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두 번 숨다 탐 철학 소설 19
황희숙 지음 / 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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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비트겐슈타인의 케임브리지 귀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 신이 도착했소."버트란트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을 알게 된 것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적 모험 가운데 하나였다"고 소회했다. 『비트겐슈타인, 두번 숨다』는 현대 철학의 큰 획을 그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동시대의 지성들도 찬탄했던 그의 삶을 그린 철학소설이다.

  1930년대 후반, 미국 유학 중인 신여성 지효는 무작정 친구 '반 다인'과 함께 시대의 지성 비트겐슈타인을 찾아 영국으로 떠난다. 비트겐슈타인의 행적을 추적한 내용, 그와의 만남과 사상에 관한 지적 여정을 청갈색 노트에 기록했다. 시간은 흘러 지효의 외손자인 중학교 2학년 상우의 가족은, 어느날 외가 서재에서 지효의 유품 청갈색 노트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춘천 외가로 향한다. 상우의 가족은 노트를 읽으면서 지효의 여정과 비트겐슈타인에 대하여 알아가게 된다.


  지효는 집안에서 법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길 바랐으나, 마음은 철학에 있었다. 무작정 비트겐슈타인을 찾기 위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러셀을 만난 후,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지도를 해석해서 오스트리아를 경유하여 노르웨이 오두막에 은둔해 있던 비트겐슈타인을 만난다. 1937년 그는 '철학적 탐구'를 저술하고 있었다. 철학자와의 만남 이후로도, 비트겐슈타인을 알기 위한 탐구를 지효는 청갈색 노트에 기록해 나간다. 친구의 이름이 미국의 추리소설가와 같은 '반 다인'이었듯, 지효의 여정은 마치 추리소설을 방불케 했다.


  21세기를 사는 상우는 지효의 노트를 읽으며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빠져든다. 지적 감수성의 자극제이자, 세상을 보는 스펙트럼으로 다가왔다.  '철학이 유리병 속에 갖힌 파리에게 출구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는 지론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명제에 마음이 끌린다.


  외할머니의 노트는 마치 새로 받은 클래식 기타 악보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타 소리를 들으려면 일단 시작해야 하고,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는 새 곡을 만났을 때 기타를 천천히 치면서 악보를 한 장 한 장 넘기듯이, 외할머니의 노트를 읽어 가기로 했다. p.31

 지효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사상적 여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그의 전기 작품인 『 논리-철학 논고』,  후기 작품인 『철학적 탐구』, 임종 전까지 집필했던 『확실성에 관하여』의 탐구였다. 아마도 그녀의 청갈색 노트의 의미는,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 교수로 재직 당시, 제자들에게 기록하게 했던 '청색책', '갈색책'의 지효식 추리버전이 아니었을까.

  비트겐슈타인은 전기 철학에서, 언어의 그림이론을 바탕으로 모든 철학의 문제는 언어의 논리를 오해했기 때문에 발생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그러나 지효를 만났을 때의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그의 전기 사상에 오류를 발견하고 고치고 있었다. 그는 『논리-철학논고』의 서문에서 본질적인 점에서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밝힐 정도로 자신만만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인류학적 관점에서 '삶의 양식'을 통해 새롭게 조망하기 시작했다. '말놀이', '가족유사성' 의 개념을 활용한다. 대화 상대방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과 그러한 유사성으로 인해 언어의 오용이 생기는데, 여기서 무의미한 철학적 문제들이 파생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시간이란 무엇인가, 수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들은 언어의 수수께끼에서 발생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기 하루 전까지 집필했던 『확실성에 관해서』는 동일하게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다르다는 것을 밝히려고 했다. 토끼 - 오리 그림, 여성 -노파의 그림처럼.


  도시를 안내하는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그는 유명한 장소로 직접 끌고 가는 안내원이 아니었다. 가장자리로 또 도심으로 이리저리 종단, 횡단하게 사람을 끌고 다님으로써 결국 시내를 완전히 알게 하는 그런 이상한 안내원과 같았다. p.160

   지효는 비트겐슈타인의 삶을 보면서, '그에게 가장 엄격한 심판관은 종교적 신이 아니라, 양심, 즉 그 자신의 가슴 안에 사는 신'이었다고 말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최전선에서의 군복무, 포로수용소에서 논리- 철학 논고를 탈고한 일, 초등학교 교사에서 자신의 철학적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일, 막대한 유산 상속의 포기. 그리고 은둔, 2차 세계대전 당시 케임브리지 교수에서 병원의 약국 배달원으로의 전직. 자신의 철학을 과감히 수정한 것과 의식을 잃기 하루 전까지 집필에 몰두했던 집념.이 모든 것들이 그의 양심의 궤적이었다.


 그에게 가장 엄격한 심판관은 종교적 신이 아니라, 양심, 즉 그 자신의 가슴 안에 사는 신'이었다. p.160

  상우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소통이었다. 깐깐한 교육열을 가진 엄마에게 단절감을 느꼈다. 상우는 가족유사성의 개념을 통해 가족에게서 서로가 동일하진 않지만 비슷한 면모를 발견하게 되고, 말게임은 가족 간의 단절감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로 다른 규칙과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대화하는 사이, 틈이 벌어졌던 것이다. 상우의 가족은 지효의 청갈색 노트를 함께 읽으면서 비트겐슈타인이란 공통화두가 생겼다. 결국 엄마는 상우를 이해하게 되고, 상우는 지효의 마지막 결론을 마음 속 깊이 새긴다. 미국 유학생 상우의 누나 수우는 상우에게 외할머니의 영문 저서를 저술한 사실을 알려준다. 정치철학서, 여행사진집. 결국 지효도 집안의 기대와 달리 스스로 철학전공을 선택했고, 훌륭히 해냈던 것이다. 


  나도 비트겐슈타인처럼 마지막 순간에는, 멋진 삶을 살았노라고 말하고 싶다. 비트겐슈타인은 천재로서 그의 의무를 다했다. 나, 상우는 평범한 중학생이지만 내 의무를 찾아내서 다 해내고 싶다. 내 가슴 안에 있는 신, 나의 양심이 보기에도 흡족하도록." p.174

   매력적인 신여성 지효. 지효가 무작정 추리소설처럼 추척하고 소통한 대철학자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철학에 대한 요점들, 양심의 궤적. 청갈색 노트를 통해 세대를 넘어 지효와 비트겐슈타인을 만났던 상우. 그리고 상우의 삶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삶이 가지는 함의. 다만 책의 분량이 이들의 매력을 담아내기에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많은 형이상학적인 철학의 난제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시각은 인상 깊다. 언어의 오용으로 인한 수수께끼로서 해결할 수 없는 질문들. 철학은 이러한 유리병에서 벗어나 명료한 사고를 갖게 하는 활동이라는 것. 단지 철학의 문제뿐만 아니라, 논리적 오류와 말장난이 난무하는 시대, 상우의 가족처럼 소통이 부족한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한번쯤 비트겐슈타인처럼 내 가슴 안의 신, 양심에 따라 엄밀한 태도로 세상을 분석해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의 유언처럼 멋진 삶을 살았노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에게 전해주게.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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