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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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흑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만하더라도 친구에게 못된 소리를 했던 여러 건의 기억과 말도 안 되는 남자를 만났던 것, 내 신념에 반하는 직장을 잠시라도 다녔던 것, 크고 작은 실수들... 하지만, 반성은 하되 그 기억을 지우거나 없었던 일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시행착오를 겪은 결과 지금의 제가 있는 거니까요. 다만 흑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저를 놀려대는 일은 없길 바랄 뿐입니다. 더불어 제 말로 인해 마음 상했을 친구에겐 사과하고 싶습니다.
만약 제 인생에서 어느 시점을 수정할 수 있다면 언제가 좋을까요? 엄마께선 제 인생의 이 부분에서 이렇게 선택했더라면... 하고 후회하시지만, 엄마의 결정 때문에 제 인생이 힘들어졌다고 말씀하시지만 그 점에 대해선 원망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잘 풀려나갔더라면 사랑하는 제 딸을 못 만났을지도 모르니까요. 딸의 말로는, 제가 어떤 인생을 살았더라도 엄마의 딸로 저를 찾아와 만났을 거라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과거의 어느 순간도 함부로 수정해서는 안됩니다. 매일 자살을 꿈꾸던 어린 시절을 이겨내고 나니, 여전히 힘겹긴 해도 웬만한 일엔 충격받지 않는 뻔뻔한 어른으로 살고 있잖아요.

비프케 로렌츠의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의 찰리는 지난 시간을 수정하길 원했습니다.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는 주점의 사장이자 친구인 팀의 주머니에서 '당신의 인생을 바꿔드립니다'라는 명함을 발견하기 전엔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인생이라는 게 그리 쉽게 변화되는 것은 아닐 텐데... 오죽했으면 인생역전이란 말이 다 있겠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학교도 그만두고 세상에 나섰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닌 삶을 살다 보니 동창회에 나갈만한 모습이 아니게 된 그녀였지만 첫사랑 모리츠가 등장하지만 않았어도 콧방귀 뀌고 말 것을, 좋은 집안 출신에 뭔가 한가락 하는 그들 틈에 섹시한 캣슈트를 입고 끼어듭니다. 그러나 모리츠가 애인인 이자벨의 질투 유발 작전에 찰리를 이용했음을 깨닫고는 분노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헤드헌팅사에서도 자신의 이력으로는 좋은 곳에 취업이 어렵다는 당연한 사실을 듣고 짜증 내며 돌아서는 순가, 옆 사무실의 엘리자라는 사람이 찰리를 불러 수상한 제의를 합니다. 과거의 기억을 지워준다는 그 제의는, 내 기억에는 남아있지만 타인의 기억에서는 모두 지워진다는 건데, 그냥 그 사실만 소멸하면 좋겠지만 세상도 녹녹치 않고 소설도 만만치 않습니다.
고민 끝에 제의를 받아들이고 이상한 장치를 통해 기억 출력, 삭제를 하고 사무실에서 나온 찰리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그 세상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어린 시절 모리츠와의 첫 경험을 없었던 일로 하는 바람에, 세상에 내일이 그 모리츠와의 결혼식이랍니다. 느닷없이 셀럽!
청바지에 '헤픈 여자' 티셔츠를 즐겨 입던 빨간 머리 그녀는 그야말로 금발의 우아하고 고상한 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럴 수가!!
하지만 마냥 좋은 건 아니었습니다. 10년 전에 담배를 끊었다니. 내 머리는 니코틴을 기억하고 있는데. 심지어 채식만 하는 데다 맥주도 안 마신다고? 수정된 기억과 현재의 그녀에겐 큰 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일 마음에 걸리는 건 주점 주인이자 친구였던 팀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대로 신데렐라의 기분으로 살아가면 좋은 걸까요?

실은 1년하고도 2개월 전에 이미 이 소설을 읽었드랬습니다. 이 소설 <당신의 기억을 지워드립니다>는 동명 소설의 개정판으로 전보다 더 예쁜 표지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책의 굿즈화는 좋지 않다고 모 출판사에서 이야기했지만 반 정도만 인정합니다. 책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사용되는 것엔 동의할 수는 없지만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표지가 예쁜 책에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아무튼 이 소설은 한 편의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듯합니다. 배경음악이 꽤 많이 수록(?) 되어 있는데, 핑크(Pink : 미국의 가수, 싱어송라이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로서는 노래 가사가 와닿을 리 없지만 취향 문제이니 상관없습니다. 

