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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를 잡자 - 제4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푸른도서관 18
임태희 지음 / 푸른책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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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까지는 책을 잡으면 곧바로 중심을 향해 파고 들었지 작가나 출판사에 관심 갖지 않았었다.

요샌 달라졌다. 아니 작품이 좋으면 여러번 작가의 이름을 보고,

작가의 약력을 꼼꼼히 살피고

마지막으로 출판사를 본다. 고맙다고




쥐를 잡자 푸른 문학상 수상 작품집이다.

그냥 구상하고 있었던 소재와 맞아 떨어져서 사서 보았는데 그런 상을 탄 청소년 소설이다

그리고

나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아팠다.

열일곱 소녀가 감내한 생명의 무게에 대해

충분히 걸러내고

써낸 소설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안타까웠다

그건 한계에 대한 것이다




순전한 여자들의 이야기로만 귀착된 지점에 대한 것이다

속상했고

그건 아직도 이 사회의 대세임에 틀림없다고

나혼자 묻고 답하고 말았다.




이 소설은 청소년 문고의 수준을 한단계 높인 소설인 듯하다

문체도 그렇고

비유를 사용한 지점도 그렇고

적당한 호흡을 통한 생략과 응축

그 기법이 탁월했다




그러면서 느꼈던건 작가가 그만큼 많이 앓았을 거라는 것이다

그렇게 앓으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건 내가 작가가 되고 싶은 지점에서 상상해보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 고통은 작가이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것이지만 또한 작가이기에 굴레이기도 한 지점이다




어쨌든




쥐를 잡자는 열일곱 소녀가 가진 아기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낙태를 하고 혼자서 물속에 스스로를 가두고만 안타까운 이야기다




그건 청소년 성문제에 대한 이야기지만

도덕에 대한 이야기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일뿐이다. 현실이 빠진 일상이 빠진 이상화된 이야기

그래서 현실성이 떨어진 고통만 극대화된 하지만 소설은 그 고통을 극대화 할 수 있어서

장점을 가진 장르다.

그럼에도 그 장점이 사회의 선입견과 함께 갔을 땐




사회의 편견에 고스란히 실려갈 땐




소설은 아이를 가진 소녀의 고통을 고통스럽게 따라간다. 집요하고 끔찍스럽게

하지만 그나이에 아이를 가진 소녀는 그렇게 혼자 끔찍스러워 해선 안된다

나눠 가질 줄 알아야 한다. 그건 사회가 진 책임의 무게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분위기로만 몇마디 말로만 연출하고만 작가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게 된다.




내가 다니는 학원 뒤엔 아파트를 짓겠다고, 다랑이 논들과 밭들을 모두 매우고 주변에 높게 담장을 둘러놓았다.

따뜻한 도시 속 시골 풍경은 오솔길이 있고, 논둑길이 있었던 풍경은 순식간에 높은 담장에 먹혀버렸다.

그리고,....




근처 남자 고등학생들의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

사방 시야가 다 가려져 버리는 높은 담장안 그 음습한 어둠을 이용한

욕망을 억눌린 섣부른 아이들이 있었다. 다섯건의 성폭행 사건이 있었지만

그 사건은 그 폭행을 저지른 녀석들이 잡히고,

잡혀서 경찰의 취조를 받는 와중에 다섯건의 성폭행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섯건의 성폭행 피해자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초등생과 중학생들이라 했다




그들이 고통을 꼭꼭 누르고 나름으로 해소하면서 살아갈까 아니면

끝없이 자신을 찌르며 아파하며 살아갈까

그네들의 끔찍한 하루하루가 안타깝다.




[쥐를 잡자]는 소설엔 아이를 가진 여자 아이만 나온다

그것을 지켜보는 미혼모 엄마가 나오고

또 그것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던 할머니가 나온다

그리고,

제자의 임신을

육감으로 알아채는 담임선생이 나온다

나와서

지켜본다 섣불리 아이의 고통을 재단하지 않으려 몹시도 조심했던 선생님의 마음이 나온다

어른들은 그렇게 아이들을 무서워 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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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 갈등이다.

작가는 갈등이 무언지 아는 사람같다. 그래서 쉽게 읽히고

오래된 신화를 읽듯이 술술 읽어낸다.

