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어서 밤새 읽는 진화론 이야기 재밌밤 시리즈
하세가와 에이스케 지음, 김정환 옮김, 정성헌 감수 / 더숲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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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서 밤새 읽는 진화론 이야기>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밤새, 하루 만에 읽는 건 무리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밤새 읽는다고 되어 있지 하룻밤만에 읽을 수 있다고 적혀있지는 않으니, 하루 만에 읽고 싶었던 건 제 욕심이었겠죠. 
200페이지의 재미있는 과학 도서를 읽는데 며칠 걸린 건 나들이를 다녀왔기 때문만은 아니고, 제가 가지고 있는 예비지식이 모래알 같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으며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다윈의 적자생존의 기본 개념을 머릿속으로 되새겨보았습니다. 멘델의 주름진 완두콩이나 DNA의 나선형 구조가 유전과 관계된 것에 관한 지식의 전부인 저는 그래도 A, G, C, T는 잊어버리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며 코돈 -아미노산의 종류를 결정짓는 세 개의 연속된 뉴클레오티드를 트리플렛 코드라 하는데 이것의 단위를 코돈이라고 합니다. 한 개의 아미노산을 특정 짓는 단위죠.- 이라는 단어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특하다며 스스로를 칭찬해주었습니다.

실은 한 달여 전부터 계속 머릿속에서 맴도는 리처드 도킨스라는 이름 때문에 그의 저서를 읽어보고 싶었지만 지식이 전무함에 아주 기초적인 책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재밌어서 밤새 읽는 진화론 이야기>였습니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어보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았거든요. '재밌어서 밤새 읽는'시리즈는 과학을 알기 쉽게 잘 풀어나가는 흥미로운 시리즈인데요. 슬프게도 이 책의 부분부분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지요. 시험 보는 것도 아닌데 초집중하면서요. 그래서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이 책은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깊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저자가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은근슬쩍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이론도 던져 넣었지만 상관없습니다. 이쪽도 저쪽도 저에게는 신선한(그럴 리가!!) 내용이었거든요.

<재밌어서 밤새 읽는 진화론 이야기>는 다윈에서 리처드 도킨스에 이르기까지 가장 기초적인 진화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생물의 다양성과 적응, 퇴화(로 보이지만 사실은 진화), 나아가 멸종 혹은 그 방어책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과학에 관심 있는 고등학생 이상 성인까지 읽기 좋은 책이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기존의 '재밌어서~'시리즈보단 약간 어려운 느낌이 있습니다.(저에게만 그럴지도 모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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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백작부인
레베카 존스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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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읽었던 기담 중 하나는 피의 백작부인 에르제베트 바토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엘리자베스 바토리라고 쓰여있었는데요.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무섭다기보다는 기이했습니다. 처녀의 피로 목욕을 하다니 너무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에 제게는 그녀의 이야기보다 발라히아의 블러드 체뻬쉬(블러드 3세 드러쿨레아)의 이야기가 더 두려웠습니다. 어른이 된 후 에르제베트 바토리에 관한 다른 관점의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요. 그녀의 영지를 차지하고자 했던 친척이 모함을 했던 것으로, 누명을 씌워 유폐하기 위한 구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읽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영지에 그렇게 많은 시신을 매장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며, 자신의 미모를 가꾸기 위해 생명의 존엄을 무시한 파렴치하고도 잔인한 희대의 연속 살인마로 몰아가다니, 인간의 욕망이란 - 어느 쪽이 진실이든지 - 참으로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내가 하녀들의 살점을 먹었다느니, 온몸에 피를 뒤집어쓸 때까지 그들을 맨손으로 때렸다느니, 영주와 메제리를 죽이기 위해 주문과 독약을 썼다느니 하는 것들 말이다. 
-p.96

