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트 패러독스 - 우리가 건강해지려고 먹는 ‘식물들’의 치명적인 역습
스티븐 R. 건드리 지음, 이영래 옮김, 양준상 감수 / 쌤앤파커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건강검진을 등한시하고 살아온 지 어언... 음. 
결국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설마하니 내가 성인병에 걸리겠어? 비만이긴 하지만 가족력이 좋으니 괜찮을 거야, 문제없어.라고 생각했던 건 저의 오산이었습니다. 모든 병이 한꺼번에 달려와서 딱 달라붙어있었는데도 저는 전혀 몰랐어요. 그냥 피곤한 거겠지, 나이 먹어가니 체력이 떨어지는 거겠지 하며 넘겼습니다. 병이 있음을 알게 되고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약을 먹으며 노력하면 좋아질 수 있다는 말을 늘 빼먹지 않으셨거든요. 그렇다면 어떻게 노력해야 좋을까요? 모든 식이요법을 다 행하기엔 살맛이 안 날 것 같아서 뭔가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춰보자 싶어서 당뇨와 건강이라는 카페에도 가입했습니다. 전혀 안 보던 건강 프로그램도 VOD를 통해서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구나 슬프기도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노력하면 남은 날들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도 있습니다. 제대로 된 지침을 따른다면 말이죠. 운동을 하고 음식을 조심하는 노력뿐만 아니라 관련 도서를 읽는 것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플랜트 패러독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랍니다. 이런 타이틀에 혹하는 제가 아니기에 그렇구나 하고 넘겼는데요. 책 뒤를 보니 제가 좋아하는 저자 메멧 오즈가 추천을 했더라구요. <내 몸 사용 설명서>, <내 몸 다이어트 설명서>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그러니 이 책을 한 번 정독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플랜트 패러독스>는 렉틴과 장내 미생물 구성(저는 장내 세균총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만)에 초점을 맞춘 건드리 박사의 건강요법입니다. 렙틴이나 그렐린은 메멧 오즈의 저서를 통해 읽어서 알고 있었지만 렉틴은 생소했습니다. 
렉틴이란 동식물에서 발견되는 거대 단백질 복합체로 종류는 다양한데, 주로 식물체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숙성전에 과실이 먹히면 씨앗을 퍼트리는 데 불리하므로 동물이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방어용으로 배출, 보유합니다. 다시 말하면 미성숙과에는 렉틴이 풍부하기 때문에 후숙 과일은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렉틴은 당질 복합체와 결합하는데요. 곰팡이나 세포 표면 등에 달라붙어 체내에 들어오면 신경계, 관절, 체액 등의 당분자와 결합하게 되어 독성을 나타내거나 염증을 유발합니다. 

렉틴이 체내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처리할 수 있는 친구가 있거나 방어할 수 있는 체계가 되어 있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몇 천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어느 정도의 렉틴을 이겨 낼 수 있도록 진화되었는데요. 어째서 과거보다 현대에 렉틴에 대한 문제가 심화되었을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요.
조리법이나 식사 형태, 섭취량이 변화했다는 것도 무시 못 할 일입니다. 외식이라거나 반조리 식품의 애용, 가공식품, 테이크 아웃 - 포장하는 포장재까지도 건강에 영향을 미칩니다 - 이런 것도 문제지만 식자재를 키우는 데 드는 제초제, 농약, 비료, 첨가물 등의 물질들이 체내 정보 전달계나 장내 미생물을 교란해 렉틴에 대한 저항력을 약화합니다. 

한편, 건강에 변화를 일으키는 교란 물질은 무척 다양한데요. 
항생제를 사용하면 당연하게도 장내 미생물도 죽습니다. 그걸 다시 회복하는 데엔 2년 걸려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항생제나 소염진통제를 먹은 사람은 필히 프로바이오틱스를 먹으라고 권하더군요. 장내 미생물총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장내 세균총이 무너진 경우는 여러 가지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특히 어린이의 경우 크론병, 당뇨, 비만, 천식의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제산제는 위산을 약화시키는 약이니만큼 위장에서 위산에 의해 살균되어야 하는 유해 박테리아가 죽지 않고 소장관으로 이동하여 장누수 증후군을 유발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미토콘드리아 에너지 대사를 방해하고, 대뇌 미토콘드리아가 오염되면 치매 확률이 올라간다고 합니다. 저는 겔포스 등의 제산제에 들어있는 알루미늄이 중금속으로서 뇌에 축적되어 치매에 걸릴 수도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미토콘드리아의 오염 자체가 문제일 줄이야. 
수크랄로스, 사카린 같은 비영양성 인공감미료가 좋은 박테리아를 줄이고 나쁜 박테리아를 늘릴 뿐만 아니라 단맛- 뇌 작용을 교란시켜서 더 많은 에너지 식품을 찾게 된다는 것은 무척 유명한 이야기이죠. 어쩔 수 없이 사용하더라도 양을 적당히 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물론 저자는 이런 걸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플라스틱이나 손 세정제, 치약 등의 화학 물질에 노출되는 것, 브랜드 제초제 라운드 업의 문제, 청색광에 대한 지속적 노출에 대한 경고도 하고 있습니다.

