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자신의 불행을 타인의 행복 탓으로 돌리는 한 인간의 손에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고 사랑했던 가족을 잃었습니다. 할멈은 죽고, 엄마는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외롭거나 슬프거나 무섭지 않았습니다.

<아몬드>의 작중 화자인 윤재는 알렉시티미아로, 감정 표현 불능증입니다. 이런 증례의 사람이 있다는 건 책에서나 인터넷 어디선가 몇 번 보아 알고 있었지만,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처음입니다. 하긴 이내 잊어버릴 텐데 이름을 알게 된 것이 무슨 소용일까요. 알렉시티미아는 후천적이거나 선천적인 이유로 편도체가 작거나 축소되어 감정을 제대로 느끼거나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증상인데요. 희로애락의 표현 때문에 겪는 불편함과 이질감 - 은 상대가 느끼는 것이지만, 본인에게서 가장 위험한 건 '공포'를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포란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중요한 감정으로 두려움이 제거된 상태라는 건 무방비하게 위험에 노출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눈앞에서 할멈과 엄마가 묻지 마 폭행을 겪는 순간에도 말입니다. 그래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식당의 유리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으니까요. 죽음의 공포와 생존의 본능보다는 엄마와 할멈을 구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몰랐을 뿐이지.

엄마는 윤재에게 아몬드를 많이 먹였습니다. 편도체를 닮은 아몬드를 많이 먹으면 좋아질 수도 있다는 희망에, 사랑과 두려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아이로 자라나길 소망하는 마음에 아몬드를 주었습니다. 아몬드나 호두 같은 견과류를 꾸준히 먹어 왔지만 결국 뇌가 쪼그라드는 파킨슨 증후군을 앓고 있는 한 노인을 알고 있기에 과연 그런 게 소용 있을까 싶지만, 한때 아이의 아토피를 치료해보겠다고 이런저런 것들을 발라주며 괴로움에서 벗어나길 바랐던 저이기에 윤재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임신 중에 했던 몇 번의 흡연 같은 좋지 않은 행동 때문에 윤재가 이렇게 된 것 같아 마음 아파했던 것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할멈과 엄마는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감정을 익히게 해주었습니다. 비록 사건이 나던 날까지 감정을 살리는 데는 실패했지만요. 
엄마를 병원에 두고 할멈의 장례를 치르던 날에도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아동 센터에 가는 대신 자립을 선택한 윤재는 엄마의 헌책방을 운영하며 학교에 다닙니다. 건물주이자 빵집 주인인 심 박사는 윤재의 멘토가 되어 줍니다. 각자 가진 아픔의 크기는 다르지만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윤재가 안타깝습니다. 윤재는 전학생 곤을 만납니다.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니트로글리세린 같은 아이 곤은 윤재와 너무나 달랐습니다. 아니, 너무나 닮았습니다.

윤재와 곤은 '표현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윤재는 자신을 포함한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없어 그랬고, 곤은 넘쳐나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런 두 아이가 만났습니다.



나는 그런 결말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치 이 세상에 정해진 답은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꼭 정해진 대응을 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다르니까, 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반응'도 누군가에겐 정답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의 부엌 -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서
류지현 지음 / 낮은산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몇 년간 의문을 가졌음에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유통 시스템이 무척 좋아진 현대에 냉장고는 왜 점점 커질까 하는 것인데요. 문 밖에 나가면 마트 건 편의점이건 돈만 있으면 손쉽게 식료품을 구할 수 있으므로 그 옛날처럼 저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어째서 가정마다 900L 짜리 (혹은 그 이상)의 냉장고가 필요한 걸까요. 심지어 김치냉장고는 따로 두고요.

전기냉장고는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에 조금씩 보급되다 80년대쯤 이르러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냉장고 없던 시절을 겪었던 어른들께 냉장고의 필요성을 여쭤보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저희 엄마조차 업소용 초대형, 대형, 중형에다가 화장품 재료를 보관할 소형(이라지만 300L는 됨직한) 냉장고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단 두 식구뿐인데 말이에요. 참, 김치냉장고도 보통의 것과 김치통 4개가 들어가는 작은 것해서 두 대나 있었어요. 이사하면서 냉장고를 줄여서 대형과 소형, 그리고 보통의 김치냉장고 한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참고로 식량을 마구 퍼가는 딸이 있거나 한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얻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비단 저희 엄마뿐만 아니라 노인들이 오히려 냉장고를 맹신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3~4년 묵은 명절 떡도 괜찮다 할 정도로요. 
냉장고가 커져서 그런지 마트에서 파는 식료품의 포장 단위도 커졌습니다. 아니, 포장단위가 크니까 냉장고가 커진 건가요? 곰곰이 과거를 되짚어보지만 이 역시 쉬이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예전엔 식사 준비 전 정육점이나 재래시장에 가서 돼지고기 반근을 사다가 찌개를 끓여먹기도 했는데, 지금은 조금 눈치가 보입니다. 그래서 다른 고기도 조금 더 사거나 필요량 보다 더 많이 사게 되죠. 돼지고기를 1 Kg, 2 Kg, 심지어는 5~6 Kg 단위로 구매해 가정에서 소분하여 냉장, 냉동 보관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척에 마트도 정육점도 전통시장도 있는데 말이에요.