레베카 존스는 방대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해석대로 에르제베트 바토리를 다시 살려내었습니다. 바로 <피의 백작부인>이라는 소설에서요. 
감옥에서 에르제베트가 사망 후 그녀가 아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남겼다는 목사의 보고서로 소설이 시작됩니다. 간단한 서신 이후 저는 그녀의 아들이 되어 어머니가 남긴 길고 긴 서신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실은 그 편지가 아들에게 닿지 않았겠지만요. 그녀는 자신의 현재 상황보다는 과거를 회상하며 편지를 썼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니 아버지가 함께 있던 그 무렵부터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열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나더슈디 백작가에 시집을 갔지만 약혼자는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언드라시라는 약혼자의 친척에게 마음을 뺏겨 몰래 아이까지 낳지만 그 남자에게 배신 당하고 맙니다. 정해진 이별이었겠지만 남자에게 배신 당하는 일은 그녀의 인생에서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당시에 많은 남자들이 원래 그랬던 것인지 - 어쩌면 현재에도 그럴지도 모르지만 - 남자들은 그녀에게 접근했고 그녀를 떠났습니다. 

옛날엔, 생은 짧고 연애의 거리는 길었기에 연인을 기다리고 연서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참으로 애틋했던 것 같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아버린 남자들이 그녀의 피에 흐르는 폭력을 잡아 흔들어 깨웠는지도 모릅니다. 어리거나 젊었을 때라면 욱하는 성미에 과격한 행동을 할 수도 있지 않나 싶지만 에르제베트의 경우엔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그녀의 폭력은 주로 하녀를 향해있었는데요. 파렴치한 짓을 했다거나, 자신의 남자와 동침했다거나, 물건을 훔쳤다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하녀의 항변은 변명으로만 여기고 잔인하게 매질을 해댔습니다. 저는 그 당시 배경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이 잘 못되었는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한 행동은 귀족이자 지주로서의 권한에 속한 것뿐이었다. 죽은 여자들은 내 집안을 해치는 창녀들과 도둑들이었다. 내게는 그들에게 적절한 벌을 줄 권리가 있다. 내 눈앞에서 방종과 도둑질이 계속되어도 보고만 있어야 하겠느냐? 그들이 내 재산뿐만 아니라 네가 물려받을 것까지 훔쳐내 우리가 알거지가 될 때까지 모른 척해야 되겠느냐? 그럴 순 없었다.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p.97

가문을 지키고 재산을 지키려면 안주인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고, 남자를 뺏어가놓고도 뻔뻔한 태도로 나를 무시하는 언동을 한다면 살이 터져 나갈 정도로 맞아도 싼 것이 아닐까요? 에르제베트 바토리야말로 정말 불쌍하고 안타까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요...라고 생각하다니!!! 작가가 부여한 그녀의 매력에 젖어들었나 봅니다. 

책을 닫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에겐 본디 지니고 있었던 폭력성도 있었고, 사디스틱 한 면도 있었습니다. 하녀들을 다루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저지른 일은 지나치게 난폭한 일이었다는 점엔 변함이 없었습니다. 전쟁과 권모술수가 넘쳐나는 중세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살인마라는 건 분명하거든요. 자신은 살인마라는 자각이 없었을 테지만요.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고 보면 사이코패스 성향이 많이 보이는군요. 

바토리에 대한 진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로 인해 또 다른 그녀의 모습을 엿보고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 그녀도 나쁘지만, 그녀의 남자들이 더 나쁩니다. 
--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서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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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행록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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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과거를 돌아보면 제대로 살았던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격 자체도 특이한데다가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언제나 발버둥 치고 때로는 헛된 꿈을 꾸기도 했거든요. 그게 내면의 갈등이기만 했다면 혼자만의 괴로움이겠지만 겉으로 드러나는걸요. 아니 뭐 저런 애가 다 있었나 싶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가지각색이었을 겁니다.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보다는 별로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테고요. 지금이라고 달라졌을까요? 직접 만나는 사람이 확실히 적으니 도마에 오를 일도 적을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는 다릅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잖아요. 같은 사람을 보면서도 각기 다른 평을 하는 걸 보면 그래요. 전 국민이 손가락질하는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과격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 사람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제가 과거의 저 때문에 부끄러워하듯, 자신의 행동을 후회할까요? 어떤 이들은 죽을 때까지 과거의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던데요. 과거의 자신의 행동이 방아쇠가 되어 현재의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누쿠이 도쿠로의 <우행록>에 나오는데요. 어떤 사건이었을까요?