책의 중반에 이르면 본격적인 플랜트 패러독스 요법을 실시하는 방법 및 식단이 나옵니다. 
아. 저는 못하겠어요. 이를 따르려면 일단은 경제력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아보카도와 유기농 식품이 필요하거든요. 동물복지 사육 방식에 따른 돼지고기와 특별한 닭이나 계란도 필요합니다. 게다가 식단 자체가 좀 생소해서 플랜트 패러독스 식이요법을 적용하려면 한국 서민도 가능한 식사 지침이 필요합니다. 식단은 서구인의 형편에 맞게 구성되어 있는데요. 중하 이하의 경제력을 가진 서구인도 힘들 것 같습니다.  제가 처한 형 상황에서 이 요법을 따르려면 선택이 필요합니다. '허용' 식품에서 골라 먹을 것인가. 아니면 '금지' 식품을 멀리할 것인가. 
제가 이런저런 토를 달면 건드리 박사가 그렇게 말할 거예요. 트집장이, 프로불편러, 고집장이. 

건드리 박사는 우리가 다양한 것을 충분히 섭취하기 어렵기 때문에 보충제를 섭취하라고 합니다.
렉틴 차단제로 글루코사민이나 MSM, 다중쇄 오메가-3, 폴리페놀, 파이토케미컬, 프리바이오틱스(프로바이오틱스의 먹이가 되는), 당 방어제로 크롬, 아연, 셀레늄, 메르베린, 울금추출물을 먹으라고 하는데요. 가급적이면 식이로 섭취하면 좋지 않냐고 평소 주장해왔던 저로선 목록 자체가 난감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저 역시 오메가 -3 정도는 먹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의사와 상의 후 섭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책에서 소개하는 허용 식품과 금지 식품의 목록을 살펴보면 참 어렵습니다. 
205 페이지에서 천 년 전 인간은 금지 목록의 식품을 먹지 않았다며 근거를 들었습니다. 먹지 않았기에 장내 세균총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렉틴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 이것이 근거라면 한국인으로서 천 년 전에 먹었다는 문헌 기록이나 근거가 있다면 먹어도 좋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렉틴에 면역이 있을 테니까요. 또 하나, 콜럼버스의 교환에 의해 들어온 낯선 식물을 배제하는 것이 포인트 중 하나라면 아메리카 대륙에서 본래 살았던 이의 후손은 아무 문제 없는 게 아닐까요? 오히려 유럽에서 들여온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하는 것 같은데요. 
건드리 박사가 먹지 말아야 할 음식으로 꼽은 것들 중 몇 가지는 현미나 콩, 보리, 귀리, 밀 등이 있습니다. 귀리나 밀은 그렇다손치더라도 쌀을 주식으로 삼아온 아시아인 입장에서는 현미건 백미건 정도껏 섭취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겐 그런 게 있을 테니까요. 
콩 역시 건드리 박사 입장에서는 18세기 말에 중남미로부터 들여온 음식이니 거부 목록에 올렸다고 하는데요. 홍익희 세종대 교수 칼럼에 의하면 우리는 고조선 때 이미 콩, 팥, 기장을 재배했다고 합니다(기원 1300년 경 청동기 유물과 함께 발굴). 심지어 야생종의 콩이 다양하게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콩의 원산지가 한반도이며 기원전 7세기에 중국에 전파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서양에 전파되어 19세기 중반에 미국에 전파가 되었다는데요. 현재는 전 세계 콩의 70퍼센트 이상이 미국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다량 생산하는 콩과 옥수수가 식량 문제 중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 입장에서, 그리고 렉틴 문제에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콩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별로)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콩을 이용한 발효음식이 등장하니만큼 콩의 렉틴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신라 신문왕 혼례 납폐 품목에도 쌀, 술, 기름, 메주, 장 같은 게 있었는데 우리가 안 먹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니 건드리 박사의 목록에서 음식을 선택할 때에도 신중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건강 서적이 그렇듯이 맹신을 하는 건 위험합니다. 자신에게 맞춰서 적용을 잘 해야 합니다. 저자는 자신을 믿고 눈 딱 감고 그대로 프로그램을 따라 해보면 몸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하지만 어렵습니다. 적절히 취사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들을 상당한 부분에서 뒤엎고 있기에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렉틴은 무엇인가, 우리 몸에서 무슨 짓을 하는가, 우리가 렉틴을 피해 건강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정말로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서문에서 옮긴이가 살짝 힌트를 주긴 했는데, 그래도 이럴 줄은 몰랐어요. 미식에 대한 열망은 현대인에게도 흔히 있는 일이고 맛없는 걸 먹는 것보다는 기왕 먹는 거 맛있는 걸 먹는 게 좋겠죠. 하지만 모리 마리가 깐깐하다, 고상한 혀를 가졌다기보다는 편식쟁이에 투정쟁이처럼 느껴졌습니다. 
부잣집에 태어나 나이가 드는 동안 여러 일을 겪고 노인이 되기까지 입 짧고 맛있는 걸 좋아하면서도 상냥한 분을 알고 있기에 모리 마리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습니다. 
모리 마리는 어쩐지 별세계의 사람 같았어요. ( 조금 ) 안하무인이라고 해도 될까요. 그녀가 좋아하는 프랑스인으로 따지자면, 내가 동경하는 교양 있는 '시민 '계급이 아니라 그야말로 '귀족 '이 아닌가요. 아아... 저랑은 절대 안 맞는 성격입니다. 그녀의 출생이나 교양 넘치며 딸바보인 아빠 모리 오가이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는 성장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마음에 안 듭니다. 
야마시타 카즈미의 <고토부키 미녀 저택>에 등장하는 엘리자베스 할머니는 정말로 멋대로이지만 뭔가 멋집니다. 화려하고 대단해요.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리 마리는 뭐죠? 어쩐지 계속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나이를 먹어버린 것 같은, 이 사람은요.
모리 마리에 대한 반감을 레몬 진저 차이 티로 반감시키면서 계속 읽어 나갔습니다. 음식에 관한 건방진 묘사만큼은 떨치기 어려운 유혹이니까요.

