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정말로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서문에서 옮긴이가 살짝 힌트를 주긴 했는데, 그래도 이럴 줄은 몰랐어요. 미식에 대한 열망은 현대인에게도 흔히 있는 일이고 맛없는 걸 먹는 것보다는 기왕 먹는 거 맛있는 걸 먹는 게 좋겠죠. 하지만 모리 마리가 깐깐하다, 고상한 혀를 가졌다기보다는 편식쟁이에 투정쟁이처럼 느껴졌습니다. 
부잣집에 태어나 나이가 드는 동안 여러 일을 겪고 노인이 되기까지 입 짧고 맛있는 걸 좋아하면서도 상냥한 분을 알고 있기에 모리 마리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습니다. 
모리 마리는 어쩐지 별세계의 사람 같았어요. ( 조금 ) 안하무인이라고 해도 될까요. 그녀가 좋아하는 프랑스인으로 따지자면, 내가 동경하는 교양 있는 '시민 '계급이 아니라 그야말로 '귀족 '이 아닌가요. 아아... 저랑은 절대 안 맞는 성격입니다. 그녀의 출생이나 교양 넘치며 딸바보인 아빠 모리 오가이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는 성장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마음에 안 듭니다. 
야마시타 카즈미의 <고토부키 미녀 저택>에 등장하는 엘리자베스 할머니는 정말로 멋대로이지만 뭔가 멋집니다. 화려하고 대단해요.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리 마리는 뭐죠? 어쩐지 계속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나이를 먹어버린 것 같은, 이 사람은요.
모리 마리에 대한 반감을 레몬 진저 차이 티로 반감시키면서 계속 읽어 나갔습니다. 음식에 관한 건방진 묘사만큼은 떨치기 어려운 유혹이니까요.

방송에 나오는 모 미식가와는 달리 모리 마리는 음식을 만드는 데에도 재주가 있었나 봅니다. 어린 시절 귀히 자라는 바람에 집안일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못하면서 음식만은 맛있게, 제대로 만들었나 봅니다. 그녀에 대해 오해를 했던 사람들도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고 나면 오해를 풀고 다시 보아줬다고 하는 걸 보면요. 20세기 초중반이었음을 감안하면 집안일을 못하는 게 큰 흉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히 사랑을 받으며 살아간 모양입니다. 요리를 제법 할 줄 아는 모리 마리였기에 음식에 관해서는 좋고 싫음이 확실했습니다. 오므라이스 위에 올라간 케첩 정말 싫어한다는 점은 저와 같아서 약간 마음이 풀렸습니다. 실은, 저... 오므라이스 자체를 싫어했거든요. 그냥 질척한 볶음밥도 싫은데 거기에 케첩 범벅이라니. 그것도 모자라 계란 이불을 덮어씌우고 거기에 케첩 한 번 더. 어린 시절부터 정말 싫어했어요. 데미글라스 소스가 올라간 오므라이스도 트라우마 때문에 웬만해서는 시도하고 싶지 않아요. 어떤 집에선 겉은 데미글라스고 안은 케첩이더군요. 정말 싫엇! 모리 마리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는 크로켓이었는데요. 요즘 크로켓(고로케)라고하면 카레빵 같은 거잖아요. 진짜가 아니라 빵 안에 뭔가가 들어있는. 전 어렸을 때부터 감자를 으깨서 고기랑 양파, 채소 볶은 걸 섞어서 이리저리 치대며 모양을 만들어 빵가루를 입혀서 튀겨낸, 진짜 크로켓을 좋아했거든요. 아주 어렸을 땐 엄마가 해주셨던 것 같은데, 엄마랑 같이 살 수 없게 된 후엔 튀김 기름을 다룰 수 있게 된 중학생 때쯤부터 가끔 직접 만들어 먹었어요. 지금은 안 만들어요. 튀김 종류를 안 만들죠. 그래도 진짜 크로켓은 먹고 싶어요. 포슬포슬 따끈따끈한 그 맛은 잊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모리 마리는 음식 묘사가 좋아서 자꾸만 허기가 져요. 차이를 마시면서 과자까지 한 봉지 뜯은 거 있죠. 아삭아삭 소리를 즐기며 그녀의 상큼한 채소 요리를 읽다 보면 맛이 상상된답니다. 맞아요. 삶은 감자를 간장에 찍어 먹는 거. 마리도 싫다고 했지만, 저도 싫을 것 같아요. 하지만 간장에 조린 감자는 맛있는데...

어라라. 모리 마리랑 통하는 구석이 제법 있네요. 공통점을 발견해나가면서 점점 그녀에게 적응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지. 
처음엔 싫었어도 나중엔 친근감이 느껴진 것은, 제가 그녀 삶에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요. 홍차와 장미의 나날을 즐기는 그녀를 만난 후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만났습니다. 이번엔 어쩐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런 모리 마리의 삶을 건조하게 축약하면 부족함 없이 귀하게 자란 아가씨가 영락을 거듭하다 결국 늙어서 고독사하는 인생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교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리가 남긴 글을 통해 그 축약된 인생의 주름을 정성껏 펴서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삶 매 순간이 사금처럼 잘게 빛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싱크대도 공용으로 써야 하는 셋방의 침대 위를 은접시와 유리병으로 장식해 유럽으로 변신시키고, 흔한 올리브색 천에서 보티첼리의 회화를 연상할 수 있었던 정신적 귀족. 풍요했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비관에 빠지는 일 없이 자기만의 미의식으로 세운 왕국에서 우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천진하고도 강한 사람. 어쩌면 아버지를 잃고 두 번의 이혼을 겪으며 아이들과도 떨어져 지내야 했던 마리의 성년 이후의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p.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