중산층 이상의 단란한 가족, 명문대 출신으로 괜찮은 회사에 다니는 아빠, 미인에 교양 있고 우아한 전업주부 엄마, 귀여운 여자아이, 그리고 남자아이. 남부럽지 않아 보이던, 그래서 남들의 부러움을 사던 일가족이 자신들의 집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단순 강도가 아닌 듯, 부부를 여러 번 찌른 걸로 보아 원한 살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사건을 추적하는 한 사람이 있는데요. 이 사람은 인터뷰어로서 피해자의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합니다. 동네의 주부로 시작하는 인터뷰는 인터뷰어의 대사 없이 인터뷰이의 말로만 진행됩니다. 그러니까 한 챕터에 한 사람씩, 자신이 알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요. 피해자의 지인들은 과거의 인연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의견이 아닌 척하며 이야기할 때도 있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때도 있습니다. 인터뷰를 읽어나가다 보면 점점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게 되는데, 끝으로 갈수록 초초함이 배가 됩니다.
챕터 사이에선 한 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오빠에게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하는데, 여자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학대를 받아왔습니다. 양친의 폭력에서 의지가 되는 건 오직 오빠뿐이었는데요. 오빠도 어린 탓에 든든한 보호막은 되어주지 못했지만,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만은 확실히 전해져 동생은 오빠를 굳게 믿었습니다. 커가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강인해진 오빠는 누구보다도 믿음직한 존재가 되었고, 동생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우행록>은 이미 많은 미스터리 마니아에게 읽힌 책입니다. 잘 짜인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마주치게 되는 뜻밖의 진실에 놀란다는 다소 상투적인 표현도 들어보았지만, 정말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어 나가는데 진실을 알 수 있게 되기는 하는 건가, 혹시 열린 결말로 끄내는 건 아닌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저는 어느새 누쿠이 도쿠로가 짜놓은 그물 위에서 다가오는 거미를 기다리고 있는 작은 벌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놀랍고도 재미있는 이 미스터리를 꼭 한번 읽어보시라 추천하고 싶지만, 작년인가... 제가 구입할 때에 재정가 도서가 되어 지금은 절판인가 봅니다. 혹시 도서관에서 마주치신다면, 이 책이 그렇게 재미있다지? 하며 읽어주세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들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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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고 말해 스토리콜렉터 52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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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고 말해."
이 말이 추악하게 들린 건 처음입니다.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 법이지만, 완전한 복종과 사육을 위해 사용하다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소녀는 생존을 위해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하다, 가엾은 사디스트 자식아. 정말 미안해. 그때 눈을 제대로 지르지 못해서, 미안해. 벽돌로 네놈의 머리를 완전히 박살 내지 못해서, 미안해. 네 눈알을 뽑아내지 못해서. 나는 이렇게 외쳐대고 싶지만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나는 공처럼 몸을 웅크린다.
-p.548

조 올로클린 시리즈 중 북로드 스토리콜렉터의 책으로는 세 번째로 소개된 <미안하다고 말해>는 원작 시리즈로는 여섯 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혹시 나중에 순서가 뒤바뀌어 앞쪽의 작품이 다음 순서로 출간될는지 어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되도록 순서대로 나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두 편의 소설 <산산이 부서진 남자>, <내 것이었던 소녀> 모두 충격적이며 스릴 넘쳤고, 작품 속에 독자를 잡아두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지만, 이번의 <미안하다고 말해>는 그 힘이 가히 폭발적이라, 책을 펼치고 첫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내 이름은 파이퍼 해들리다. 그리고

나는 3년 전 여름방학의 마지막 토요일에 행방불명되었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고, 도망친 것도 아니었다. (중략)
나는 계속 여기 있었다. 
-p.9

이 첫 대목은 책의 맨 마지막 부분과 딱 맞아떨어져 가슴 한 켠이 찡 해옴을 느꼈습니다. 

소설의 화자는 둘입니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조 올로클린과 납치된 소녀 파이퍼. 심리학자인 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에 개입하며 추리해나가고, 파이퍼는 회상록을 쓰듯이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기록해나갑니다. 그 끔찍했던 시간들을 하나씩 하나씩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씁니다. 그녀의 종이 위에 적힌 것들은 지옥이었습니다.