방송에 나오는 모 미식가와는 달리 모리 마리는 음식을 만드는 데에도 재주가 있었나 봅니다. 어린 시절 귀히 자라는 바람에 집안일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못하면서 음식만은 맛있게, 제대로 만들었나 봅니다. 그녀에 대해 오해를 했던 사람들도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고 나면 오해를 풀고 다시 보아줬다고 하는 걸 보면요. 20세기 초중반이었음을 감안하면 집안일을 못하는 게 큰 흉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히 사랑을 받으며 살아간 모양입니다. 요리를 제법 할 줄 아는 모리 마리였기에 음식에 관해서는 좋고 싫음이 확실했습니다. 오므라이스 위에 올라간 케첩 정말 싫어한다는 점은 저와 같아서 약간 마음이 풀렸습니다. 실은, 저... 오므라이스 자체를 싫어했거든요. 그냥 질척한 볶음밥도 싫은데 거기에 케첩 범벅이라니. 그것도 모자라 계란 이불을 덮어씌우고 거기에 케첩 한 번 더. 어린 시절부터 정말 싫어했어요. 데미글라스 소스가 올라간 오므라이스도 트라우마 때문에 웬만해서는 시도하고 싶지 않아요. 어떤 집에선 겉은 데미글라스고 안은 케첩이더군요. 정말 싫엇! 모리 마리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는 크로켓이었는데요. 요즘 크로켓(고로케)라고하면 카레빵 같은 거잖아요. 진짜가 아니라 빵 안에 뭔가가 들어있는. 전 어렸을 때부터 감자를 으깨서 고기랑 양파, 채소 볶은 걸 섞어서 이리저리 치대며 모양을 만들어 빵가루를 입혀서 튀겨낸, 진짜 크로켓을 좋아했거든요. 아주 어렸을 땐 엄마가 해주셨던 것 같은데, 엄마랑 같이 살 수 없게 된 후엔 튀김 기름을 다룰 수 있게 된 중학생 때쯤부터 가끔 직접 만들어 먹었어요. 지금은 안 만들어요. 튀김 종류를 안 만들죠. 그래도 진짜 크로켓은 먹고 싶어요. 포슬포슬 따끈따끈한 그 맛은 잊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모리 마리는 음식 묘사가 좋아서 자꾸만 허기가 져요. 차이를 마시면서 과자까지 한 봉지 뜯은 거 있죠. 아삭아삭 소리를 즐기며 그녀의 상큼한 채소 요리를 읽다 보면 맛이 상상된답니다. 맞아요. 삶은 감자를 간장에 찍어 먹는 거. 마리도 싫다고 했지만, 저도 싫을 것 같아요. 하지만 간장에 조린 감자는 맛있는데...