작년에 읽었을 때와 개정판을 읽은 요번의 느낌이 달랐습니다. 그때는 재미있긴 해도 주인공이 너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자신의 현재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며 부모님 몰래 학교도 그만두고 주점에서 일하며 아무 남자하고 자고 - 심지어 절친의 남자친구와도! - 그렇게 막 살다가 동창회에서도 허세 떨고 객기 부리다가 개망신당하고, 과거를 지워 새 인생을 살게 되었는데도 그 삶에서도 적응하지 않고 -못한 게 아니라 안 합니다. 멋대로입니다. 제멋대로 사는 건 이때나 저 때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싫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만난 찰리는 그렇게까지 나쁘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다카가키 츄이치로의 <어쨌거나 괜찮아>를 읽었기 때문일까요? 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녀도 이 책을 읽었으면 좋았을걸. 엉망진창 흑역사 과거라도 모두 인정하고 자신을 사랑한다면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는 걸 좀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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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다카시의 교육력 -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19
사이토 다카시 지음, 남지연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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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다카시. 어디서 봤던 이름인가 했더니, 최근 4년 사이에 문학 작품 100권과 교양서 50권을 읽어야 '독서력'이 있는 거라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 추리 소설은 빼고요. 역사 소설은 경계에 있다고 했다던가. 그래서 제가 삐져있던 그 저자로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어디서 봤냐면, 리뷰 생태계가 오염되었다며, '이 책도 좋고 저 책도 좋다'라는 블로그 서평을 지적하는 바람에 저를 삐지게 한 - 그렇다면 더블 삐짐인가- 한 소설가의 SNS에서였습니다. 물론 기사를 끝까지 읽고 나서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고 삐짐을 풀었고, 사이토 다카시의 '독서력'을 읽지도 않고서 삐지는 건 도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 마음을 열고 현재 메이지 대학 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사이토 다카시의 교육력은 무얼 말함인지 제대로 톺아보기로 했습니다.

이 책은 열자마자 망했다. 어쩌면 좋지. 오가타 고안이라거나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사람에 대해 나오고 '회독' 학습법 같은 것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포기하고 싶어. 하지만 톺아보겠다는 다짐은 어쩔 건데. 그래서 계속 읽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후쿠자와 유키치, 어디서 들어본 인물인데... 아, 만 엔 인물이었지. 계몽사상가, 교육자였다고. 
저를 당황시켰던 건 서장이었는데요. 서장이 이 정도면, 본문은 어쩔 거야 싶었지만, 의외로 본문부터는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 그러고 보면 서장의 내용은 저만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인에게는 상식일지도 모르죠. 

 이 책의 본문에선 가르치는 사람, 즉 교육자가 갖춰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교육자의 범위는 넓어서 학교의 교사 일수도 있고, 유치원의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 그렇지 않으면 강사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방과 후 교사로서 입시와 무관한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일 수도 있지요. 아무튼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라는 자세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내가 하라면 해! 라거나 내가 말하는 건 무조건 외워. 나를 무조건 따라야 해!라는 강압적이고 씨알도 안 먹히는 방식의 교육이 아니라 배우는 자를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수업에 참여하게 하여 향학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언제나 부드러운 카리스마만으로 이끌 수는 없겠지만, 존경 혹은 동경 받을만한 교사가 된다면 학생은 자연스레 따라올 것입니다. 어둡고 음침한 입시나 각종 시험을 대비시키는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진정한 스승이 될 수 있는 길을 내보여줍니다. 

저는 밑줄을 긋거나 표시하지 않는 타입이라 책을 읽다가 '하이라이트'라는 앱을 이용, 사진에 밑줄을 긋고 태그를 달아 보관하고 페이스북에 올립니다. -라고 하지만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무척 편리한 앱이더군요. - 이 책을 읽다 보니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많아, 이러다가 책을 스캔할 기세라 다소 자제하였습니다. - 4~5컷 이상 페이스북에 올리는 건 좋지 않은 일이라고 스스로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 읽는 내내 밑줄 긋고 간직하고 싶은 부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 책은 교육을 하는 사람이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현장의 사람이 아니라 학부모의 입장에서 읽었는데 교육자들이 모두 이렇다면 학교 다닐 맛 나겠다, 공부할 맛 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전에 적용하기엔 입시나 현교육 시스템에 맞지 않는 방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과거에 비추어, 그리고 아이에게 전해 듣는 학교생활로 현재를 상상할 수밖에 없는데요. 과연 어떨까요. 각종 서류에 치여 보고서를 많이 많이 작성해야 하는 선생님께서 자기 계발을 하고 독서를 하며, 창의적인 방법을 연구하여 아이들과 함께 하는 건 힘든 일일까요. 

