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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남자
박성신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5월
평점 :
제가 어렸을 때는 반공반첩에 대한 교육이 무척 철저했습니다. 수상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신고하라며 상당히 구체적인 예시가 있었거든요. 오해를 받아 끌려가 고초를 겪은 분들도 계셨고, 실제로 체포된 간첩도 있었을 겁니다. 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해도 간첩으로 몰려 끌려가기도 했던 시절이니까요. 어휴, 지금 같으면 몽땅 잡혀갈 판이지요.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시위를 하면 빨갱이의 조종을 받았다, 사주를 받았다, 그들 중 누가 간첩일 거다 하며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학생들을 때려잡아 매캐한 화염병 연기와 최루탄 가스가 서울 시내에 깔리곤 했던 불안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께 북한은 자꾸만 간첩을 보내니 참 나쁘다고 말씀드리자, 아버지께서는 우리나라에서도 북으로 간첩을 보낸다고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북한의 나쁜 점 중 하나는 간첩을 남으로 보내서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었거든요.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쳤고요. 그런데 남한에서도 북으로 보낸다니. 충격이었습니다. 게다가 좀 더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스파이나 간첩이나 같은 말로, 제가 좋아하는 007이 영국산 간첩이라니! 어딘가에 몰래 숨어들어가 자기편의 일을 성공리에 해낸다는 걸로 보면 맥가이버도 비슷한 직업을 가진 아저씨라고 하니, 간첩이란 자신이 속해있는 나라의 기준에 맞춰서 우리에게는 싫지만, 자국 입장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대단한 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웠습니다.
007처럼 임무를 받으면 해당 지역으로 날아가 침투하고 멋진 액션으로 우리의 눈과 귀와 가슴을 즐겁게 해주는 타입의 스파이도 있겠지만, 한 지역에 오래도록 살면서 우리의 이웃으로 수십 년을 지내는 고정간첩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옆집에 살았던 아저씨가 간첩일 수도 있다는 거죠. 똘이 장군 같은 데서 봤던 늑대나 여우의 상이 아닌, 그냥 평범한 아저씨 말이에요. 만화책이나 오래된 소설책을 들고 가서 팔기도 하고, 때로는 사기도 했던 헌 책방의 말수 적은 주인아저씨가 사실은 간첩이라면 어떨까요? 박성신의 <제3의 남자>에는 그런 아저씨가 나와요. 그리고 그의 아들도요.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아들 최대국은 이혼하고 혼자서 17만 원짜리 고시원에서 폐인처럼 삽니다. 자신의 인생이 꼬여버린 건 아버지 탓이라고 원망하면서 매일을 찌질하게 보내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옵니다. 아버지인 최희도씨가 총에 맞았다면서요. 미국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총을 맞는 일은 흔한 게 아니죠. 그는 아버지의 수첩을 찾아달라며 수억 원의 보상금을 제시합니다. 선불로 1000만 원을 주면서요. 인생 역전! 지금까지 도움이 되지 않았던 아버지가 드디어 도움이 되는구나 하는 마음에 대국은 제의를 수락합니다. 헌책방을 중심으로 아버지의 행적을 밟아가던 그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어쩌면 간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말이에요. 그리고 어째서 아버지가 자신을 그렇게 대했는지도 말이지요.
소설은 아버지 최희도의 이야기와 아들 최대국의 이야기가 계속 교차되면서 진행됩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사실을 대국은 몰라요. 아버지의 과거를 조금씩 찾게 되면서 고정간첩이었던 아버지가 헌책방 주인으로 조용히 살았던 건 안기부의 눈을 피하고 간첩 활동을 하기 위한 것 만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무척 괜찮은 소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과거 부분과 아들의 현재 부분이 교차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아들은 결코 정의의 사도가 아니었죠. 한국 순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찌질이에 가까웠습니다. 자신의 꼬인 인생을 남탓으로 돌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남자, 아버지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살아갈 용기가 없었을 테지요. 그런 주인공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한편, 아버지의 경우는 냉혈한 남파 간첩이되 실은 남한의 여느 아버지와 다를 것 없는 부성애를 가지고 있었으며 한 여자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안고 있는 따뜻한 남자였습니다.
이 소설은 스릴러의 형식을 빌려온 따뜻한 소설 같았습니다. 스릴러라고 하기엔 조금 약했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옥죄일 것 같은 스릴은 부족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느낌이 좋은 소설이었습니다. 인물 간의 갈등도 그렇고, 흐름도 그렇고요. 그리고 실제로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것 같은, 그리고 존재했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현실감을 주었습니다. 종장에 이르러 아들이 이 사건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내고 이 소설과 동명인 <제3의 남자>라는 책이 매대에 있는 장면에서는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져 어쩌면 이런 일이 정말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짜임새 있게 진행되는 소설의 스토리는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어도 좋지 않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