데이트하여 개정증보판이 발행되었다.
책은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십년 가까이 근무한 저자 장 지글러가 아들 카림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철저하게 자녀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른도 알지 못했던 전세계 사회구조적인 문제들이 드러난다. 특히 제3세계 빈곤과 기아가 단순히 그들의 무능력이나 나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반문했을 것이다. 왜 전세계적으로 식량은 남아도는데 몇 억 인구가 굶주릴까. 많은 구호단체들이 꾸준히 활동하지만 기아가 없어지지 않을까. 선진국들이 빈곤 국가에 지원과 기부를 하는데도 해결되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이러한 질문들이 얼마나 순진했던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각종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구호단체들의 활동이 제약되고 심지어 구호물품이 독재자들과 군벌들의 뱃속을 채우는 현실, 그럼에도 한 명의 아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구호활동을 멈출 수 없는 딜레마. 예산과 물자가 부족해 눈 앞에 죽어가는 아이들의 구호 요청을 선별하고 돌려보내야 하는 사정이 절절했다.
기아를 유발하는 선진국들의 이면에 경악했다. 인도적 얼굴을 하고 빈곤국에 각종 기부와 지원을 하는 반면, 한편으론 구조적인 기아를 고착화시켰다. 농산물 보조금을 통해 덤핑 가격으로 제3세계에 수출하여 빈곤국의 식량 자립을 막아버리고, 육류와 식물 연료 생산에 사용되는 막대한 곡물량은 기아를 해소하는 데 일조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심지어 경제적 종속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정치적 개입까지 서슴지 않았다. 예컨대, 칠레 인민전선의 아옌대, 부르키나파소의 상카라 제3세계 혁명적 지도자들은 자국의 빈곤과 기아에 맞서 싸웠지만, 다국적 기업과 미국, 프랑스 등 강대국들의 정치, 경제 논리에 무참히 스러져갔다. 책은 안타까운 그들의 혁명사까지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도 단순히 빈곤국들이 문제 해결 의지가 없다고 단언하며 비난할 수 있을까. 결국 강대국은 인도적 가면을 쓰고 자국의 이익을 앞세웠던 것이다.
무엇보다 식량을 일종의 투자 대상으로 보는 금융과두제, 신자유주의적 행태가 화근이었다. 시카고 거래소에서 식량 투기가 이루어지고, 빈곤국들은 울며겨자먹기로 가격에 따른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안에는 최소한 도덕적 공감력이 전제되어 있었지만, 금융자본이 조장한 식량 경매 가격은 일말의 온정조차 담지하지 않는다. 또한 네슬레를 비롯한 다국적 식품 기업들은 이미 선진국도 함부로 규제하기 힘든 거대 공룡들이다. 거래소의 투기 세력과 다국적 기업의 이익 앞에서 제3세계 국가들의 무력함은 기아로 나타난다.
몇 달러치의 항생제와 영양분 부족으로 빈곤국 아이들이 시력을 잃고 굶어 죽는 이면에는 구조적인 부조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단순히 먼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도 불과 몇 십년 전까지 만성적 기아와 빈곤을 겪었고, 현재 북한 인구 대다수가 시달리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기조에 대한 반성이 일었다. 단순히 경제적 인식에서 벗어나 금융과두제가 양산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각성하는 것은 어떨까. 특히 기아와 관련해서 말이다. 이제는 막연한 동정이 아닌 구체적 현실을 직시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학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기아 문제를 얇은 한 권의 책이 일깨워주고 있다. 그 힘이 놀라울 따름이다. 계속 개정판이 발매되길 바란다. 바뀐 수치들을 확인하며 기아 문제가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한 눈에 알수 있도록, 나아가 끊임없이 문제를 환기할 수 있도록 말이다.
1분에 250명의 아기가 이 지구상에 새로이 태어나는데, 그중 197명이 이른바 제3세계라 불리는 122개 나라에서 태어난단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가 곧 이런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에 묻히는 운명을 맞는 거야. 프랑스의 철학자 레지 드브레는 이들을 가리켜 "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힌 아이들"이라고 표현했어.(,p.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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