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왕이 온다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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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 불안이 심한 딸은 밤이 되면 잠을 자려 하지 않았습니다. 잠이 들면 텅 빈 공간에 자신만 남겨져있는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저는 꿈나라로 유도하는 이야기를 해준 적도 있고, 아이 눈높이에 맞는 과학 이야기를 해준 적도 있었지만 피곤한 날이면 '바람 아저씨 온다.'라는 듣도 보도 못한 말로 아이를 겁주고선 제 품에 숨겨주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 줄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저는 그게 없다는 걸 알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았을 텐데요. 세계 곳곳에서 저 같은 부모가 만들어낸 다양한 형태의 괴물들이 있을 텐데요. 그것들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보기왕이 온다>라는 제목을 보았을 땐 뭔가를 잘 보는, 킹왕짱 잘 보는 녀석이 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보기왕은 서양의 부기맨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보기만, 보기마, 부기메, 보기완 등의 일본식 이름으로 변형되어 전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졌기에 실제로 이런 이름을 가진 괴물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소설 속에서도 이 명칭은 문헌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설정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비슷한 종류의 괴물은 있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망태 할아버지가 아이를 집어가는 것처럼 일본에서도 무언가가 아이를 주워가는 탓에 갑자기 아이가 사라졌으니까요. 만화나 애니, 소설에서는 아이들이 사라지는 이유에 대해 비슷한 의견을 제시합니다. 차라리 카미카쿠시인게 나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너무 슬프잖아요.
그러나 보기왕을 알고 난 후엔 무엇이든 아이를 데리러 오는 존재는 공포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제 아이에게 무슨 일을 한 걸까요.

<보기왕이 온다>는 세 챕터로 나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어린 시절 문밖에서 누군가를 찾는 기이한 존재를 만났던 히데키의 이야기, 두 번째는 히데키의 아내 가나의 이야기였는데요. 세 번째는 뜻밖에도 히데키와 가나 가족과 상관없으나 그들 부부를 도우려는 노자키의 이야기입니다. 
보기왕은 문밖에서 말을 겁니다.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테면 "리틀포니씨 계신가요?"라는 물음에 "안 계셔요."라는 대답조차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문을 열어주면 더 큰일입니다. 현관문이 유리로 되어 있다면 괴이한 회색 형체의 사람 비슷한 것을 보거나, 철제라면 도어 스코프를 통해 확인하거나, 인터폰 모니터를 통해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겠지만 저희 엄마 집처럼 이런저런 것들이 없는 곳에 그것이 찾아와 저를 찾는다면 무슨 일인가 싶어 엄마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버리지 않을까요.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택배입니다. 포니씨 계신가요." 하면 무의식중에 "네에." 대답하며 문을 열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커다란 입을 가진 보기맨은 집 안으로 들어와 자신이 원하는 이를 데려가기 위해 방해가 되는 자들을 물어뜯습니다. 아니 반드시 집이 아니어도 대답만 한다면 회사로도, 커피숍으로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전화를 걸어 대답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애초에 그와 인연을 맺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왜 히데키 가족을 노리는 걸까요?

이 소설에는 수많은, 다양한 폭력이 들어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가하는 폭력, 의식적으로 가한 폭력, 저항할 수 없었던 사람들, 속으로 삭한 사람들, 상처 준 자와 받은 자들.... 그런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보기왕이 온다>는 데뷔작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한 묘사와 흡인력이 뛰어난 소설입니다. 일본 호러 대상의 심사위원이었던 미야베 미유키, 기시 유스케 등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2018년 12월 <고백>의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에 의해 오카다 준이치, 츠마부키 사토시 주연의 영화로 개봉합니다. 마츠 다카코와 코마츠 나나도 나온다는군요. 제목은 <온다> 이고요. 긴장 가득했던 그 분위기를 영화에서 잘 살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연진도 그렇고 감독도, 정말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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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게 산다는 것 - 불필요한 감정에 의연해지는 삶의 태도
양창순 지음 / 다산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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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간관계를 힘들어합니다.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블로그 댓글 남기는 것도 무척 어려워합니다. 상처받는 것도, 주는 것도 싫어서 지나치게 신경 쓰는 탓인 것 같습니다. 그런 탓에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듭니다. 랜선 인간관계도 그러한데 오프에선 오죽할까요. 저는 인간관계를 빚지 않는 히키코모리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불행하고 슬프다면 모를까, 괜찮습니다. 누군가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냐 물었습니다만 전혀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인간관계 맺는 걸 좋아하고 술자리를 즐기는 지인이 혼자 영화 보고 여행하는 걸 보며 정말 그는 행복한 걸까 궁금해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가 제게 말했습니다. 사람 좀 만나고 다니라고, 술 한 잔씩 하고 다니라고, 좀 돌아다니라고. 
저는 늘 돌아다닙니다. 푸른 하늘을 만나고, 부서지는 파도를 띄운 바다도 만납니다. 도시락을 싸서 박물관도 가고, 도서관도 갑니다. 축제 구경도 갑니다. 충고를 해준 그처럼 혼자서요. 때로는 딸이나 엄마와 함께 갑니다. 그게 저에게 있어 가장 안정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저는 즐겁습니다. 평소 직업상의 이유로 감정 노동을 하고 있는데, 쉴 때마저 감정을 조절해가며 누군가 놀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저에게 있어서 노동이지 쉬는 게 아니에요. 
어색함을 떨구는 건 저에게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가는 게 잘하고 있다는 소리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타인이 걱정하는 이유도 압니다. 혹시 나중에 친구하나 없이 외로워지면 어떡하느냐고 묻습니다. 그건 그때 걱정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나의 이런 성향이 아이에게 전이되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제가 처음부터 이런 성격이었을까요? 원래는 무대 체질입니다. 무대에 올라가서 뭘 하든 떠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살아가면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 비밀이 쌓여가며 이렇게 변해갔습니다. 전, 거짓말을 잘합니다. 그렇지만 거짓말하는 건 너무너무 힘듭니다.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최소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왜 거짓말을 할까요. 
아마도 상처가 싫어서 일 겁니다. 저는 상처의 공포에서 벗어나 '담백하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이번 생은 처음입니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실수하고, 넘어지고, 상처 입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에요. 어느 작가의 말처럼 처음 하는 일도 잘 해내는 존재는 신밖에 없습니다. 신이 아닌 우리는 자기중심을 꽉 잡고 단지 한 걸음씩 떼어놓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p.51

