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안하다고 말해 ㅣ 스토리콜렉터 52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미안하다고 말해."
이 말이 추악하게 들린 건 처음입니다.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 법이지만, 완전한 복종과 사육을 위해 사용하다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소녀는 생존을 위해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하다, 가엾은 사디스트 자식아. 정말 미안해. 그때 눈을 제대로 지르지 못해서, 미안해. 벽돌로 네놈의 머리를 완전히 박살 내지 못해서, 미안해. 네 눈알을 뽑아내지 못해서. 나는 이렇게 외쳐대고 싶지만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나는 공처럼 몸을 웅크린다.
-p.548
조 올로클린 시리즈 중 북로드 스토리콜렉터의 책으로는 세 번째로 소개된 <미안하다고 말해>는 원작 시리즈로는 여섯 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혹시 나중에 순서가 뒤바뀌어 앞쪽의 작품이 다음 순서로 출간될는지 어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되도록 순서대로 나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두 편의 소설 <산산이 부서진 남자>, <내 것이었던 소녀> 모두 충격적이며 스릴 넘쳤고, 작품 속에 독자를 잡아두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지만, 이번의 <미안하다고 말해>는 그 힘이 가히 폭발적이라, 책을 펼치고 첫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내 이름은 파이퍼 해들리다. 그리고
나는 3년 전 여름방학의 마지막 토요일에 행방불명되었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고, 도망친 것도 아니었다. (중략)
나는 계속 여기 있었다.
-p.9
이 첫 대목은 책의 맨 마지막 부분과 딱 맞아떨어져 가슴 한 켠이 찡 해옴을 느꼈습니다.
소설의 화자는 둘입니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조 올로클린과 납치된 소녀 파이퍼. 심리학자인 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에 개입하며 추리해나가고, 파이퍼는 회상록을 쓰듯이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기록해나갑니다. 그 끔찍했던 시간들을 하나씩 하나씩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씁니다. 그녀의 종이 위에 적힌 것들은 지옥이었습니다.
현실 속 공포는 상상 속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한때 나는 축제 마당의 탈것들을 좋아했다. 높이 올랐다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그런 공포는 즐길만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공포에는 긍정적인 면도, 해피엔딩도 없다.
-p.327
조 올로클린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경찰의 요청에 농장 부부 방화 살인 사건에 대한 프로파일링 및 용의자에 대한 심리 분석을 합니다. 무죄 추정이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용의자는 벌써 피의자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수사 결과 그의 행적과 농장의 방문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얽혀있음을 알게 됩니다. 3년 전 두 명의 소녀가 실종된 사건이었는데요. 그중 한 명의 학대당한 시신이 발견되어 경찰도, 조 올로클린도 3년 전의 사건을 추적합니다. 소녀 실종 사건에는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는 한 남자의 열등감과 비뚤어진 욕망이 바닥에 깔려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멀쩡하며 타인에게 의심을 받을 건더기가 전혀 없는 이 남자는 두 소녀를 납치하여 3년 동안 자신의 집에 감금하고 학대를 일삼아왔습니다. 태쉬는 남자로부터 파이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린 소녀에게는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집에서 탈출하여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지만, 결국 얼음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파이퍼는 태쉬를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배고픔보다 추위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태쉬의 부재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장소에 또 다른 친구가 오는 건 더 싫었습니다. 태쉬가 안전하기를, 자신을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 파이퍼를, 남자는 집요하게 괴롭히고 협박했습니다.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미안하다"라고 말하라며.
파킨슨병 1기를 앓고 있는 조 올로클린은 약물로 병세 진행을 늦추고 있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는 몸뚱어리 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딸 찰리 또래에 납치된 두 소녀를 생각하면 쉽사리 사건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추리와 프로파일링을 하며 점점 진상에 가까워지는 올로클린.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어른들의 사정도 알아버렸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나머지 한 소녀, 파이퍼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미안하다고 말해>는 앞의 두 작품과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조 올로클린은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 기드온 사건으로 인해 아내와 멀어지고 별거하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이 좀 더 산뜻해 보입니다. 불편하게 얽혀있던 이런저런 복잡한 것들에서 조금 해방이 되어서 그런 걸까요. 지금의 그라면 파킨슨병 따위가 자신을 좀먹게 둘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의 그를 보면, 여전히 그에게는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아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번 소설에서 갑자기 문장이 더 잘 정돈된 것 같았는데요. 작가의 힘인지, 역자의 힘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읽기 편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다만, 같은 사람이 말하는 내용이, 연속되는 두 번의 따옴표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 자칫 다른 사람의 대사로 오독될 수 있어서 약간 성가셨습니다. 그런 사소한 부분만 제외한다면, 이 책은 대단한 스릴러입니다.
600여 페이지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