그러면서도 자꾸 묻게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모두 여자임에도

어느 하나 진정 여성성을 이상적으로 구현하는 인물은 없다는 사실

모두 여성성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모성이라는 관념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왜 그랬을까.

못난이 여인이 자신의 딸을 미워하고 심지어는 눈을 찌르기까지 하고

걱정을 몹시도 사랑했던 여인 금복이 정작

걱정의 모습을 그대로 지닌 채 태어난 춘희를 방치하는 까닭까지도

쌍둥이 여인도 써커스단에서 창녀로 몸을 바꾸다보니

정상적인 사랑을 나누어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한다.

등장하는 여인들 모두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는다.

금복이 그렇게 많은 사내들과 통정을 하였음에도 다시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싶을만큼

독특한 모습과 힘으로 어머니 대지를 닮은 춘희도 아기를 낳지만,

엄혹한 현실 앞에 아기를 묻고 만다.

눈이 내리고, 음식이 없어 눈내린 산야를 떠도는 춘희

아이는 열이 오른다. 그 아기를 살리려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미개한 여인 춘희는

아기를 감당하지 못한다.

솔직히 알맹이를 추구하는 책읽기를 하는 나로서는

실망스런 책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여인의 이야기를 쓰면서

이렇게 남성적으로 써도 되느냐고,

바야흐로 폭력을 예언하고 있는건 아닌가하고

불안해 하면서 책을 읽어야 하는 건 또 무언지 묻게된다.

더불어 참으로 문학상을 받을만한 작품인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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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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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 장편소설. 문학동네




우리 근현대사는 부끄러운 가족과 같아서 챙겨서 보둠어 안으려 할수록 고통은 생생히 살아온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 곳곳에 생생하게 얼굴을 들이미는 현대사의 질곡들은 아직은 진행형이기 때문에 어떤 평가나 진단도 불허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정정도의 왜곡과 과장을 섞을 수밖에 없는 소설에서 현대사를 다룰 때 그것은 한켠엔 불신을 담을 수 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에이 아닌데 그렇지 않았는데 하면서 보는 소설의 맛이 그리 좋을 수만은 없는 법이다. 그래서 세대를 아우르는 소설이란 쓰여지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런 이유로 작가들이 오래된 역사물에 매달리는 지도 모른다. 옛날 역사란 어차피 상상하는 순간 허구일 수밖에 없고, 사건의 진실성을 따져 묻기 전에 얼마나 그 시대를 생생히 담았으며 잘 모르는 시대의 세세한 부분에 대한 상상력만 잘 다독여 자극시켜 준다면 따라 읽으면서 흥미진진하고, 더불어 지금 시대와 적당히 겹치는 사유를 하면서 수긍과 부정도 허구와 실재만큼이나 적당히 해내면서 좋다 싫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법이다.

현대사에 적당한 상상력을 가미해 환상적으로 처리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현실에서 발을 떼게 되었을 때 이미 현대사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꺼려하는 읽는 자의 심리와 교묘하게 섞여 들어가면서 현실이라는 일상이라는 자신의 삶의 양태에 대해 눈을 감게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아직 판타지나 추리소설 또는 팩션 어느 곳도 도드라지게 자신의 자리를 굳히며 자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문학은 종언’을 받아들이는 듯이 보이고, 우리소설이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일본 소설에 내주고 있다는 것은 우리 문학을 두 번 죽이는 것은 아닌가? 대중의 사랑 없이도 문학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한 가지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못한다. 광범위한 접근을 좋아하고, 어떤 분야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보다는 만능으로 잘 해내는 사람이 인기가 많은 것처럼. 문학도 그런 모습을 갖추길 바라는 건 아닌지, 삶의 총체성을 다 담아내서 재밌었으면 하는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 역사 드라마를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산에 들어가 나무 하나하나를 보기보다는 먼 곳에서 산 전체를 관망하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사람들과, 산에 들어가 나무의 생김새에 더 집착하는 일본 사람들의 관심이 달라서 ... 그래서 문학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달랐던 것은 아닌가 하고 .. 근데 그런 우리들의 삶이 파편화되고 개인화 되면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일본 소설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뿐인 상상을 하면서 나 나름의 우리문학의 방향을 그려보고 상상해 보았을 뿐이다.