<사람의 부엌>의 류지현은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습니다. 
냉장고 없던 시절, 식재료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염장법이니 당장법같이 소금이나 설탕을 이용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건조하고 수분을 이용하는 등 자연의 은혜를 그대로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책에서의 저장법은 해외의 것으로 우리나라 실정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당장 시도해 볼만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시사하는 것은 식품 저장법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얼마나 친환경적이고 자연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근래 친환경에 관한 관심이 무척 높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온 저장이 이 식품에 관한 친환경적인 방법인지 고려하지 않은 채 가정 내 전력 소모량이 가장 높다 해도 과언이 아닌 냉장고를 24시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간헐적으로 가동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요.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 것과 실온에 두어도 좋은 것들이 모두 들어가서 버거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도 잊어버린 저 한 귀퉁이에서 상해 가는 식재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저자 류지현의 기행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을 이용하며 그에 맞는 방법으로 풍요롭게 살아가는 - 돈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하 통로를 이용하기도 하고, 흐르는 물을 건물 안으로 통하게 하기도 하고, 겨울에 쏟아지는 눈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선선한 지역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더운 지역은 태양을 이용하거나 병조림, 오일 담금 등을 이용하여 환경에 맞는 저장법을 택했습니다. 그들 삶의 지혜를 배우다 보면 얼마나 미련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저장 음식을 마련한다는 건 얼마나 수고로운지. 김치를 담그고 장아찌를 하고, 채소를 말리고... 그런 것들을 하는 걸 보기만 해도 피곤합니다. 위의 것들을 즐겨 하던 저조차도 된장 고추장 같은 건 담그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은 김치나 장아찌도 장만하지 않습니다만. 올해는 선녀벌레(로 추정되는)들이 꽃씨처럼 너무 많이 날아다녀서 채소를 말릴 엄두도 못 냈습니다. 매일 내리쬐는 햇볕이 그냥 버려지는 게 어찌나 아까운지. 우리는 비타민 D를 머금은 채소를 마련하거나 사 먹는 대신에 비타민제로 보충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건조된 식품을 제대로 불려 요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바쁜 삶을 살아가면서 과거처럼 천연 저장법을 이용하는 건 무척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냉장고를 없앨 순 없습니다. 하지만 소량의 장을 보고, 냉장과 실온에 둘 것을 구분하여 지혜롭게 식생활을 즐긴다면 나도 좋고 지구도 좋아할 것입니다. 

