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가 낳은 천재들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29
이나미 리쓰코 지음, 이동철.박은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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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때 김용의 무협지를 좋아했습니다. 역사의 큰 흐름 위에서 정파니 사파니 하며 다툼을 벌이는 스토리도 좋았고 경공술로 날듯이 이동하는 남녀는 낭만적이었습니다. 경공, 초식, 사자후, 비기 등등을 읽으며 상상하며 저런 것들이 실제로 가능한 걸까 의심도 들었지만, 중국은 땅도 넓고 인구도 많으니 저런 기인이나 초능력자가 없으라는 법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역사를 따라가면 범인들은 생각지도 못하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 세계 곳곳에 있어왔으니까요. 그러니 가능할지도 몰라요.

<중국사가 낳은 천재들> 을 읽다 보니 과거 생각도 나고, 이런저런 사색도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 책은 중국 문학을 전공한 국제일본 문화연구센터 명예 교수인 이나미 리쓰코가 춘추전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56인의 삶과 업적, 행적 등을 소개하고 그들의 명언이나 작품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인물의 정사뿐만 아니라 일화나 숨겨진 이야기들도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요.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간결하게 서술되어 있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꼭 필요한 부분만 간추려서 읽는 이로 하여금 편하게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꾸려놓아서 '역사'라는 단어에 긴장하는 저도 마치 이야기책을 읽는 것처럼 편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물을 소개하는데요. 너무나도 유명해 저 같은 사람도 이름을 알고 있는 공자나 장자, 진시황, 왕희지, 이백, 도연명, 루쉰 같은 인물을 만나면 아는 사람을 만나 반갑고, 임포, 신기질, 유경정, 모진 같은 사람을 만나면 새로운 만남에 즐거웠습니다. 인물을 소개함은 간략하게 되어 있지만 모자람은 없습니다. 호감이 가서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다른 책이나 인터넷을 뒤지면 되니까 아쉬움도 없습니다. 책의 자연스러운 진행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중국사와 책에 수록된 인물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데엔 전혀 부족함이 없는 책이었습니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인명이 한자음으로 되었다가 중국식으로 되었다가 하는 점이었는데, 어차피 한글 뒤에 한자로 표기했으므로 중국음을 병기하거나 통일했으면 어떠했을까 합니다. 

이 책은 56명의 인물을 소개하고 있으므로 연속해서 읽지 않고 짬짬이 읽을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누구도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을 수 없다는 핑계를 댈 수 없는 책이었달까요.

우연이었겠지만 이 책을 읽는 며칠 사이에 제 주변인에게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하고 난 후 몇 시간 지나자 갑자기 우울해지더군요. 모두가 전진하고 있는데, 나만 이룬 것이 없다는 슬픔이랄까요. 다른 이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나아가는 동안 나는 뭘 했을까... 속상했습니다. 그리고 만난 청나라 말기의 저널리스트 량치차오의 시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해도(志末酬)'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좋았습니다.



비록 이룬 것 적더라도

감히 스스로 비하하지 말지니,
적은 것이 없다면
많은 것이 어디서 나오리!
雖成少許, 不敢自輕, 不有少許兮, 多許奚自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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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선택한 남자 스토리콜렉터 66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이한이 옮김 / 북로드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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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발다치의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는 매년 한 편씩 북로드를 통해 출판되고 있는데요. 과잉기억 증후군이라는 특이한 질환이자 특수한 능력을 가진 데커가 FBI와 함께 사건을 해결해가는 무척 매력 있는 작품입니다. 에이머스 데커는 과거 미식축구선수로 경기 중 큰 부상을 입고 뇌에 손상을 입는 바람에 과잉기억 증후군을 앓게 되었는데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가 되고 맙니다. 수험생이나 중년 이후 깜빡깜빡하는 사람은 그의 기억력을 부러워할 만도 하지만, 망각이란 신이 준 축복 중의 하나로,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다는 건 정말 괴롭습니다. 때로는 사라져야 하는 기억도, 흐려져야 하는 기억도 있는 법이니까요. 가족의 죽음을 목격한 데커로서는 정말 저주스러웠겠죠. 하지만 전편의 시리즈를 통해 그는 자신의 괴로움을 극복해나가며 특수한 능력을 동원해 FBI와 함께 일합니다. 기억력이 좋은 것뿐만 아니라 저돌적인 성향과 정의감, 그리고 뛰어난 판단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겁니다.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 <죽음을 선택한 남자>는 시작부터 강렬합니다. FBI의 거점인 후버 빌딩 앞에서 슈트를 멋지게 잘 차려입은 한 남자, 윌터 데브니가 앤 버크셔를 향해 총을 쏘아 살해합니다. 그 장면을 목격하고 달려온 데커 앞에서 그는 스스로에게도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합니다. 어째서 FBI 건물 앞에서 여성을 살해했는지 이유를 밝히기도 전에 그는, 병원에서 사망하고, 이 <죽음을 선택한 남자>의 행동을 모두 목격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데커가 수사에 합류, 사건을 추적합니다. 