첫 문장에 부끄럽고 고통스러우며 합리보다는 비이성이 지배했고, 사랑이라는 일상이라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 갖기 전에 먼저 힘의 논리에 폭력의 논리의 군사문화에 길들여졌던 우리네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우리의 무의식을 잠식하고 놓아주지 않고 있지만, 우린 자유로운 듯이 상상만 자유로이 달리고 있는 듯하다.




어릴 적 우스개에 세상에서 가장 날씬한 일본 사람은? 비사이로 막가.  40년이 넘는 일제 식민지를 거치고, 미소의 분할 통치를 거쳐 남북간의 전쟁을 치르고, 냉전 속에서 한마디로 사람들 험한 꼴 많이 보고 살았다. 군부독재가 종식된 것이 불과 10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부와 그들이 만들어낸 정치는 여전히 기득권을 유지한 채 생생히 살아 있다. 독재가 만든 기득권과, 군사문화가 만든 폭력의 야만이 리더쉽을 발휘할 때 어떤 고통을 치뤘으며 어떻게 힘겨웠는지는 딱 잊어버리고, 다시 그들을 선택하는 국민들의 표는 한심하다기 보다는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에 관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상대가 너무 힘이 세면 적당히 거기에 착 달라붙어 기생이라도 하는 게 나은 건 아닌가 하고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닌가. 끔찍한 폭력의 비를 억수로 맞고 살아온 우리네 근현대사에서 내게 폭력은 적당히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다. 나 같은 소시민이 겪은 폭력이란 그야말로 저 엄혹한 시대상황에서도 지나놓고 보니 그런대로 견딜만한 것이었고, 옷이 살짝 젖는 폭력을 겪기는 했지만, 거기에 매몰될 정도는 아니었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그래서 나는 날씬하지 않은 몸으로 비사이로 막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시대의 폭력이나 폭거가 결코 나와 멀지 않고,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는 이 땅에서, 특히나 중국처럼 거대하지도, 일본처럼 꿋꿋하지도 못했던 이 나라에서, 끔찍했던 시대를 거쳐 오는 일이 비를 피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던 것인데도, 나는 교묘하게 비사이로 막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쉽게 망각하고 있는 것인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으면서 나는 책에 딸려온 얇은 책에 등장하는 한나 아렌트의 인터뷰를 함께 기억한다. 폭력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남녀가 달랐다는 내용. 남자들이 말하는 게슈타포나 여자들이 말하는 게슈타포가 달랐다는.. 남자들은 한결같이 적에 대해 자신들을 끔찍하게 다루었던 그들에게 어떤 인간적인 교감에 대한 여지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고, 잔인하게 적과 아를 가르고 들었다는 것과, 여자들은 ‘그를 카페와 같은 곳에서 만났다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알고 봤더니 이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서로 몸을 비벼대며 한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의 온기가 필요한지 깨닫게 된 것뿐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다음부터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마녀의 오랜 저주에서 풀려난 것처럼 저마다 자신만의 입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        책 88쪽




이야기에 관심 갖는 행위가 무엇인가, 상대의 이야기에 관심 갖는 순간 폭력이나 힘의 논리는 무력해지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적인 접근 적과 아를 가르는 남성적인 접근보다는 여성적인 접근이 평화에 더 가깝다. 작가가 그것을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든..




‘우리의 공통점은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을 열심히 읽었던 까닭도 거기에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인간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인간적인 경제학과 철학과 정치학을 아직까지 나는 알지 못한다.’ 책 91쪽




폭력이 선연했던 시대를 여성의 시각으로 보고 인간적인 접근을 하다보면 폭력에 대한 기억은 쉽게 잊혀지고, 쉽게 용서하게 될 수도 있다. 여성들은 그런 면에서는 아주 비현실적이면서도 자식을 키우고 일상을 견뎌내고 극복하는 데서는 아주 현실적이다. 그래서 쉽게 눈 앞의 이익에 치중하게 될 지도 모른다.




