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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룡팔부 1~10 세트 - 전10권
김용 지음, 이정원 옮김 / 김영사 / 2020년 5월
평점 :
김영사에서 신수판 정식완역본 《천룡팔부》가 출간되었다. 신수판은 故 김용 작가가 2005년 최종 개정한 판본을 정확하게 번역했다는 뜻이고, 정식완역본은 그동안 해적판이나 암암리에 번역했던 작품을 정식 판권을 계약하여 완역한 것을 말한다. 해적판에서 출판사, 번역가가 임의로 고친 부분, 개정판 일부만 반영한 판본과 달리 온전히 완역한 번역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제목인 《천룡팔부》는 불교의 팔부신중(八部神衆)을 말한다.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 다른 신적 존재 혹은 불법에 감화된 악신들이었으나 결국 자신들의 신력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호법신으로 포섭되었다. 그중 으뜸인 천신, 용을 비롯한 야차, 건달바, 아수라, 긴나라, 마후라가,가루라를 일컫는다. 소설은 이 여덟 신장의 특징들을 작품 속 인물들에 투사하여 불교적 주제를 부각시킨다.
《천룡팔부》는 작가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작품이다. 특유의 불교적 주제뿐 아니라 다양한 중국 역사, 철학, 기예 등을 담고 있는 덕분이다. 작품은 중국 북송 시대(北宋, 960년 ~ 1127년)를 배경으로 주인공 소봉, 단예, 허죽 세 인물을 내세워 요, 서하, 토번, 대리, 여진족 사이 벌어진 역사적 갈등과 인문철학을 버무려 무협 장르를 대하역사소설로 승화시켰다. 일각에선 중화권 문화를 가르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한다. 작품에 담긴 역사, 문화적 소양이 깊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 읽는 데 부담이 없어서다.
작품은 대중성과 함께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무협 소설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어 위대한 문학 작품으로서, 반지의 제왕이라는 기념비적 작품을 남긴 톨킨을 빗대어 고 김용 작가에게 중국의 톨킨, 신필이란 수식어를 부여하였다. 작가를 연구하는 김학(金學)이란 학문이 정식으로 개설되었다. 한동안 중국 교과서에 처음으로 무협 소설이 수록돼 우리나라 뉴스에도 비중있게 다뤄졌는데, 바로 당시 작품이 《천룡팔부》였다.
이번 김영사판 《천룡팔부》는 중국어 전공자이자 다수의 중화 드라마, 영화를 번역한 이정원 번역가가 번역을 했다. 2018년 하반기에 나온 전정은 번역가의 《소오강호》가 독자에게 호평을 받아 부담이 될 만도 했고, 무엇보다 쉽지 않은 대작을 맡아서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독자평, 여러 후기, 무협 카페 등에선 칭찬 일색이다. 매끄럽게 읽히면서 필요한 한자 단어는 억지로 한글화하지 않되 작가가 일일이 주를 달았다. 마니아층은 물론이고 김용 소설 입문자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김영사의 사조삼부곡, 《소오강호》처럼 세트에 해설 소책자가 동봉돼 있다.
솔직히 리뷰를 남기는 이 시각, 10권 모두를 독파하진 못했고 중반부를 넘어섰다. 흥미로운 스토리와 매끄러운 번역 덕분에 가독성이 좋아서 술술 읽힌다. 반면에 예전 해적판을 읽을 때보다 인물의 묘사가 더욱 눈에 들어오고, 인물들의 은원관계나 업보, 그것을 풀어나가며 겪는 고뇌와 시련이 한층 잘 느껴지고, 작품 속 불교를 비롯한 동양적 세계관과 철학, 문화가 그려진 부분에선 두 번, 세 번 눈이 가고 되새기며 읽고 있다. 그냥 넘기기엔 아까워 일부로 속독을 피하는 중이다.
우리나라에서 《천룡팔부》가 신수판 정식완역본으로 출간된 점에 출판사 관계자, 번역가에게 다시금 감사드린다. 여러 번 드라마, 영화로 리메이크된 작품이라 대중에게 익숙하고, 무협 마니아에겐 필독서임에도 정식완역본이 없었다. 옛 고려원 《영웅문》 시리즈가 7백만 부나 팔린 베스트셀러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해적판 독자의 수가 적지 않다. 이번에 작품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또한 작가는 생전에 당신 작품을 여러 번 고쳐쓰기로 유명했는데, 신수판을 통해 작가가 마지막으로 어떻게 개정했는지 그 궤적을 따라가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일반 독자는 대중성을 가진 무협 장르 소설로 읽어도 되고, 특히 동양권, 중화 문화권, 역사에 관심 많은 독자는 재미 너머 작품성에 감탄하리라 예상한다.
P.S 고 김용 작가가 쓴 또다른 명작 《녹정기》가 김영사에서 정식완역본 발매를 앞두고 있다고 한다. 청나라 강희제 치세와 반청복명 세력 간의 갈등, 그 사이에서 주인공 위소보가 미천한 출신임에도 뛰어난 잔머리와 신적인 말빨로 일세를 풍미하는 이야기다. 주인공과 스토리가 기존 무협, 작가의 작품과 상당한 차이가 있어 화제가 되었지만 이 또한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독자에겐 즐거운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