아이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이다음에 담임 선생님께서 내 제자 중에 이런 녀석이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할 수 있는 제자가 되고 싶다고요. 그 한마디로, 엄하고 까칠하고 무뚝뚝한 선생님이지만, 존경할 만한 교육자일 거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존경받는 선생님이 드문 요즘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런 선생님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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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를 알면 중국사가 보인다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25
이나미 리쓰코 지음, 이동철 외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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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릴 때부터 한자 공부를 강요 당하다 보니 한자와는 담을 쌓았습니다. 어릴 때 소원 중 하나는 신문에서 한자가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는 ..하여 ...라고 한다.'라고 신문을 읽는 건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한자 공부 때문에 쫓겨날 뻔한 적도 있는 저인데요. 어쩔 수 없습니다. 싫은 건 싫은 거니까요. 
아무튼 고등학생 때도 한문이 필요한 과목 - 아마도 거의 모든 과목이 그렇지 싶은데 - 시간에는 눈이 스르르 감겼습니다. 물론 숫자가 많이 들어간 과목에도요. 그러나, 사대부 종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실제로 무슨 김 씨 종손인 성균관대 한문학과를 나온 젊은 한문 선생님 시간에는 저절로 눈이 초롱초롱 해졌습니다. 한문 선생님께서는 수업시간마다 고사성어 이야기를 해주셨거든요. 오자서, 부차, 장왕 같은 인물의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경국지색의 이야기도 흥미로웠습니다. 한시 같은 것이 나오면, 배경이 되는 이야기도 해주셨는데, 당시 김용의 무협지도 종종 읽던 시절이라 선생님 수업시간에는 졸 수가 없었어요. 저는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에 나오는 학동 마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시는 시간에만 정신 차리고 수업을 들었었지요. 
저는 고사성어에 얽힌 이야기를 무척 좋아해요. 그러니 <고사성어를 알면 중국사가 보인다>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와나미 신서는 얇지만 내용은 알차서, 읽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편입니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었는데요.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달았어요. 너무나 재미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이 책 한 권이면 중국사의 큰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쉽고, 재미있게 알기 쉬운 문체로 풀어놓은 것이 특징입니다. 책을 쓴 이나미 리쓰코의 이야기 구성력뿐만 아니라 옮긴이인 이동철, 박은희의 노력도 있었겠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거든요. 이와나미 신서는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읽을 수 있는, 전문적인 내용을 담은 책을 모토로 하고 있는데요.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어요. 가벼워서 가방에 넣고 다니며,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카페에서 읽을 만한 책입니다. 이번의 책 <고사성어를 알면 중국사가 보인다>가 마음에 들어 그랬는지, 그야말로 이와나미 신서의 목적에 딱 맞는 책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 책안에서 신농씨, 요순의 오제 시대부터 와신상담의 오와 월의 이야기, 진시황의 이야기, 초한지의 이야기를 거쳐 마침내 청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흘러갑니다. 우리가 잘 아는 초한지, 삼국지, 수호전의 배경과 사건이 들어있는데요. 고사성어에 따른 중국사라기보다는 중국사에 나타난 고사성어 이야기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아쉬운 것은 뒤쪽으로, 그러니까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고사성어보다 역사에 치중된 경향이 조금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강희제를 발견했거든요. 녹정기에서 좋은 인상이었던 황제라 반가웠습니다. 

역사 과목에 약한 사람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읽었으니 확실합니다. 맹꽁이 서당 학동처럼 훈장님이 해주시는 말씀이라 여기며 책을 읽다 보면 파란만장한 중국사의 흐름을 타고 여행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한문 선생님을 추억했습니다. 



**모처럼 성인뿐만 아니라 청소년도 읽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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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병동 병동 시리즈
치넨 미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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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년인가. 제주시내에도 방 탈출 게임 카페가 생겼습니다. 호기심에 한 번 가볼까, 나라면 시간 내에 충분히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도전해 볼까 했는데요. 헛, 입장료가! 저 돈이면 반찬 한두어가지 더 하지 싶은 엄마 마음에 포기했습니다. 학생 할인은 있는데 왜 엄마 할인은 없는 건가요. 딸이 위로하며 한 마디 했습니다.
"내 돈 내고 왜 내가 갇혀서 고생해야 하는 건데? 잊어버려." 
시설비, 운영비 등을 고려하면 그 정도의 입장료를 받는 게 맞는데, 저에겐 접근하기 어려운 비싼 공간이었습니다. 누굴 탓하겠습니까. 무능한 제 탓이지요.