윌터 데브니는 성공한 사업가로 FBI 프로젝트와 관련된 컨설팅 회사의 사장인데, 그런 그가 하필 FBI 건물 앞에서 한 여자를 총으로 쏘았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 데다, 피해자인 앤 버크셔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카톨릭계 학교의 교사로 데브니와의 접점이 없었기에 수사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데브니의 부검 결과 뇌종양 말기였음을 알게 되고, 병을 비관한 묻지 마 살인이었을 수도, 종양의 압박으로 인한 인격의 변화에 따른 살인이었을 수도 있다는 짐작을 해보지만,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건 데커도, 독자도 다 압니다. 데커는 이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며 사건을 추적합니다. 가해자인 데브니 뿐만 아니라 피해자인 버크셔까지 조사하는데요. 양쪽을 모두 조사하다 보면 분명 둘의 접점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FBI뿐만 아니라 DIA(미 국방부 정보국)에서도 관심을 보이는데요. 하마터면 사건에서 밀려날 뻔했던 데커와 동료들이 일련의 일을 겪으며 결국 사건을 계속 수사합니다. 

데커와 함께하는 동료이자 룸메이트 제미슨은 DIA의 브라운을 탐탁지 않아 하는데요. 데커와 자주 함께하는 브라운을 보며 질투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동료애 일 수도 있고, 자신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연애 감정이었을 수도 있겠죠. 참, 데커와 제미슨은 <괴물이라 불린 남자>멜빈 마스의 집에 세입자이자 관리자로 거주합니다. 지난번 시리즈에서 멜빈 마스와 데커의 케미를 쭉 보고 싶다고 소망했었는데, 이렇게 연결되니 책 읽다 말고 덩실덩실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스는 어째 계속 등장하지 않고... 이러다 집주인으로 이름만 나오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결국 등장합니다. 데커와 마스가 둘이 합쳐 240 킬로그램의 몸무게로 문을 부술 때는 까르륵하고 웃었습니다. 역시 둘은 참 잘 어울려요. 원죄를 쓰고 감옥 살이 20년의 경력의 마스는 의외로 순진해서 브라운과 갑자기 진한 썸을 탈 땐 데커도 저도 걱정했습니다만, 그들 둘이 참 잘 어울려요. 제미슨은 한시름 놓은 것 같았습니다. 왤까요? 하핫. 