- 지금 냉장고 안의 감자, 양파, 고구마, 토마토부터 꺼내 놓으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셀 7 7 시리즈
케리 드루어리 지음, 정아영 옮김 / 다른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언론, 특히 영상 매체를 이용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정보의 영향력이란 상상 그 이상입니다. 별것 아닌 일이 크게 부풀려지거나, 오히려 축소되기도 하는데 대중은 그것을 진실이라 착각합니다. 사건의 가해자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내세워 피해자로 바뀌기도 하는 일은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이제는 하도 속아서 제법 예리한 판단을 하게 된 대중들도 여전히 언론 플레이에 속곤 합니다. 만일 일부 기득권층에게 언론 통제력이 몰려있다면 어떨까요. 무척 공정한 방송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압력이나 돈의 힘으로 진실이 왜곡될 것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셀 7>의 배경이 되는 곳은 디스토피아 영국입니다. 빈부의 양극화가 무척 심한 데다가 통신 요금마저 비싸, 요즘 초등학생도 가지고 있다는 휴대폰은커녕 마치 그 옛날 이장님 댁에서 전화 빌려 쓰듯 집안에 일반 전화 갖추기도 힘든 시대니 인터넷 또한  비용 때문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도서관 같은 공공 기관조차 돈이 없으면 이용할 수 없으니 도서관에 가서 이용하면 된다는 말은 빵 대신 과자를 먹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일겁니다. 
재판정에서의 잘못된 판결로 범법자가 무죄방면되어 무참한 살인을 저지른 것을 계기로 이 나라의 사법제도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사형 받아야 마땅한 자 - 혹은 그렇게 추정되는 자-를 감옥에 가두고 7일 동안 '눈에는 눈'이라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유죄, 무죄를 ARS나 문자 투표로 결정합니다. 죄수는 7일간 매일 전기의자와 가까워지는데, 수감되는 방도 바뀝니다. 전 국민이 방송을 통해 범죄 사실과 기록을 보고 자신이 원하는 쪽에 투표하면 됩니다. 수많은 사람이 표결하므로 언뜻 보기에 공정한 것 같지만, 전화번호 하나당 기회가 한 번 있는 게 아니라, 원하는 만큼 계속 투표할 수 있습니다. 그게 몇 만 도수이건 상관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수감자의 무죄를 주장하여 아껴둔 돈으로 간신히 한 표를 던진다 해도 재벌이 그 사람을 유죄로 만들기로 결정했다면 수감자는 전기 의자 행이 될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시스템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7년 전 제주 세계 7대 자연 경관 투표 독려가 있었습니다. 저도 소중한 한 표를 던졌는데, 여러 번의 투표가 가능하단 말을 듣고선 더 이상 버튼을 누르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그렇다면 투표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도정에서 독려하고 심지어 공공 기관에서는 사내 전화로 열심히 ARS를 눌러댔다고 합니다. 결국 이때 사용된 행정 전화 요금은 211억 8600만 원이었고 KT가 41억을 감면해주어 160억의 요금을 갚아야 했습니다. 이 요금은 올해 4월 드디어 완납을 했고, 당시 상당수의 공무원들은 휴대폰으로 여러 번 투표에 참여했으니 대국민 사기극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2011년에 세계 자연 경관에 선정되었으니 돈 없어서 투표 못한 나라와 지역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가지고 있어도 인정받지 못하는 구나하는 마음에 별로 자랑스럽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이런 돈으로 투표하는 어이없는 시스템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소설 <셀 7>에 등장합니다. 투표 결과에 따라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그들은, 7일간 교도관의 비인간적인 처우를 견디면서 대중의 판단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콜로세움에서 검투사의 대결을 보며 공식적인 살인을 즐기듯, 무리하게 돈을 써가며 사형 집행장에 참관하러 옵니다. 짜릿한 맛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기 때문이지요. 죄수가 실제로 무죄 건 유죄 건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합법적으로, 내 눈앞에서, 내가 유죄라고 배팅한 자가 죽으면 좋은 겁니다.

소설의 주인공 마사는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유명인이자 사회사업가 잭슨 페이지를 총으로 쏘아 죽인 일로 수감되었습니다. 전직 검사 출신이지만 재판정이 사라진 이후 상담자로 일해왔던 이브는 마사를 담당하지만 마사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한편, '눈에는 눈'이라는 방송을 통해 마사는 거의 97%의 유죄를 확정받아 놓은 상태였습니다. 앞으로 7일간 그녀의 처지는 바뀔 수 있을지, 어째서 잭슨을 죽인 건지,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몇 가지의 반전은 있었지만 복선을 너무 진하게 깔아 놓은 바람에 사건의 흐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꾸만 뒷이야기가 궁금해 쉽게 내려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즐겁게 읽고, 언론 플레이와 부조리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마사와 아이작의 러브 스토리를 즐겨도 좋고요.

*** 영국에서 TV 시리즈물로 제작된다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3의 남자
박성신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가 어렸을 때는 반공반첩에 대한 교육이 무척 철저했습니다. 수상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신고하라며 상당히 구체적인 예시가 있었거든요. 오해를 받아 끌려가 고초를 겪은 분들도 계셨고, 실제로 체포된 간첩도 있었을 겁니다. 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해도 간첩으로 몰려 끌려가기도 했던 시절이니까요. 어휴, 지금 같으면 몽땅 잡혀갈 판이지요.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시위를 하면 빨갱이의 조종을 받았다, 사주를 받았다, 그들 중 누가 간첩일 거다 하며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학생들을 때려잡아 매캐한 화염병 연기와 최루탄 가스가 서울 시내에 깔리곤 했던 불안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께 북한은 자꾸만 간첩을 보내니 참 나쁘다고 말씀드리자, 아버지께서는 우리나라에서도 북으로 간첩을 보낸다고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북한의 나쁜 점 중 하나는 간첩을 남으로 보내서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었거든요.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쳤고요. 그런데 남한에서도 북으로 보낸다니. 충격이었습니다. 게다가 좀 더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스파이나 간첩이나 같은 말로, 제가 좋아하는 007이 영국산 간첩이라니! 어딘가에 몰래 숨어들어가 자기편의 일을 성공리에 해낸다는 걸로 보면 맥가이버도 비슷한 직업을 가진 아저씨라고 하니, 간첩이란 자신이 속해있는 나라의 기준에 맞춰서 우리에게는 싫지만, 자국 입장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대단한 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웠습니다. 