그런데, 방 탈출- 리얼 탈출 게임에 자신도 모르는 새에 초대되어 무료로 게임을 즐기게 된 남녀 다섯이 있었으니....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과거 병원으로 사용되었던 넓고 쾌적한 공간, 제한시간 약 여섯 시간. 단 한가지 조건만 제외한다면 신나게 놀아보았을 텐데, 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시간 내에 탈출하지 못하면 시한장치가 되어 있는 휘발유통(들)에 붙어 저세상으로 가거든요. 곳곳에 그려져 있는 '클라운'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잘 따라가면 탈출구의 열쇠, 혹은 비밀번호를 얻을 수 있을 텐데, 그들은 몰랐습니다. 이승으로 가는 열쇠는 그들 자신이 품고 있다는걸. 

감금된 사람은 모두 다섯, 게이오 의대 부속 병원 외과 교수 쓰키무라, 난요 의대 세타가야 병원 복부외과 의사 고바야카와, 신주쿠 호메이 병원 수술부 간호사 구와타, 세이란 병원 마취과 의사 나나미, 그리고 파견 사원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간호사인 사쿠라바. 이들만으로도 외과 수술이 가능하겠다 싶은 의료진 구성이지만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입니다. - 실은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아니, 따지고 보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클라운이 이들을 가두어 두었을 테죠. 그가 원하는 건 그날의 진실이니까. 
수술팀 같은 그들은 진짜로 수술대 위에 묶여있는 남자를 발견합니다. 감금인 하나 추가요. 그를 발견함으로 인해 일 년 전에 죽은 한 의사가 그들의 공통점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시간은 점점 줄어가는데, 진실은 천천히 다가옵니다. 그들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니 저도 덩달아 조마조마 해집니다. 빨리 진실을 말하란 말이야! 병동 밖에서 실종된 사람을 추적하는 형사들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로서 행동할 뿐입니다. 결국 병원 내의 사람들끼리 알아서 해결해가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비뚤어진 인간들의 자기 고백과 충격적인 결말. 책 뒤의 문구가 거짓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책을 열고나면 닫기가 어려우니 360여 페이지를 모두 읽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시작하시길 권합니다. 분명 책 속에 갇혀버릴 테니까요. 

<시한 병동>을 별개의 책으로 읽어도 좋지만 전작인 <가면 병동>을 읽은 후 만난다면 병원의 장치나 사건 배경을 이해할 수 있어서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두 권 다 읽어주세요. 클로즈드 써클 미스터리 - 메디컬 스릴러 - 정통 추리 소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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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 2 - 열두 명이 사라진 밤, 김영탁 장편소설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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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점을 보지 않습니다.  천기누설이니 알아서는 안된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알아서 뭐 하겠는가 하는 마음에선데요.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어서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현재의 내가 뭘 하면 그게 바뀔까요. 바뀌지 않으니까 정해진 운명이겠죠.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습니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없다면 아예 점을 볼 필요가 없고요. 그러니 미래를 엿보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현재가 모여서 미래가 될 테죠. 지금 열심히 산다고 반드시 밝은 미래가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현재를 살아봅니다. 시간에 몸을 맡기고요.

미래의 일은 그렇다 치고, 과거로 돌아가서 어느 한 시점을 수정한다면 현재는 어떻게 변할까요.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어떻게든 그 오류를 수정해서 - 어쩌면 바이러스 같은 그 시간여행자를 없애서라도 - 원래 돌아갈 예정이었던 흐름을 유지할 테죠. 그게 아니라면 현재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테고요. 
어쩌면 수정하는 순간 평행이론에 의해 또 다른 세계로 분화되는 바람에 현재는 전혀 바뀌는 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과거인은 헛수고를 한 셈이 될 테고요.
이를테면, <드래곤볼>에서 미래에서 온 트랭크스가 적을 처치하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그가 사는 미래는 변한 게 없습니다. 4년 후 다시 우리의 현재로 돌아오는데요. 자신 때문에 역사가 바뀐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 적과 싸우는데요. 야무차가 트랭크스에게 묻습니다. 이 세계에 와서 싸우고 이기더라도 너의 세계는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왜 오는 거냐고요. 트랭크스는 이렇게 답합니다. 어머니(부르마)께서 말씀하시길, 이 지옥 같은 미래가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니 다른 세계에서라도 이 지옥 같은 미래를 막으라고요. 어쩐지 감동적입니다. 
지금은 타임머신이 없는 시대라서 - 없겠죠? 일단 순간 이동 기술을 개발하는 게 선행되어야 할 겁니다. 그래야 어디로든 이동을 시키죠.- 과거의 사건을 수정한다거나 누군가를 죽인다거나 하면 현재는 유지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수정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작가의 상상에 따라 어느 한 쪽을 선택하고 우리는 그 상상을 따라갑니다. 