이렇게 스릴러는 사랑을 싣고 결말로 달려가는데, 네... 사랑입니다. 사랑이에요. 사랑이 없었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전편을 읽은 독자는 <죽음을 선택한 남자>를 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뭔가 데커 사랑 전선의 예고편 같은 느낌도 있으니 다음 편에 대한 기대감도 있을 테고요. 이 작품이 처음인 독자도 단독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데커와 마스에 관한 과거를 잠깐씩 언급하니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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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의 세계사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46
모모이 지로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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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커뮤니케이션즈의 책을 여러 번 접해보았지만 트라비아 시리즈는 처음입니다. 간간이 올라오는 신간 소식을 보면서도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소수의 특정층을 겨냥한 것 같은 제목에 저는 그 대상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보병 장비>,<세계의 군복>, <도해 첩보, 정찰 장비> 같은 책들이었으니 무리도 아니죠. (<영국 집사의 일상>이라거나 스페셜의 <중 2병 사전> 같은 건 조금 호기심이 생겼었지만요.)
책날개의 트라비아 시리즈 소개를 보면, 트라비아란(Travia) 잡동사니 정보나 잡학적 지식을 말한다고 합니다. 흔히 오타쿠라는 통칭으로 불리는 이들을 중심으로 생산/소비되는 서브 컬처적 지식 같은 걸 말한다고 하는데요. AK커뮤니케이션즈에서 발행하는 트라비아 시리즈는 비주류이지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에 무게를 두고 출판한다고 합니다. 궁금한 주제에 대해 나무위키나 유투브등을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전문가가 저술한 책을 통해 해소할 수 있는 지적 호기심의 맛은 다를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더라도 자신이 직접 읽어보기 전엔 느낄 수 없습니다. 워낙 주제가 다양하니 입맛에 맞는 책을 골라 읽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을 거예요. 저도 이 책 <해적의 세계사>를 읽기 전에는 이곳이 맛 집인 걸 몰랐거든요.
<해적의 세계사>는 매끄러운 번역과 도해로 아주 쉽게 세계사를 접할 수 있게 편집되어 있었습니다. 학창시절 지리나 세계사 과목의 점수는 좋지 않았지만 지도를 보는 것만은 좋아했는데요. 그 지도를 눈으로 좇으며 따라 그려보는 것도 좋아했기에 이 책에 수록된 지도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해적의 세계사>는 고대 그리스의 해적부터 시작하여 현대 소말리아의 해적에 이르기까지 바다를 누비던 - 나아가 육지까지 점령한 해적의 역사를 시간의 흐름 순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인터넷 웃긴 글에서 읽었던 짧은 글이 생각납니다. 몇 년간 유니세프 같은 곳을 통해 정기 후원을 했던 소말리아 어린이가 자라서 직장을 구했다고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인데요. 그 직장이 소말리아 해적이었다나. 우스개였으면 좋겠는데 실화일지도 모릅니다. 슬픈 이야기죠.
해적은 예로부터 전 세계 곳곳에 있어왔습니다만, 이 책에서는 서양의 해적만을 다룹니다. 그리스의 해적, 고대 로마 해적, 무슬림 해적 등... 서두에서 동양의 해적을 다루지 않았음에 양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 때 짐과 실버가 활약하는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실버의 매력에 퐁당 빠졌었는데요. 지금은 왜 그랬을까 이해가 잘 안됩니다. 해적은 엄연히 범죄자이거늘. 반해서 어쩌자는 건가요. 어려서 뭘 몰라 나쁜 남자가 좋았나 봅니다. 해적은 범죄자, 약탈자, 파괴자입니다..... 분명 그러한 거였는데, 맞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해적은 약탈자 일 수도 있고, 위대한 정복자 일 수도 있습니다. 


(붙잡힌 해적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에 끌려왔다) 대왕이 해적에게 '어찌하여 바다를 어지럽히는가'라고 묻자 해적은 겁먹은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폐하가 전 세계를 어지럽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나는 작은 배 한 척으로 그런 일을 하는 까닭에 도적이라 불리고 폐하는 대함대를 거느리고 그런 일을 하는 까닭에 황제라 불리는 것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신국론]중에서) 
-p.19



초반에 놓인 이 인용구를 읽고 갑자기 뭔가가 깨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을을 약탈하고 노예를 취하여 내다 팔았던 해적은 범죄자이고, 함대를 몰고 가서 타국을 침략한 이들은 정복자라고 생각한 내 생각이 잘 못 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런 것을 깨달은 후 책을 읽기 시작하니 여러 가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악명 높았던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마젤란 이후 세계를 두 번째로 일주한 사나이가 되고, 영국 여왕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는 이유로 교수형은커녕 기사 작위까지 내립니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하려면 크게 해야 하나 봅니다. 
책의 초반에선 해적질이 상당히 나쁜 것이라는 쪽과 그래도 바이킹- 노르만의 이동을 생각해보면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부분이 아니었나 하는 쪽, 심지어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는 쪽의 생각이 뒤엉켜 좀 답답했습니다만,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러니 읽고 알아두자, 다만 지금은 없어져야 할 악이다...라고 결론 내리고 나니 후반부는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실은 윌리엄 키드라거나 멋진 여성 해적 - 마치 영화나 소설 같은 인생이 매력적이었기에 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파나마의 뉴프로비던스(영국령)에 버커니어(해적)들이 모여들어 거래도 하고 쉬었다 가기도 하는 장면에서는 캐러비안 해적이 떠올랐습니다. 실제로 당시가 카리브 해적의 황금기였다고 하고요. 