007처럼 임무를 받으면 해당 지역으로 날아가 침투하고 멋진 액션으로 우리의 눈과 귀와 가슴을 즐겁게 해주는 타입의 스파이도 있겠지만, 한 지역에 오래도록 살면서 우리의 이웃으로 수십 년을 지내는 고정간첩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옆집에 살았던 아저씨가 간첩일 수도 있다는 거죠. 똘이 장군 같은 데서 봤던 늑대나 여우의 상이 아닌, 그냥 평범한 아저씨 말이에요. 만화책이나 오래된 소설책을 들고 가서 팔기도 하고, 때로는 사기도 했던 헌 책방의 말수 적은 주인아저씨가 사실은 간첩이라면 어떨까요? 박성신의 <제3의 남자>에는 그런 아저씨가 나와요. 그리고 그의 아들도요.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아들 최대국은 이혼하고 혼자서 17만 원짜리 고시원에서 폐인처럼 삽니다. 자신의 인생이 꼬여버린 건 아버지 탓이라고 원망하면서 매일을 찌질하게 보내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옵니다. 아버지인 최희도씨가 총에 맞았다면서요. 미국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총을 맞는 일은 흔한 게 아니죠. 그는 아버지의 수첩을 찾아달라며 수억 원의 보상금을 제시합니다. 선불로 1000만 원을 주면서요. 인생 역전! 지금까지 도움이 되지 않았던 아버지가 드디어 도움이 되는구나 하는 마음에 대국은 제의를 수락합니다. 헌책방을 중심으로 아버지의 행적을 밟아가던 그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어쩌면 간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말이에요. 그리고 어째서 아버지가 자신을 그렇게 대했는지도 말이지요.

소설은 아버지 최희도의 이야기와 아들 최대국의 이야기가 계속 교차되면서 진행됩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사실을 대국은 몰라요. 아버지의 과거를 조금씩 찾게 되면서 고정간첩이었던 아버지가 헌책방 주인으로 조용히 살았던 건 안기부의 눈을 피하고 간첩 활동을 하기 위한 것 만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무척 괜찮은 소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과거 부분과 아들의 현재 부분이 교차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아들은 결코 정의의 사도가 아니었죠. 한국 순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찌질이에 가까웠습니다. 자신의 꼬인 인생을 남탓으로 돌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남자, 아버지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살아갈 용기가 없었을 테지요. 그런 주인공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한편, 아버지의 경우는 냉혈한 남파 간첩이되 실은 남한의 여느 아버지와 다를 것 없는 부성애를 가지고 있었으며 한 여자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안고 있는 따뜻한 남자였습니다.

이 소설은 스릴러의 형식을 빌려온 따뜻한 소설 같았습니다. 스릴러라고 하기엔 조금 약했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옥죄일 것 같은 스릴은 부족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느낌이 좋은 소설이었습니다. 인물 간의 갈등도 그렇고, 흐름도 그렇고요. 그리고 실제로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것 같은, 그리고 존재했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현실감을 주었습니다. 종장에 이르러 아들이 이 사건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내고 이 소설과 동명인 <제3의 남자>라는 책이 매대에 있는 장면에서는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져 어쩌면 이런 일이 정말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짜임새 있게 진행되는 소설의 스토리는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어도 좋지 않나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티네의 끝에서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일본의 기타리스트 후쿠다 신이치의 바흐 연주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의 연주는 마치 피아노의 굵은 현을 직접 쓰다듬어 연주하는 것 같은 음색이군요. 마키노 사토시가 연주하는 것도 이렇겠죠. 부드럽다가도 강인하다가 슬며시 다가와 감동을 주는 그런 연주일 거예요. 소설 속의 인물이니 실제의 인물을 통해 상상해봅니다. 마키노와 요코와 파리에서 바흐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둘은 사랑하고 있었어요.