김영탁의 <곰탕>은 어떤 상상을 했을까요? 돌 하나만 잘 못 옮겨도 미래에 변화가 생길 것 같은데, 소설에서는 미래인들이 잘도 내려옵니다. 암울한, 몇 차례의 쓰나미가 덮쳐버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자리 일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미래가 없는 미래인이 과거로 돌아와 우리의 현재를 살고 있는데, 미래에 전혀 영향이 없을까요? 만약 미래인 하나가 현재인의 삶을 대신 살기로 결정했다면 그때부터 미래의 어느 시점이 변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태어나야 할 사람이 태어나지 않거나, 죽어야 할 사람이 계속 살아있기도 하고요. 그런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이라면요. 과연 미래에 살고 있는 그 사람들은 어느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걸까요. 

<곰탕 2>는 <곰탕 1>보다 스토리가 진해집니다. 왜 아니겠어요. 국을 우리기 시작한 지 2권째인걸요. <곰탕 1>에서의 말갛던 국물이 점점 더 고깃국 특유의 색을 내며 향도 더해갑니다. 미래에서 온 이우환은 부산 곰탕의 아들 이순희와 그 여자친구 유강희의 아들이었습니다. 실은 <곰탕 1>에서 확실해졌지만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곰탕 2> 이야기를 할 때 수육을 썰듯 썰어놓아보는데요. 막연하게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 확실해진 이상, 자신의 아들 뻘인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었던 우환은 미래로 가는 시간여행 배에 올라탔다가 느닷없이 문을 열고 바다로 나와 곰탕집으로 돌아갑니다. 앞뒤 재지 않고 한 행동 때문에 동승했던 사람 열둘이 죽습니다. 우환이 미래로 돌아가는 줄 알고 다음날 미래로 가려고 했던 화영은 이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환을 죽여야 할 이유가 둘이나 생겼거든요. 첫째, 미래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탈주자이고, 둘째, 과거 시점에서 열둘을 죽인 자를 죽이라는 청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죽이고 싶지 않았던 우환이지만, 자신이 미래에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려면 그래야만 했습니다. 결국 우환과 화영은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살인을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죠. 
부산 곰탕으로 돌아가 할아버지, 아빠, 엄마와 함께 살아가려고 했던 우환은 자신이 바다로 나갔던 날부터 순희가 돌아오지 않았기에 계속 그를 기다립니다. 애틋한 마음으로요. 한편, 순희는 부동산 업자 박종대의 꼬임에 그가 내어준 아파트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요. 순희가 미래에 굉장한 조직인 아수라의 수장이라는 걸 알고 있는 박종대가 그를 자기 손에 넣기 위해 공작을 한 겁니다. 박종대 역시 미래에서 온 사람입니다. 그는 2019년의 부산으로 온 미래인에게 접근, 이곳의 사람과 바꿔치기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여러 일을 하는데요. 척 보아도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는 짓들을 합니다. 
순희는 박종대를 만나 점점 파멸합니다. 그가 진짜 원하는 건 파괴가 아니라 사랑과 인정받는 것일 텐데. 사랑받고 싶은 소년의 잘못된 몸부림을 따라가며 안타까웠습니다.
만일 순희의 아버지 이종인이 좀 살가웠더라면 아이의 삶은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이대로 자라나 정말 부산을 주름잡는 최고의 보스가 되면 어떡하죠. 우환이 새벽마다 말아준 곰탕이, 아버지만큼 나이 많은 아들이 말아주는 곰탕이 순희의 마음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요.

책을 읽다 보면 소설이 영화처럼 보입니다. 손을 뻗어 팝콘을 집어 입에 넣어가며 과자 부스러기가 책장에 묻지 않도록 조심하며 책을 읽어나가다 스릴감에 긴장하기도 하고, 안타까움에 콧잔등을 문지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미래의 국물 음식점 사장이 어째서 우환을 과거의 부산 곰탕집으로 보냈는지 알고 나서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 소설은 영화로 나와도 좋지 않을까, 아니면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로 -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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