현실 속 공포는 상상 속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한때 나는 축제 마당의 탈것들을 좋아했다. 높이 올랐다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그런 공포는 즐길만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공포에는 긍정적인 면도, 해피엔딩도 없다.
-p.327


조 올로클린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경찰의 요청에 농장 부부 방화 살인 사건에 대한 프로파일링 및 용의자에 대한 심리 분석을 합니다. 무죄 추정이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용의자는 벌써 피의자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수사 결과 그의 행적과 농장의 방문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얽혀있음을 알게 됩니다. 3년 전 두 명의 소녀가 실종된 사건이었는데요. 그중 한 명의 학대당한 시신이 발견되어 경찰도, 조 올로클린도 3년 전의 사건을 추적합니다. 소녀 실종 사건에는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는 한 남자의 열등감과 비뚤어진 욕망이 바닥에 깔려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멀쩡하며 타인에게 의심을 받을 건더기가 전혀 없는 이 남자는 두 소녀를 납치하여 3년 동안 자신의 집에 감금하고 학대를 일삼아왔습니다. 태쉬는 남자로부터 파이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린 소녀에게는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집에서 탈출하여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지만, 결국 얼음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파이퍼는 태쉬를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배고픔보다 추위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태쉬의 부재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장소에 또 다른 친구가 오는 건 더 싫었습니다. 태쉬가 안전하기를, 자신을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 파이퍼를, 남자는 집요하게 괴롭히고 협박했습니다.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미안하다"라고 말하라며.

파킨슨병 1기를 앓고 있는 조 올로클린은 약물로 병세 진행을 늦추고 있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는 몸뚱어리 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딸 찰리 또래에 납치된 두 소녀를 생각하면 쉽사리 사건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추리와 프로파일링을 하며 점점 진상에 가까워지는 올로클린.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어른들의 사정도 알아버렸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나머지 한 소녀, 파이퍼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미안하다고 말해>는 앞의 두 작품과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조 올로클린은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 기드온 사건으로 인해 아내와 멀어지고 별거하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이 좀 더 산뜻해 보입니다. 불편하게 얽혀있던 이런저런 복잡한 것들에서 조금 해방이 되어서 그런 걸까요. 지금의 그라면 파킨슨병 따위가 자신을 좀먹게 둘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의 그를 보면, 여전히 그에게는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아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번 소설에서 갑자기 문장이 더 잘 정돈된 것 같았는데요. 작가의 힘인지, 역자의 힘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읽기 편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다만, 같은 사람이 말하는  내용이, 연속되는 두 번의 따옴표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 자칫 다른 사람의 대사로 오독될 수 있어서 약간 성가셨습니다. 그런 사소한 부분만 제외한다면, 이 책은 대단한 스릴러입니다.
600여 페이지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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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특권
아멜리 노통브 지음, 허지은 옮김 / 문학세계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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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지금까지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새롭게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열심히 키우던 캐릭터가 망캐가 되어버리면 눈물을 머금고 '에라 모르겠다. 처음부터 다시 키우자'라는 심정으로 마음에 드는 새 캐릭터를 만들어서 초보 사냥터에서 요령 좋게 사냥을 하는 - 하지만 전에 키우던 본캐 장비를 팔아 아덴은 넉넉히 챙겨두었으니 풍요로운 환경에서 열심히 필드를 누비는 그런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환경과 위치가 달라진다고 해도 사람의 본성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니 결국은 같은 삶을 반복하고 말뿐이라는 걸 깨달은 후에는 인생 리셋 같은 걸 꿈꾸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생 역전은 가끔 꿈꿉니다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리셋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주 풍요로워 보이는 사람의 인생을 내 것인 양 살 수 있다면 갈등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리셋을 꿈꾸지 않는 저라도 순간적인 갈등은 할 것 같습니다.