해적이 등장하는 영화나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즐기는 독자라면 이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약간의 호기심만을 지녔던 제가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걸 보면요. 바닷가의 커피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보며 읽었더니 더 즐거웠습니다. 여름휴가지에 함께 할 책으로 추천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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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다운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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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슥한 숲길, 동물뿐만 아니라 악한이 덤벼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 길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여름밤, 남편의 당부를 가볍게 여기고 숲속의 지름길로 차를 몰고 돌아오던 캐시는 앞의 차량이 멈춰 서는 바람에 오만 생각을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걸까? 고장 난 걸까? 보험회사나 상대방의 남편이(운전자가 여자라면) 오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휴대폰 불통지역인 걸. 그렇다고 자신의 차에서 내려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 보기도 두렵습니다. 이런 식으로 운전자를 낚아서 공격하는 강도가 있다는 말도 들었었기에 함부로 내리기도 그렇습니다. 결국 캐시는 그 차를 지나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차의 운전자- 여자는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만일, 차를 세우고 운전자를 도왔더라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솟아나기 시작하는데, 심지어 피해자는 이제 막 사귀었지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던, 캐시가 아는 여자였습니다. 캐시의 죄책감은 자신을 먹어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보통은 자신이 지나온 길에서 살인이나 사건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보면, 범행 대상자가 자기 자신이 되었을지 모른다며, 피해자는 참 안되었지만 그게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더라도 - 할 텐데요. 캐시는 심각할 정도로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런 생각은 공포로 변해가는데요. 집 주변에 나타나는 낯선 사람, 갑자기 방문한 보안 업체 사람, 뿐만 아니라 막상 받아보면 아무 말 없이 끊는, 발신자 표시제한으로 걸려오는 집 전화, 가장 심각한 것은 그녀의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는 겁니다. 조기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신 엄마의 유전적인 영향인지, 캐시 역시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잊어버리기 시작합니다. 늘 조작하던 세탁기나 커피 메이커 같은 가전제품의 사용법도 잊습니다. 자신이 기억하는 게 맞는 건지 불분명한 가운데 환각을 보거나 환청도 듣습니다. 분명 주방에서 커다란 칼을 보았는데, 남편을 불러서 다시 가 보니 조그만 과도로 변해있질 않나, 어딘가 창문이 열려있는 걸 봤는데, 닫혀있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결국 보안업체를 통해 방범 시스템을 달았는데 - 그녀는 계약서에 사인한 기억도 없지만 - 비밀번호를 잊고 패닉에 빠지기도 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 레이철도 사랑하는 남편 매튜도 그녀를 이해하고 다독이지만 스스로의 공포는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을 먹어도 그때뿐, 마음은 편하지만 몸이 지나치게 늘어집니다. 점점 사라지는 기억, 그리고 잡히지 않은 살인범에 대한 공포. 다른 건 잊어버리면서 왜 그 사건만은 캐시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

그러고 보면 제목을 참 잘 지었습니다. 브레이크 다운(break down).
보통은 고장 나다, 망가지다의 뜻으로 사용되죠. 그래서 숲에서 고장 나서 멈춰버린 피해자의 자동차를 떠올렸습니다. 표지에도 차 한 대가 서 있고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의 인생 역시 붕괴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밝힐 수 없는 어떤 것들도 브레이크 다운되고 있어요. 게다가 'nervous break down'이라고 하면, 신경쇠약이니 이보다 적절할 수 없죠. 중의적인 제목을 가진 이 소설은 마지막 50페이지를 향해 내달립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말이에요. 

이 소설에서는 캐시가 겪는 심리의 불균형과 불안함이 제법 잘 그려졌습니다. 읽다 보면 뭔가 감이 잡히는 부분이 있기에 내 생각이 맞는지 어쩐지 궁금해 좀 더 빨리 달립니다. 뜻밖의 사실을 만나 전복되기 전까지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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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얼티
스콧 버그스트롬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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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개봉한 플라이트 플랜에서는 카일 플랫(조디 포스터)이 운행 중인 비행기 안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딸을 찾는 시련을 겪습니다. 2008년 이후 테이큰의 브라이언 밀스(리암 니슨)은 납치된 딸을 찾는 사투를 벌입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누군가가 납치한다면 세상 어떤 부모라도 조디 포스터나 리암 니슨이 되는 걸 꺼리지 않을 겁니다. 김명민은 하루(2017)에서 딸을 구하기 위해 몇 번이고 같은 시간을 살지 않나요.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위험에 처한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달려가는 청소년이라니. 고작해야 집 안에서 울고만 있을 것 같은 - 조금 더 강한 아이라면 경찰 같은 기관에 하루빨리 구해 주길 당부하며 신께 간절히 기도할 것 같은데요. 