'폭력이 몸에 밴 사람은 폭력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하지 못함’이 그가 속한 세계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그런 세계에서는 제아무리 비폭력을 주장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그들의 몸은 폭력보다 비폭력을 더 불편해 한다. ‘ 102쪽




작가가 저렇게 그리고 있는 68년. 그 폭력의 한가운데를 사람들은 살았다. 그런 묻힌 폭력이 극단적으로 들어난 것이 80년 광주의 참사고, 군사 독재는 불과 끝난 지 10년도 되지 않았다. 아직 우리는 비폭력에 불편해 하는 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긴 어둠은 빛이 주는 순간적인 착시에 의해 잊혀지고 말았던 것인지.




폭력의 반대말은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한나 아렌트는 말한 바 있다. 권력이 훼손될 때, 그러니까 권력이 다른 곳으로 이양될 때, 폭력은 일어난다. 권력 유지에 안간힘을 쓰는 정권 아래에서 폭력이 빈번한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런 정권은 대리 감시자들에게 그 불안한 권력을 나눠주는 것으로 권력 유지의 한 방편을 삼는다. ................중략......... 할아버지가 살아낸 한국 현대사에서 권력은 늘 어디론가 이양중이거나 이양될 조짐을 보였고, 그러므로 폭력은 제나 ‘지금 여기’의 일이었다.   104쪽




그리고 비사이로 막간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그 누구라도 그 어느 곳에서든 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죽음보다도 더 우연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해 많은 학생들이 스스로, 혹은 타인에 의해 생명을 잃었다. 학생들이 죽어갈 때마다 사람들은 그건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떠들어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누구보다도 큰 목소리로 손을 흔들어가며 외쳤다. 누구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ㅈ구은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필연적인 결과에 비하면 내가 살아남은 건 너무나 우연에 가까웠다. 그 죽음이 필연이라고 떠들어대면 떠들어댈수록 내 삶은 점점 더 우연에 가까워졌다. ’121-122쪽




내가 대학에 들어갔던 그해 5월 언론화 되지 못한 2학년 선배의 죽음이 있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시위 현장에서 잡혀 얼마간 감방에 들어갔던 경험이 있었고, 동아리 생활을 했던 이였다. 철길에서 외상도 별로 없이 발견된 죽음의 사인은 자살이었다. 그는 형사들에게 쁘락치가 되라는 강요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기찻길에 뛰어든 자살. 그런데 경찰은 별 수사도 하지 않았고, 쉽게 사건을 마무리 지었고, 우린 그를 묻었고, 지금은 오랜 이야기가 되었다. 내가 들어갔던 그해에도 그 전해에도 몇 건의 분신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몇 명의 쁘락치를 보았다. 그들이 쁘락치인 줄도 모르고 그들과 이야기를 했고, 대학가 교정에 앉아 점심을 함께 했고, 간혹 낯술을 마시러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야 들었다. 유난히 붙임성을 좋았던 그는 쁘락치였다고... 쁘락치 이길용의 인생을 받아들이고, 그를 한 인간으로 그리면서 동정심을 유발 시키는 듯한 작가의 서술에 깊은 공감을 하면서도 마음 깊이로는 그들이 끔찍하다. 도처에 널려 있었던 저런 눈들을 피해 왔으니 폭력의 비를 피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직접적인 폭력의 피해자들이 자신의 아픔을 다독이고, 열등의식으로 피해의식으로 무장하며 마음속에 이를 득득 갈고 있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나는 나의 일상을 평화와 명예와 부를 위해 기꺼이 바치겠다고, 마음먹고 가능한 불편을 감수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대한 아무런 고민도 없이, 진정 살만한 세상에 대한 아무런 기대없이 무감하게, 눈 앞의 것에 연연하면서... 오로지 돈만을 떠받들면서.. 하중이 약한 건물 위에 앉아 늘 불안을 먹고 살면서도, 당장의 사치에 눈멀어...