아멜리 노통브의 <왕자의 특권>의 주인공 밥티스트 보르다브는 자신의 발밑에 바로 그 기회가 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밤 모임에서, 낯선 사람이 갑자기 자신의 집에 들어와 죽어버린다면 망설이지 말고 택시에 올라타 병원으로 가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는데요. 올라프 질더라는 남자가 자동차가 고장 났는데, 휴대폰도 없고 근처의 공중전화도 고장 났다며 전화를 한 번 쓰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남자가 번호를 누르고 연결이 되기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쓰러지고 그대로 죽어버립니다. 이런 일이 다 있을까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상상을 시작한 공상가 밥티스트는 체격과 대략적인 인상착의가 비슷한 그의 인생을 자신이 대신 살기로 결심합니다. 지긋지긋한 회사는 때려치우고 말이지요. 시간이 흘러 시신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죽은 건 밥티스트라고 여겨질 거라 믿습니다. 

밥티스트, 아니 이젠 올라프인 남자는 '전'올라프의 신분증과 자신의 예금 잔고와 비슷한 현금이 들어있는 그의 지갑을 들고, 고장 났다던 그의 차를 몰고 멀쩡한 공중전화를 지나 그의 집이 있는 베르사유로 향합니다. 집의 동태를 살피고 멋대로 화장실을 사용한 김에 허기를 채우려 요리를 해 먹었는데요. 아, 두근두근. 저 같은 안정기 심박수 103인 사람은 당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단 침입한 남의 집에서 오믈렛을 해 먹다니요. 심지어 '전'올라프의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자연스럽고 대담하게 응대합니다. 조금은 긴장 한 것 같지만 괜찮습니다. 어쩌면 속으로는 저만큼 심장이 달음박질치고 있을지도 모르죠. 
'현'올라프는 '전'올라프의 지인인척하며 그 집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남편의 부재중에 손님이 와서 묵고 가는 일이 다반사인지 아내 역시 자연스럽게 그를 대합니다. 

그녀를 지그리드라고 부르기로 한 '현'올라프는 선임자- 전 올라프를 어느새 선임자라고 부르고 있더군요-의 모든 것을 누립니다. 그의 저택, 그의 식량, 그의 엄청나게 많은 샴페인... 선임자의 통장은 마르지 않는 샘물인가 봅니다. 지그리드가 명품 사냥을 다녀도 한도가 초과되는 법이 없는 걸 보면요.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지그리드의 옛날 성이 밥티스트라지 뭐예요. 
소름 끼치는 일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모든 것이 우연이라기엔 석연찮은 부분이 한둘이 아닙니다. 외모와 키가 비슷한 한 남자가 전날 나누었던 담소대로 그의 집에 찾아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자동차도, 공중전화도 모두 멀쩡했던 것도 이상한데, 밥티스트일적에 받았던 대량의 포도주 구매에 관한 이야기... 어쩌면 그 포도주가 올라프의 초대형 저장고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닐까요? 그냥 상표만 동일한 건지. 저 역시 이름만 만화에서 여러 번 보았던 돔 페리뇽을 이 집에서는 마음껏 마실 수 있다지만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불안한 건 불안한 거고, 이 집에는 무슨 마력이 있는지 사람의 긴장을 놓게 합니다. 

과연 선임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뭘 하는 사람이었을까요? 스파이? 대부호? 조직의 형님? 그의 아내조차 확실하게 말을 하지 않기에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저에게만 살짝 말해달라고 해 볼까요? .... 비밀인가 봅니다. 뭐, 적어도 눈사람은 아니겠죠.

<왕자의 특권>이라는 소설이 워낙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있다 보니 읽는 도중 추리소설로 착각했습니다. 올라프는 누구인가, 이렇게 타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어도 괜찮은 건가. 그만. 그런 건 그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미스터리를 꼭 풀고야 말겠다는 마음가짐으로는 이 소설을 즐길 수 없습니다. 그냥 이 상황 자체를 즐기면 됩니다. 이대로도 좋지 않은가요.

신분이나 신원을 교체함으로써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는 점에서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너무 심각해하지 말아요.

** 제목이 어째서 <왕자의 특권>이냐면, 부자는 빚이 많아도 여전히 부자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특권이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빚이 많을수록 더욱 대우받는다는 건데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확실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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