어라라. 모리 마리랑 통하는 구석이 제법 있네요. 공통점을 발견해나가면서 점점 그녀에게 적응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지. 
처음엔 싫었어도 나중엔 친근감이 느껴진 것은, 제가 그녀 삶에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요. 홍차와 장미의 나날을 즐기는 그녀를 만난 후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만났습니다. 이번엔 어쩐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런 모리 마리의 삶을 건조하게 축약하면 부족함 없이 귀하게 자란 아가씨가 영락을 거듭하다 결국 늙어서 고독사하는 인생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교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리가 남긴 글을 통해 그 축약된 인생의 주름을 정성껏 펴서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삶 매 순간이 사금처럼 잘게 빛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싱크대도 공용으로 써야 하는 셋방의 침대 위를 은접시와 유리병으로 장식해 유럽으로 변신시키고, 흔한 올리브색 천에서 보티첼리의 회화를 연상할 수 있었던 정신적 귀족. 풍요했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비관에 빠지는 일 없이 자기만의 미의식으로 세운 왕국에서 우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천진하고도 강한 사람. 어쩌면 아버지를 잃고 두 번의 이혼을 겪으며 아이들과도 떨어져 지내야 했던 마리의 성년 이후의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p.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기왕이 온다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분리 불안이 심한 딸은 밤이 되면 잠을 자려 하지 않았습니다. 잠이 들면 텅 빈 공간에 자신만 남겨져있는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저는 꿈나라로 유도하는 이야기를 해준 적도 있고, 아이 눈높이에 맞는 과학 이야기를 해준 적도 있었지만 피곤한 날이면 '바람 아저씨 온다.'라는 듣도 보도 못한 말로 아이를 겁주고선 제 품에 숨겨주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 줄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저는 그게 없다는 걸 알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았을 텐데요. 세계 곳곳에서 저 같은 부모가 만들어낸 다양한 형태의 괴물들이 있을 텐데요. 그것들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보기왕이 온다>라는 제목을 보았을 땐 뭔가를 잘 보는, 킹왕짱 잘 보는 녀석이 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보기왕은 서양의 부기맨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보기만, 보기마, 부기메, 보기완 등의 일본식 이름으로 변형되어 전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졌기에 실제로 이런 이름을 가진 괴물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소설 속에서도 이 명칭은 문헌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설정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비슷한 종류의 괴물은 있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망태 할아버지가 아이를 집어가는 것처럼 일본에서도 무언가가 아이를 주워가는 탓에 갑자기 아이가 사라졌으니까요. 만화나 애니, 소설에서는 아이들이 사라지는 이유에 대해 비슷한 의견을 제시합니다. 차라리 카미카쿠시인게 나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너무 슬프잖아요.
그러나 보기왕을 알고 난 후엔 무엇이든 아이를 데리러 오는 존재는 공포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제 아이에게 무슨 일을 한 걸까요.

<보기왕이 온다>는 세 챕터로 나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어린 시절 문밖에서 누군가를 찾는 기이한 존재를 만났던 히데키의 이야기, 두 번째는 히데키의 아내 가나의 이야기였는데요. 세 번째는 뜻밖에도 히데키와 가나 가족과 상관없으나 그들 부부를 도우려는 노자키의 이야기입니다. 
보기왕은 문밖에서 말을 겁니다.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테면 "리틀포니씨 계신가요?"라는 물음에 "안 계셔요."라는 대답조차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문을 열어주면 더 큰일입니다. 현관문이 유리로 되어 있다면 괴이한 회색 형체의 사람 비슷한 것을 보거나, 철제라면 도어 스코프를 통해 확인하거나, 인터폰 모니터를 통해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겠지만 저희 엄마 집처럼 이런저런 것들이 없는 곳에 그것이 찾아와 저를 찾는다면 무슨 일인가 싶어 엄마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버리지 않을까요.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택배입니다. 포니씨 계신가요." 하면 무의식중에 "네에." 대답하며 문을 열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커다란 입을 가진 보기맨은 집 안으로 들어와 자신이 원하는 이를 데려가기 위해 방해가 되는 자들을 물어뜯습니다. 아니 반드시 집이 아니어도 대답만 한다면 회사로도, 커피숍으로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전화를 걸어 대답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애초에 그와 인연을 맺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왜 히데키 가족을 노리는 걸까요?