하지만 그날의 산책길에서 나는 그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유쾌한 사람인지를 알게 됐다. 다시 말하자면 연민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존재였다. 그의 삶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불행으로 가득했고, 그 대부분의 불행은 폭력적인 체제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그가 그 무엇에도 훼손되지 않는 행복을 발견하게 된 것은 놀라운 반전이었다. 그것은 정민의 삼촌이, 어쩌면 나의 할아버지가 한편생 꿈꿨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행복은 결코 환각이 아니었다. 315쪽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는 옛말을 곧잘 하고는 한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게 되면 사람이란 것이 쉽게 그 이야기에 공명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는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지만, 적끼리 만나 속내를 털어내 이야기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이랜드 사업주가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를 만나러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그 속을 툭 터놓는 이야기라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말이다. 그럼에도 이랜드 직원 어느 분은 생각할 것이다. 그를 카페에서 만난다면, 그를 편하게 만난다면 그도 일개 인간에 불과한 것인데... 허점투성이. 아무것도 아닌 알몸이고, 아침이면 똥을 누고, 배고프면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양 사람들의 일자리를 자르고, 도도하게 앉아서 얼굴한 번 들이밀지 않은 그의 저의는 분명히 그 비정규직 노동자와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에 있는 것이며, 엄청나게 많은 돈을 교회에 헌금하면서 스스로 신의 자식이고, 선택받은 자라 너희들과 나는 분명히 다르다고... 자신이 회사를 인수합병하는 것은 그만큼 신도들을 늘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식들을 많이 늘리는 것이라 당당히 말하는 ....  그가 대화의 장에 나서지 않고, 상대를 무시하듯이, 당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해 보인다.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 내릴 수 없는 이들의 심정이 어떨 것인지... 그 심중을 헤아리는 일이 어려울 뿐, 얼굴 한 번 내미는 일도, 자신의 이야기는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간증일 뿐이며 자신의 성공 신화일 뿐, 속내를 다 드러내고, 인간다워지는 지점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뿐이라고...




현대사를 그리는 소설을 읽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와 우리 현대사의 부끄러운 부분이 고스란히 가슴에 담겨 현대사를 곧은 눈으로 보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와, 그 현대사를 드리운 폭력에 대해 정면으로 다루는 듯이 보이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들을 해보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탓에 당연한 귀결이라는 듯이 나는 ‘비정규직’에 대한 이야기를 막판에 늘어 놓고 말았다. 세련된 언어로 우리 현대사 그려내는 거리가 만들어지지 않은 탓이다. 그러고 보면 ‘해변의 카프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리는 소설 속 공간은 얼마나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인지.. 현실과의 일정한 거리감이란 그런 가상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거리감이 아름다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건 아닌가.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닌가. 그럼에도 김연수라는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우리 현대사의 내면풍경은 마주보고 사색해봐야 하는 우리네 무의식의 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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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숲이 있다 - 마오우쑤 사막에 나무를 심은 여자 인위쩐 이야기
이미애 지음 / 서해문집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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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가자

인간을 치유할 것이 과연 무엇인가

더는 그만 두자 점령하는 짓. 그렇게 세상을 온통 생명 없는 땅으로 만들었으니 충분하다

더는 그만 두자. 파괴하는 짓.

스무살의 처녀가 꿈꾸던 모래 무지 속의 꿈.

그 꿈의 숭고한 사명과 아름다움에 대해

사막에 꽃을 심겠다 나서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개나리 환하게 오르고

벗꽃이 흐드러지는 봄날의 꽃잔치를 구경하러 나가는 발걸음이 황사에게 저당잡히면서도

중금속 섞엔 그 바람이 왜 그리 먼 곳에서부터  불어오는 지에 대해

생각하고 반성하기 전에 그냥 나들이를 취소하고,

아파트에 스스로를 가두는 인간들이

어찌 모래 바람에 등을 돌리며, 풀씨를 뿌리는 여인의 삶을 알겠는가?

그녀의 정성에 털끝만큼이라도 공감하겠는가?

모래 먼지 속을 걷는 천사는 얼굴에 모래가 긁은 차국 투성이다

모래 펄펄 날리는 맨 땅에 손가락 굵기의 나무를 심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정성을 보태는 그녀의 숭고한 노력이

숲이 되어 돌아오던 순간의 놀라움은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단 3시간이면, 그 세계에 들어갔다 나온다. 입 속에 코 속에.. 아니 땀구멍에 빈틈없이 엉겨드는

모래를 뱉어내지 않고도.. 체험할 수 있는

놀랍고 놀라운 인내의 세계에 이룸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어 행복했다.

백양나무 30그루와.. 마오우쑤사막과. 우리나라 황해도 땅에서 불과 얼마떨어지지 않은 커얼친사막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30그루중에 겨우 살아난 몇을 향한 그녀의 정성이 온전히

희망이 되어 돌아오는 감동에 눈을 적실 수 있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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