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 아닌 선택
디오도어 루빈 지음, 안정효 옮김 / 나무생각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인간은 모순적이다. 행복을 갈망하지만, 반면에 자기증오와 파괴성이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 상당수 신경증과 정신질환은 살기 위한 원초적 방편이자 몸부림이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삶의 의욕을 꺾어버리고 자살 같은 극단적인 선택의 동인으로 작용한다. 마치 활로를 찾아서 필사적으로 헤매었으나 깨어보니 가시밭길 지옥도를 걷고 있었다고나 할까.


<절망이 아닌 선택>은 자기증오와 관용을 다룬다. 자기증오는 단순히 지나치게 높은 기준과 잣대로 자기를 재단하거나, 스스로를 비난하고 평가절하하는 의식적인 행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조소, 고통스러운 기억 되씹기, 자해, 자살과 같이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영역뿐 아니라, 우울증, 불면증, 완벽주의, 우유부단함, 죄의식 등 알게 모르게 삶 전반에 영향을 주는 상태들을 포함한다. 나아가 자아와 현실 인식을 왜곡하는 환상, 기대, 권태 등도 자기 증오의 양상들이다.


반면에 관용이란, "실질적인 자아의 이익을 도모하는 모든 생각과, 느낌과, 기분과, 통찰과, 행동이다.""자기증오에 대한 하나뿐인 해독제이며, 신경증적인 절망이 아닌 인간의 유일한 선택이요 특권이다."(p. 205) 이는 자기합리화 같은 방어기제나, 혹은 나르시즘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현실의 자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곡하는 자기증오이고, 관용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자기이해능력을 키우는 과정이다.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치료 효과를 내는 요소는 관용이다. 건설적인 성장과 인간의 창조적인 가능성으로서 그것이 지닌 잠재력은 거의 무한하다. / 인간에게 치료 효과를 저해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자기증오다. 파괴적인 가능성으로서 그것이 지닌 잠재력은 거의 무한하다. /오늘날까지 이러한 양단성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을 배출해낸 문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정신적 구조가 지닌 분열성은 보편적인 현상이다.(p.18)


인간 내면에서 자기증오와 관용의 역학구도가 형성되어 있는데, 자기증오의 시작은 인격 대부분이 형성되는 성장기, 특히 부모와의 관계에서 주로 만들어진다. 정상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하면서 아이의 욕구와 감정을 존중해줄 때 아이에게 올바른 자기조정능력이 생기지만, 문제는 세상 모든 부모가 자녀들의 인격과 감정, 욕구를 존중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외려 육아를 분재하듯 다루는 부모들이 있다. 자신의 욕망과 기대를 자식에게 과도하게 주입시키고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강요한다. 그러한 환경에서 부모의 과도한 기대와 억압에 비례해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가혹한 잣대로 스스로를 심판하고, 자기증오의 굴레에서 평생을 고생하게 된다. 지나치게 관대한 태도, 방임 또한 부모가 육아를 회피하는 행동의 일환으로, 아이에게 자기증오를 심어주게 된다. 부모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무의식적 선택이 오히려 자기증오와 절망의 길로 자신을 내몰았을 것이다.

참된 시각, 참된 선택, 관용의 선택은 예상되는 반발로부터 해방되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 분위기 소게서 이루어진다. 나의 여러 가지 감정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 결론에 이른 다음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을 거치는 선택, 진지한 선택의행위는 관련된 문제가 무엇이거나 간에 지극히 중요하다.(p.283~284) 


아마도 <절망이 아닌 선택>을 읽는 독자들은 심리학에 조예와 관심이 있거나, 신경증과 같은 심리적 문제에 개선 의지를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조건들은 항상 이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부족하고 비루한 나 자신을 인정하는 데서 건설적인 성장이 시작될 것이다. 책을 통해 알게 모르게 나를 지배하고 괴롭혔던 자기증오의 절망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용의 길, 내가 진정 원하는 참된 '선택'의 길로 나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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