마티네란 프랑스어의 마르탱(낮)에서 온 단어로 보통 저녁에 공연하는 오페라나 뮤지컬, 음악회 등의 흥행을 위해 낮에 공연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간 흥행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지요. <마티네의 끝에서>의 주인공 마키노는 천재 기타리스트입니다. 스승님의 여러 제자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지요. 소설이 시작할 무렵, 그는 이미 무척 유명한 기타리스트였는데요. 이 소설에는 그가 연주하거나 언급하는 다양한 음악들이 등장합니다 제목을 듣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BGM이 떠오르는데, 대개 가장 마지막에 언급된 곡이 다음 음악 제목이 나올 때까지 뇌리에 떠돕니다. 어울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만일 영화였더라면 OST 공급을 위해 저작료를 많이 내야 할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수록된 음악들 모두를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제가 알고 있는 곡들, 그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속에서 느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못했는데 - 아니 무엇보다도 그의 존재 자체를 몰랐으니 그럴 수밖에요. 그건 아마 게이치로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러니 그는 이 소설을 썼고 나는 읽었으니, 앞으로 그 음악들 중 몇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이라는 기억을 안고 가겠지요. 

얼마 전 또다시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IS에 의한 것이라는데, 남겨진 자,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는 너무나 커, 생존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보다는 죄책감이 더 크다고 합니다 <마티네의 끝에서>의 요코도 그렇습니다. 바그다드 취재 도중 경험한 테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겪기에 충분했죠.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마키노와 요코는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어떤 영혼의 이끌림 같은 것이라 첫눈에 반했다는 표현으론 부족합니다. 그러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 않은 채 작별했습니다. 처음 만나 별로 긴 시간을 보내지 않았기에 사랑을 말하기엔 경솔하다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마키노는 자신의 마음을 전했죠. 하지만 요코에게는 결혼을 앞둔 약혼자가 있었기에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세 번째 만났을 때에, 마키노는 음악적 슬럼프에 빠져들고 있었고, 요코는 테러의 위험을 겪은 후였습니다. 불안정한 그들이었지만 이번에야말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요코는 약혼자 리처드에게 이별을 고하고 마키노를 선택했습니다. 범 지구적인 원거리 연애를 하는 그들은 스카이프가 오작교였는데요. 21세기라 다행입니다. 휴대폰 로밍 서비스도 있고, 인터넷 메일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질투나 이기적인 마음은 세기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닌가 봅니다. 요코와 마키노가 일본에서 만나기로 한 날, 마키노의 비서 겸 매니저인 미타니 때문에 일이 크게 틀어지고, 그로 인해 둘은 헤어집니다.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심리 상태가 아니었기에, 게다가 구차하게 따져드는 성격들이 아니었기에 미타니때문에 생긴 오해를 스스로의 고민을 통해 마음을 정리합니다. 적어도 한 번쯤 직접 물어보지 않는 요코 때문에 답답했고, 미타니 때문에 울컥했습니다. 마음을 주고 있던 마키노가 요코와 사귄다는 사실에 그녀가 취한 행동은 깊이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코와 미타니의 대화와 데이트는 뭔가 전문적이 대화가 오고 가서 제가 낄 자리가 없는 것 같다고 느꼈었거든요. 그들의 사이에서 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마키노도 그런 느낌이었나 봅니다. 뒷자리에서 마키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족했던 건 그의 옆에 누구도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누군가가 그 옆을 차지하려 한다면, 그건 자신이어야 한다는 순간적인 욕심이었을 겁니다. 더 이상의 조연은 싫다라는 감정이었겠죠. 하지만 그런 건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미타니의 행동에 화가 났습니다. 
미타니와 요코는 각자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만나기까지는 아픈 시간들이 필요했습니다.


지금까지 단 세 번을 만났을 뿐이지만 그러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깊이 사랑했던 사람...... 음악이 앞으로 내달려갔다. 이 한때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그녀는 기도했다.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기를.
-p.480


히라노 게이치로는 사람의 심리를 심층 분석해서 드러내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걸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독자인 저는 주인공이 되어, 조연이 되어 그들의 심리를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단순히 로맨스 소설로 생각해 스토리라인만을 찾는다면 진정한 맛을 느끼긴 어려울 것입니다. 읽다가 잠시 눈과 손을 멈추고 클래식 기타로 연주하는 곡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이 어떨까요? 마키노의 연주곡 중 하나인 킬링 미 소프틀리를 추천합니다. 더불어 아랑후에즈 협주곡도요. 저 역시 30여 년 전부터 좋아했던 곡이거든요. 그리고 진한 커피와 함께 읽는다면 이 소설을 맛있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달콤하지는 않으니 부디 쓰디쓴 커피로 준비해 주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