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밤바 - 1915 유가시마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나지윤 옮김 / 학고재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시로밤바>의 저자 이노우에 야스시를 처음 접한 계기는 신영복 교수의 <담론>을 통해서였다. 책에선 이노우에 작가의 <공자>를 중점적으로 다뤘지만, 일본의 국민 작가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까지 올랐는데도 우리나라 독자에게 생소한 점이 가장 신기했다. 우리나라 서점가에서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인기를 끌고, 웬만한 작가들의 이름은 대체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이노우에 야스시는 1907년 훗가이도 태생으로, 군의관 아버지의 사정상 가족과 떨어져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고교 시절부터 문학에 심취한 그는, 일본의 국민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었다. <시로밤바:1915 유가시마> 는 작가의 유년기 추억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로, 1962년에 발표되어 일본의 국민적 베스트셀러로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되었다.(작품 소개) 


소설은 시골의 온천 도시인 유가시마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소학교(초등학교) 소년 고사쿠의 성장기이다. 사실 고사쿠는 할머니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기묘한 사이인데, 할머니의 손에 맡겨진 내막은 다음과 같다. 할머니는 기생 출신으로 고사쿠의 증조외할아버지의 첩이었다. 증조외할아버지는 임종 전 할머니의 미래를 염려하여 손녀 나나에, 고사쿠의 어머니를 할머니의 딸로 입적시켰고, 나나에는 집안 사정으로 인해 맏아들을 양어머니에게 의탁한다. 할머니에게 고사쿠는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본가에 대항할 방패막이이자, 쓸쓸한 노년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보물이었다. 고사쿠도 자기를 살뜰히 보살피는 할머니 덕분에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처지가 가히 나쁘지 않았다.


피붙이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끈끈한 가족 사이가 된 할머니와 고사쿠. 소설은 20세기 초 유가시마를 배경으로 한 일본의 전통 풍속과 축제, 분위기 - 가도마쓰, 모치쓰키 등- 를 생생하게 표현한다. 비록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낯설지만, 작품을 읽는 동안 만화 검정고무신을 보는 듯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고사쿠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느끼는 여러가지 감정과 동경들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하였다. 누이 같은 이모 사키코에 대한 사춘기적 동경, 사키코가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하자 고사쿠가 갑자기 공부에 열중한다든지, 또래들을 불러모아 그들만의 장례를 치룬다는지 하는 장면들은, 고사쿠의 감정을 무던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리고 애잔하게 그렸다. 사키코가 떠나고 고사쿠는 관청 소장의 한살 연상의 딸 아키코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며 본격적으로 사춘기를 겪게 된다. 아키코에게 "가슴이 쿵쾅거리며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웅얼거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나서, "그날 밤 고사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춘기 감정을 경험했다. 그것은 바로 후회였다....." (p.364~365) 라고 소회한다든지, 후회, 수치심, 비겁함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때로는 아키코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린 것을 스스로 깨닫는 고사쿠의 심리 변화에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하루하루 늙어가는 할머니에 대한 양가 감정이 세밀하게 묘사되어서 인상적이었다. 작품의 말미에 할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고사쿠의 심정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고향을 떠나는 고사쿠. "유년기를 보낸 정든 고향을 떠나는 날이라 감상에 젖은 까닭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고사쿠가 이제 쓸쓸한 것을 쓸쓸하다고 느끼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p.466)으로 마무리한다. 20세기 초 당시의 시대상과 소년의 성장기를 서정적이고 품격 있게 그린 작품. 성장소설의 묘미는 주인공의 이야기와 심리 전개를 따라가면서, 독자가 공감하고 나아가 성장을 공유한 듯한 애착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시로밤바>를 통해 깨닫는다.

 

 

소설의 제목인 '시로밤바'는 '백발의 할머니'란 뜻의 솜뭉치 모양을 한 곤충이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지만 어둠이 내리면 나타나는 '시로밤바'를 아이들은 이리저리 쫒아다닌다. 읽는 내내 작가의 솜뭉치 같은 유년기 추억을 이리저리 쫒아다닌 기분이다. 작품의 성공에 힘입어, 후속작인 <여름 풀과 겨울 물결>, <북쪽 바다>를 잇달아 발표하여 '성장소설 3부작'이 완성되었을 만큼 일본에서 인정받고 있다.(p.467)  위의 두 작품이 하루 빨리 국내에 소개되어 고사쿠의 뒷이야기를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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