이 소설에는 수많은, 다양한 폭력이 들어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가하는 폭력, 의식적으로 가한 폭력, 저항할 수 없었던 사람들, 속으로 삭한 사람들, 상처 준 자와 받은 자들.... 그런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보기왕이 온다>는 데뷔작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한 묘사와 흡인력이 뛰어난 소설입니다. 일본 호러 대상의 심사위원이었던 미야베 미유키, 기시 유스케 등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2018년 12월 <고백>의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에 의해 오카다 준이치, 츠마부키 사토시 주연의 영화로 개봉합니다. 마츠 다카코와 코마츠 나나도 나온다는군요. 제목은 <온다> 이고요. 긴장 가득했던 그 분위기를 영화에서 잘 살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연진도 그렇고 감독도, 정말 기대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담백하게 산다는 것 - 불필요한 감정에 의연해지는 삶의 태도
양창순 지음 / 다산북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는 인간관계를 힘들어합니다.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블로그 댓글 남기는 것도 무척 어려워합니다. 상처받는 것도, 주는 것도 싫어서 지나치게 신경 쓰는 탓인 것 같습니다. 그런 탓에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듭니다. 랜선 인간관계도 그러한데 오프에선 오죽할까요. 저는 인간관계를 빚지 않는 히키코모리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불행하고 슬프다면 모를까, 괜찮습니다. 누군가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냐 물었습니다만 전혀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인간관계 맺는 걸 좋아하고 술자리를 즐기는 지인이 혼자 영화 보고 여행하는 걸 보며 정말 그는 행복한 걸까 궁금해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가 제게 말했습니다. 사람 좀 만나고 다니라고, 술 한 잔씩 하고 다니라고, 좀 돌아다니라고. 
저는 늘 돌아다닙니다. 푸른 하늘을 만나고, 부서지는 파도를 띄운 바다도 만납니다. 도시락을 싸서 박물관도 가고, 도서관도 갑니다. 축제 구경도 갑니다. 충고를 해준 그처럼 혼자서요. 때로는 딸이나 엄마와 함께 갑니다. 그게 저에게 있어 가장 안정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저는 즐겁습니다. 평소 직업상의 이유로 감정 노동을 하고 있는데, 쉴 때마저 감정을 조절해가며 누군가 놀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저에게 있어서 노동이지 쉬는 게 아니에요. 
어색함을 떨구는 건 저에게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가는 게 잘하고 있다는 소리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타인이 걱정하는 이유도 압니다. 혹시 나중에 친구하나 없이 외로워지면 어떡하느냐고 묻습니다. 그건 그때 걱정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나의 이런 성향이 아이에게 전이되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제가 처음부터 이런 성격이었을까요? 원래는 무대 체질입니다. 무대에 올라가서 뭘 하든 떠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살아가면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 비밀이 쌓여가며 이렇게 변해갔습니다. 전, 거짓말을 잘합니다. 그렇지만 거짓말하는 건 너무너무 힘듭니다.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최소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왜 거짓말을 할까요. 
아마도 상처가 싫어서 일 겁니다. 저는 상처의 공포에서 벗어나 '담백하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이번 생은 처음입니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실수하고, 넘어지고, 상처 입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에요. 어느 작가의 말처럼 처음 하는 일도 잘 해내는 존재는 신밖에 없습니다. 신이 아닌 우리는 자기중심을 꽉 잡고 단지 한 걸음씩 떼어놓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p.51

이 세상에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위축될 필요는 없다. 좋은 경험은 좋은 경험대로, 나쁜 경험은 나쁜 경험대로 나를 성장시키는 주춧돌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담백한 삶의 기술이다. 
-p.72

누구에게도 오해받지 않도록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라. 어떤 경우에나 당신을 오해하고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한둘은 있기 마련이다.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
-p.103