스콧 버그스트롬의 <크루얼티>에 등장하는 그웬돌린은 그런 보통의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아니,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보통의 청소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의에 굴하지는 않지만 세련되게 대응하는 법은 잘 모르는 평범한 소녀였죠. 군인이었던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일곱 살 이후로 아빠와 단둘이 살아왔던 소녀에게 그림자가 없다면 이상한 일일 테지만,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아빠와의 사랑으로 심지 굳은 소녀로서 잘 커나가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재혼상대였기에 그웬돌린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였어도 누구보다도 강한 부녀의 정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이였습니다. 외교 행정관으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아야 하는 불편이 있음에도 큰 불평하지 않고 지내왔습니다. 덕분에 외국어만큼은 현지인처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었겠죠. 
그러던 어느 날, 파리로 출장 간 아빠가 실종되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아빠는 사실 외교 행정관이 아니라 CIA 요원이었던 겁니다. 파리에서 작전 중 갑자기 연락을 끊고 사라져버렸는데요. CIA 측에서는 해외 비밀 계좌를 가지고 있던 그가 잠적했다고 생각하는데, 그웬돌린은 믿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사라져버릴 아빠가 아니었거든요. 잠적이 아니라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겁니다. CIA에서는 그가 납치되었을 가능성을 버립니다. 어른들이 찾으려 하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웬돌린은 썸남 테런스의 도움과 이웃 할아버지이지만 알고 보면 왕년의 스파이 벨라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파리로 날아갑니다. - 이모는 아이가 실종되었다고 생각하고 신고하는 바람에 그 동네에선 난리가 났지만요. - 파리에서 벨라 할아버지의 지인 야엘을 만나고, 야엘을 통해 두려움 없는 강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무슨 히어로 개조물이나 일본 만화처럼 그냥 뚝딱뚝딱, 우와 원래 이렇게 잠재된 능력이 있었던 건가! 하는 식으로 변화되는 건 아닙니다. 그웬돌린이 가지고 있던 건 균형 감각과 아빠를 되찾아야 한다는 강인한 마음 뿐이었거든요. 아무리 강한 마음을 먹는다 하더라도, 나였다면 그런 액션은 불가했겠지만, 그웬돌린은 됩니다. 왜냐. 주인공이니까요. 그리고 적어도 DNA의 반은 군인이었던 엄마의 것이니까요. 야엘을 통해 소피아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국적의 여권을 얻은 그웬돌린은 파리에서 예상치 못했던 사건으로 야엘과 헤어지고, 그때부터 진짜 주인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액션, 스릴, 서스펜스, 위기, 해결, 다시 위기, 그리고 대 위기.

아빠와 딸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전반적으로 테이큰 같은 추격 액션 스릴러 미스터리... 그런 느낌이려니 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제 예상보다는 좀 더 강했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아웃사이더였던 그웬돌린이 아빠를 찾아야 한다는 목표 하나로 얼마나 강해질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성장 소설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스릴러로서의 큰 줄기는 그대로 유지한 채로요. 
아름다운 도시, 낭만의 도시라고 생각했던 '파리','프라하','베를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생각했던 그것과는 많이 다름을 느낍니다. 소설이라 어느 정도의 과장이 들어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 속의 그곳은 무척 어둡고 더러웠습니다. 마약과 폭력, 그리고 인신매매까지. 그런 흉한 곳에서 그웬돌린은 많은 소녀들을 만납니다. 구할 수 있는 소녀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소녀도 있었습니다. 슈퍼 히어로가 아니니 자신과 아빠만 구하면 되지 않나 싶은 장면도 꽤 많았습니다. 무언가 그웬돌린 안에서 흔들리고 변화한 게 분명합니다. 

<크루얼티>는 <캐리비안의 해적>의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을 맡아 영화화한다고 합니다. 과연 누가 주연을 맡을까 기대됩니다. 스칼렛 요한슨 느낌의 배우였으면 좋겠는데요. 영화도 기대되지만, <크루얼티>의 후속작이 더 궁금합니다. 그렇잖아도 책을 덮으면서 후속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크루얼티> 책 정보를 살펴보니 <그리드>라는 후속이 있더군요. 걸크러시의 그녀, 말 그대로 반해버렸어요. 다시 한 번 꼭 만나고 싶습니다. 영화에서도, 소설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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