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누구나 흑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만하더라도 친구에게 못된 소리를 했던 여러 건의 기억과 말도 안 되는 남자를 만났던 것, 내 신념에 반하는 직장을 잠시라도 다녔던 것, 크고 작은 실수들... 하지만, 반성은 하되 그 기억을 지우거나 없었던 일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시행착오를 겪은 결과 지금의 제가 있는 거니까요. 다만 흑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저를 놀려대는 일은 없길 바랄 뿐입니다. 더불어 제 말로 인해 마음 상했을 친구에겐 사과하고 싶습니다.
만약 제 인생에서 어느 시점을 수정할 수 있다면 언제가 좋을까요? 엄마께선 제 인생의 이 부분에서 이렇게 선택했더라면... 하고 후회하시지만, 엄마의 결정 때문에 제 인생이 힘들어졌다고 말씀하시지만 그 점에 대해선 원망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잘 풀려나갔더라면 사랑하는 제 딸을 못 만났을지도 모르니까요. 딸의 말로는, 제가 어떤 인생을 살았더라도 엄마의 딸로 저를 찾아와 만났을 거라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과거의 어느 순간도 함부로 수정해서는 안됩니다. 매일 자살을 꿈꾸던 어린 시절을 이겨내고 나니, 여전히 힘겹긴 해도 웬만한 일엔 충격받지 않는 뻔뻔한 어른으로 살고 있잖아요.

비프케 로렌츠의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의 찰리는 지난 시간을 수정하길 원했습니다.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는 주점의 사장이자 친구인 팀의 주머니에서 '당신의 인생을 바꿔드립니다'라는 명함을 발견하기 전엔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인생이라는 게 그리 쉽게 변화되는 것은 아닐 텐데... 오죽했으면 인생역전이란 말이 다 있겠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학교도 그만두고 세상에 나섰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닌 삶을 살다 보니 동창회에 나갈만한 모습이 아니게 된 그녀였지만 첫사랑 모리츠가 등장하지만 않았어도 콧방귀 뀌고 말 것을, 좋은 집안 출신에 뭔가 한가락 하는 그들 틈에 섹시한 캣슈트를 입고 끼어듭니다. 그러나 모리츠가 애인인 이자벨의 질투 유발 작전에 찰리를 이용했음을 깨닫고는 분노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헤드헌팅사에서도 자신의 이력으로는 좋은 곳에 취업이 어렵다는 당연한 사실을 듣고 짜증 내며 돌아서는 순가, 옆 사무실의 엘리자라는 사람이 찰리를 불러 수상한 제의를 합니다. 과거의 기억을 지워준다는 그 제의는, 내 기억에는 남아있지만 타인의 기억에서는 모두 지워진다는 건데, 그냥 그 사실만 소멸하면 좋겠지만 세상도 녹녹치 않고 소설도 만만치 않습니다.
고민 끝에 제의를 받아들이고 이상한 장치를 통해 기억 출력, 삭제를 하고 사무실에서 나온 찰리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그 세상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어린 시절 모리츠와의 첫 경험을 없었던 일로 하는 바람에, 세상에 내일이 그 모리츠와의 결혼식이랍니다. 느닷없이 셀럽!
청바지에 '헤픈 여자' 티셔츠를 즐겨 입던 빨간 머리 그녀는 그야말로 금발의 우아하고 고상한 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럴 수가!!
하지만 마냥 좋은 건 아니었습니다. 10년 전에 담배를 끊었다니. 내 머리는 니코틴을 기억하고 있는데. 심지어 채식만 하는 데다 맥주도 안 마신다고? 수정된 기억과 현재의 그녀에겐 큰 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일 마음에 걸리는 건 주점 주인이자 친구였던 팀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대로 신데렐라의 기분으로 살아가면 좋은 걸까요?

실은 1년하고도 2개월 전에 이미 이 소설을 읽었드랬습니다. 이 소설 <당신의 기억을 지워드립니다>는 동명 소설의 개정판으로 전보다 더 예쁜 표지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책의 굿즈화는 좋지 않다고 모 출판사에서 이야기했지만 반 정도만 인정합니다. 책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사용되는 것엔 동의할 수는 없지만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표지가 예쁜 책에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아무튼 이 소설은 한 편의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듯합니다. 배경음악이 꽤 많이 수록(?) 되어 있는데, 핑크(Pink : 미국의 가수, 싱어송라이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로서는 노래 가사가 와닿을 리 없지만 취향 문제이니 상관없습니다. 

작년에 읽었을 때와 개정판을 읽은 요번의 느낌이 달랐습니다. 그때는 재미있긴 해도 주인공이 너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자신의 현재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며 부모님 몰래 학교도 그만두고 주점에서 일하며 아무 남자하고 자고 - 심지어 절친의 남자친구와도! - 그렇게 막 살다가 동창회에서도 허세 떨고 객기 부리다가 개망신당하고, 과거를 지워 새 인생을 살게 되었는데도 그 삶에서도 적응하지 않고 -못한 게 아니라 안 합니다. 멋대로입니다. 제멋대로 사는 건 이때나 저 때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싫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만난 찰리는 그렇게까지 나쁘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다카가키 츄이치로의 <어쨌거나 괜찮아>를 읽었기 때문일까요? 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녀도 이 책을 읽었으면 좋았을걸. 엉망진창 흑역사 과거라도 모두 인정하고 자신을 사랑한다면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는 걸 좀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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