마음에 여유를 갖는 건 삶의 어느 순간에서는 정말로 중요하다. 인간관계도 담백해지므로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다. 우린 너 나 할 것 없이 담백하고 편안한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호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p. 1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있게 딸 성교육 하는 법 - 성교육 전문가 손경이의 딸의 인생을 바꾸는 50가지 교육법
손경이 지음 / 다산에듀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평소 젠더 편견을 갖지 않게 아이를 교육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저래야 한다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개인의 특성, 관심분야의 다름, 힘의 차이 등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아이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자랐으면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여자가 무슨, 여자가 어딜 등등 그런 소리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제 생각대로 잘 자라주었고 남자나 여자가 아닌 '자신'으로 존재합니다. 쇼트커트에 바지를 즐겨 입고 레이스나 프릴은 질색하면서도 귀걸이, 반지 같은 액세서리를 좋아하며, 학교 갈 때는 선크림까지만. 휴일엔 화장을 즐기는 개성 있는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 아이와 외출하면 위아래로 스캔하는 사람을 적어도 셋은 만나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누구보다 멋진 녀석이니까요. 미용실에서 머리를 짧게 잘라달라고 했을 때 원장님이 '엄마가 아들이 없어서 딸을 아들처럼 키우는구나.'하셨지만 그건 절대 아닙니다.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데다 본인도 원하기 때문이니까요. 만일 머리를 기르겠다고 하면 스스로 생각하여 결정한 것이므로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너무 안 어울리면 이야기하겠지만요. 누가 뭐래도 주체성 강하고 개성적인 멋진 내 딸을, 저는 믿습니다.

성교육 전문가 손경이의 딸의 인생을 바꾸는 50가지 교육법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 있게 딸 성교육 하는 법>은 '성'하면 먼저 떠오르는 섹스나 생식기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고정된 성 역할을 부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당황하지 않고 아들 웃으면서 성교육하는 법>을 출판한 후 딸의 성교육을 위한 책도 출판한 것인데요. 주체성, 젠더 감수성을 포함하여 영유아기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친밀감과 유대감을 이어가며 자연스럽게 성교육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해 조언하고 알려줍니다. 

딸과 저는 동문 선후배로, 제가 고등학생 때의 성교육은 과학적인 것을 넘어서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비디오를 통한 교육시간에 반 친구 예수가 은혜롭게도 화면을 흑백으로 전환시켜 준 덕분에 양동이에 가득한 태아 사체의 붉은빛은 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서른이 넘을 때까지도 그때의 강렬한 기억은 트라우마처럼 남아, 섹스의 결과물은 임신이고 낙태는 지옥불에 떨어질 중죄라 여겼습니다. 섹스는 사랑받기 위한(사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수단이었고 늘 임신에 대한 공포가 따라다녔습니다. 결국 마흔이 넘어 나 자신이 무성애자임을 깨달았습니다. 학습된 것인지 원래 그랬던 건지 모르겠지만 잘못된 성교육, 어린 시절부터 자주 마주친 바바리맨, 성추행범들의 행위까지 합쳐져 내 안에서 섹스에 관한 혐오와 공포가 꾸준히 커졌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섹스를 혐오한다고 해서 모든 이들의 섹스를 혐오하는 건 아닙니다. 짬뽕 알레르기가 있어서 못 먹는 건 내 사정이지 그걸 남들까지 못 먹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내 아이는 올바른 성 지식을 갖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어릴 때부터 그 수준에 맞는 교육을 계속해왔습니다. 쑥스럽거나 하진 않았어요. 어차피 둘 다 이과 감성이라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걸로 시작하니 쉬웠습니다.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엄마 씨와 아빠 씨가 어떻게 만나느냐는 설명을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 있게 딸 성교육 하는 법>에서처럼 블록의 요철이 만나는 것으로 했으면 좋았을걸. 우주 정거장에서 도킹하는 걸로 설명하고 말았지 뭔가요. 손동작 덕분에 알아들어 다행이었습니다. 초기 교육 덕분에 지금은 스스로 야설도 찾아 읽는 건전한(?)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원래 이런 건 독학하면 잘못된 - 폭력적이고 여자 입장에선 수동적인- 지식을 쌓을 수도 있기에 제대로 된 것을 알고 영화를 볼 때처럼 현실과 망상을 분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산에듀에서 출판된 손경이의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 있게 딸 성교육 하는 법>을 읽으며 난 참 잘해오고 있었구나 하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데 딸이 그런 책은 뭐 하러 빌려왔냐고 물었습니다. 빌린 게 아니라 내 책이라 하니 자신은 더 이상 교육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였습니다.
"읽다 모르는 거 있음 물어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