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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백작부인
레베카 존스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 읽었던 기담 중 하나는 피의 백작부인 에르제베트 바토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엘리자베스 바토리라고 쓰여있었는데요.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무섭다기보다는 기이했습니다. 처녀의 피로 목욕을 하다니 너무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에 제게는 그녀의 이야기보다 발라히아의 블러드 체뻬쉬(블러드 3세 드러쿨레아)의 이야기가 더 두려웠습니다. 어른이 된 후 에르제베트 바토리에 관한 다른 관점의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요. 그녀의 영지를 차지하고자 했던 친척이 모함을 했던 것으로, 누명을 씌워 유폐하기 위한 구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읽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영지에 그렇게 많은 시신을 매장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며, 자신의 미모를 가꾸기 위해 생명의 존엄을 무시한 파렴치하고도 잔인한 희대의 연속 살인마로 몰아가다니, 인간의 욕망이란 - 어느 쪽이 진실이든지 - 참으로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내가 하녀들의 살점을 먹었다느니, 온몸에 피를 뒤집어쓸 때까지 그들을 맨손으로 때렸다느니, 영주와 메제리를 죽이기 위해 주문과 독약을 썼다느니 하는 것들 말이다.
-p.96
레베카 존스는 방대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해석대로 에르제베트 바토리를 다시 살려내었습니다. 바로 <피의 백작부인>이라는 소설에서요.
감옥에서 에르제베트가 사망 후 그녀가 아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남겼다는 목사의 보고서로 소설이 시작됩니다. 간단한 서신 이후 저는 그녀의 아들이 되어 어머니가 남긴 길고 긴 서신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실은 그 편지가 아들에게 닿지 않았겠지만요. 그녀는 자신의 현재 상황보다는 과거를 회상하며 편지를 썼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니 아버지가 함께 있던 그 무렵부터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열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나더슈디 백작가에 시집을 갔지만 약혼자는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언드라시라는 약혼자의 친척에게 마음을 뺏겨 몰래 아이까지 낳지만 그 남자에게 배신 당하고 맙니다. 정해진 이별이었겠지만 남자에게 배신 당하는 일은 그녀의 인생에서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당시에 많은 남자들이 원래 그랬던 것인지 - 어쩌면 현재에도 그럴지도 모르지만 - 남자들은 그녀에게 접근했고 그녀를 떠났습니다.
옛날엔, 생은 짧고 연애의 거리는 길었기에 연인을 기다리고 연서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참으로 애틋했던 것 같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아버린 남자들이 그녀의 피에 흐르는 폭력을 잡아 흔들어 깨웠는지도 모릅니다. 어리거나 젊었을 때라면 욱하는 성미에 과격한 행동을 할 수도 있지 않나 싶지만 에르제베트의 경우엔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그녀의 폭력은 주로 하녀를 향해있었는데요. 파렴치한 짓을 했다거나, 자신의 남자와 동침했다거나, 물건을 훔쳤다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하녀의 항변은 변명으로만 여기고 잔인하게 매질을 해댔습니다. 저는 그 당시 배경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이 잘 못되었는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한 행동은 귀족이자 지주로서의 권한에 속한 것뿐이었다. 죽은 여자들은 내 집안을 해치는 창녀들과 도둑들이었다. 내게는 그들에게 적절한 벌을 줄 권리가 있다. 내 눈앞에서 방종과 도둑질이 계속되어도 보고만 있어야 하겠느냐? 그들이 내 재산뿐만 아니라 네가 물려받을 것까지 훔쳐내 우리가 알거지가 될 때까지 모른 척해야 되겠느냐? 그럴 순 없었다.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p.97
가문을 지키고 재산을 지키려면 안주인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고, 남자를 뺏어가놓고도 뻔뻔한 태도로 나를 무시하는 언동을 한다면 살이 터져 나갈 정도로 맞아도 싼 것이 아닐까요? 에르제베트 바토리야말로 정말 불쌍하고 안타까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요...라고 생각하다니!!! 작가가 부여한 그녀의 매력에 젖어들었나 봅니다.
책을 닫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에겐 본디 지니고 있었던 폭력성도 있었고, 사디스틱 한 면도 있었습니다. 하녀들을 다루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저지른 일은 지나치게 난폭한 일이었다는 점엔 변함이 없었습니다. 전쟁과 권모술수가 넘쳐나는 중세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살인마라는 건 분명하거든요. 자신은 살인마라는 자각이 없었을 테지만요.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고 보면 사이코패스 성향이 많이 보이는군요.
바토리에 대한 진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로 인해 또 다른 그녀의 모습을 엿보고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 그녀도 나쁘지만, 그녀의 남자들이 더 나쁩니다.
--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서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