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2013년 나오미 왓츠 주연의 영화 <투 마더스> 가 화제였다. 서로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 두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탓에 막장 소재로 논란을 일으켰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기사를 읽고 많은 관객들이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 원작 소설가 도리스 레싱은 단골 술집에서 만난 호주 청년에게 인생담을 직접 전해 들은 후 깊은 감명을 받아 영화의 원작인 <그랜드마더스>를 집필했다고 한다.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로, 해당 작품이 영화화되었음에도 당시엔 마땅한 번역본이 없었다. 이번에 <그랜드마더스>를 포함한 중, 단편 4 작품이 번역 출간되었다.

 

 

 

 

 

 

<그랜드마더스>는 햇살이 아름다운 해안가가 배경이다,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고 잔잔한 바닷물결이 일렁이는 소도시. 릴리즈(릴)과 로잔느(로즈)는 어렸을 적부터 레즈비언으로 오해를 받을만큼 영혼의 단짝이었다, 두 여성은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했고, 이후에도 이웃에 거주하며 릴은 이안을, 로즈는 톰, 각각 외동아들을 낳았다.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래서 더욱 운명공동체처럼 서로의 아들까지 보살펴주며 가족처럼 살아간다. 아들들은 마치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비요른같은 미소년들로 성장했다. 하지만 엄마 친구라기엔 릴과 로즈는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친구 아들이라기엔 이안과 톰은 너무나 도발적이었다. 이안은 로즈에게 모정 이상의 연정을 품고 로즈와 이안은 서로 모호해진 경계 사이에서 사랑을 싹틔운다. 톰도 어느새 릴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소설은 서로의 아들과 관계 맺는 금단의 사랑을 선정적이고 외설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절제되면서도 시적인 묘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장성한 두 소년의 아름다움, 이제 이게 순탄치 않는 문제였다.  열 여섯이나 열일곱 무렵에 잠깐 시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시기가 있긴 하다. 그럴 때는 젊은 신과 같다.....두 여자는 일어나 앉아 서로를 쳐다보며 놀라운 심정을 나눴다. "어쩜 세상에!" 로즈가 말했다. "그러게."릴이 맞장구를 쳤다. "우리가 만들었어. 우리가 저 아이들을 만들었다고." 로즈가 말했다. "우리가 아니면 누구겠어?" 릴이 말했다. (p.33)


 

 

어쩌면 넷의 사랑은 인간의 근원적인 판타지를 담고 있다. 근친 관계, 모정과 연정의 경계 속에서 사회적 금기를 넘나드는 애틋한 감정, 젊음의 혈기에 대한 동경과 만족감 등 그들의 관계는 남녀의 드러낼 순 없지만 오래 전부터 내려온 판타지 자체였다. 반면에 그 속에는 금기를 넘는 행위에 대한 죄책감, 장성하는 아들들 사이에서 문득 늙음을 꺠닫는 릴과 로즈의 안타까운 심경, 아들들이 정상적인 사회 관계를 맺길 바라는 모성이 공존했다. 사랑은 딜레마의 연속이었다. 그들의 특수한 관계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시선과 갈등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랜드마더스>는 에로스에 집중하기보다 매혹과 금기를 넘나드는 특이한 상황을 전제로, 인물들의 판타지와 쾌락, 내면의 갈등과 좌절을 담았다.

 

 

작품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 가(家)>도 독특했다. 런던 도심의 하층민 흑인 소녀 이야기다. 흑인 소녀 빅토리아가 어떻게 중상층 백인가정 스테이브니가의 사생아를 가지게 되고, 그 아이가 스테이브니 가의 일원이 되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그 담담한 속에는 똑똑하고 선량한 하층민 흑인 여성이 사회 체제 속에서  겪는 편견과 고통이 담겨 있다. 그녀에게 사회란 어떤 곳이며 결국 중산층 백인 청년의 사생아를 낳게 된 과정까지,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나 하층민 흑인 여성이 사회에서 겪어야만 했던 편견과 부조리, 그리고 인한 슬픔을 조명한다. 빅토리아는 딸 메리가 백인 중상층 사회에 편입되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론 걱정한다. 엄마가 소속된 흑인 사회와 아빠의 백인 중상층 사회 사이에서 딸이 겪을 정체성 갈등을 말이다.


 

 

가상의 고대 도시의 흥망성쇠를 다룬 <그것의 이유>, 또다른 찬사를 받은 <러브차일드>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었다. 특히 <러브차일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으로 징집된 청년이 영국령 케이프타운에서 유부녀와 나눈 사흘 간의 사랑을 평생 잊지 못해서 일생 자신의 사생아를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았다. 짧은 사랑을 잊지 못하는 모습은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연상케 했다. 한편으론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복잡한 감정을 묘사한다. 청년은 첫 사랑을, 청년의 아내는 첫 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관계 설정이 애잔함을 더한다.


 

 

<그랜드마더스>.를 통해 도리스 레싱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혹자는 선정적이고 외설적으로 느껴질만큼 작품 설정과 소재가 독특했다. 실제로 영화 <투 마더스>는 국내 흥행 성적이 썩 좋지 못했다. 개봉 전부터 소재 논란이 있었고, 홍보도 논란에 편승하여 자극적이지 않았냐는 비판이 많았다. 하지만 원작을 읽고 나니 작가가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이유를 짐작할 것 같다. 특이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갈등과 번민을 따라가다보면, 사랑에 대한 근원적 판타지, 현실적 금기를 넘어서는 행위에 대한 불안과 좌절감이 다가온다. 뭔가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공허감이나 갑작스레 터지는 감정선을 묘사한 장면은 여러 번 되읽게 만들 정도였다. 특이한 관계와 설정 속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과 갈등을 끌어낸다. 무엇보다 절제되고 담담한 문체가 이 신기한 스토리에 매력을 더한다. 작가의 다른 인생작인 <황금 노트>와 <다섯째 아이>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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