이 세상에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위축될 필요는 없다. 좋은 경험은 좋은 경험대로, 나쁜 경험은 나쁜 경험대로 나를 성장시키는 주춧돌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담백한 삶의 기술이다. 
-p.72

누구에게도 오해받지 않도록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라. 어떤 경우에나 당신을 오해하고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한둘은 있기 마련이다.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
-p.103

마음에 여유를 갖는 건 삶의 어느 순간에서는 정말로 중요하다. 인간관계도 담백해지므로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다. 우린 너 나 할 것 없이 담백하고 편안한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호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p.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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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츠러들지 않고 용기있게 딸 성교육 하는 법 - 성교육 전문가 손경이의 딸의 인생을 바꾸는 50가지 교육법
손경이 지음 / 다산에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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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젠더 편견을 갖지 않게 아이를 교육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저래야 한다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개인의 특성, 관심분야의 다름, 힘의 차이 등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아이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자랐으면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여자가 무슨, 여자가 어딜 등등 그런 소리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제 생각대로 잘 자라주었고 남자나 여자가 아닌 '자신'으로 존재합니다. 쇼트커트에 바지를 즐겨 입고 레이스나 프릴은 질색하면서도 귀걸이, 반지 같은 액세서리를 좋아하며, 학교 갈 때는 선크림까지만. 휴일엔 화장을 즐기는 개성 있는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 아이와 외출하면 위아래로 스캔하는 사람을 적어도 셋은 만나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누구보다 멋진 녀석이니까요. 미용실에서 머리를 짧게 잘라달라고 했을 때 원장님이 '엄마가 아들이 없어서 딸을 아들처럼 키우는구나.'하셨지만 그건 절대 아닙니다.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데다 본인도 원하기 때문이니까요. 만일 머리를 기르겠다고 하면 스스로 생각하여 결정한 것이므로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너무 안 어울리면 이야기하겠지만요. 누가 뭐래도 주체성 강하고 개성적인 멋진 내 딸을, 저는 믿습니다.

성교육 전문가 손경이의 딸의 인생을 바꾸는 50가지 교육법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 있게 딸 성교육 하는 법>은 '성'하면 먼저 떠오르는 섹스나 생식기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고정된 성 역할을 부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당황하지 않고 아들 웃으면서 성교육하는 법>을 출판한 후 딸의 성교육을 위한 책도 출판한 것인데요. 주체성, 젠더 감수성을 포함하여 영유아기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친밀감과 유대감을 이어가며 자연스럽게 성교육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해 조언하고 알려줍니다. 

딸과 저는 동문 선후배로, 제가 고등학생 때의 성교육은 과학적인 것을 넘어서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비디오를 통한 교육시간에 반 친구 예수가 은혜롭게도 화면을 흑백으로 전환시켜 준 덕분에 양동이에 가득한 태아 사체의 붉은빛은 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서른이 넘을 때까지도 그때의 강렬한 기억은 트라우마처럼 남아, 섹스의 결과물은 임신이고 낙태는 지옥불에 떨어질 중죄라 여겼습니다. 섹스는 사랑받기 위한(사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수단이었고 늘 임신에 대한 공포가 따라다녔습니다. 결국 마흔이 넘어 나 자신이 무성애자임을 깨달았습니다. 학습된 것인지 원래 그랬던 건지 모르겠지만 잘못된 성교육, 어린 시절부터 자주 마주친 바바리맨, 성추행범들의 행위까지 합쳐져 내 안에서 섹스에 관한 혐오와 공포가 꾸준히 커졌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섹스를 혐오한다고 해서 모든 이들의 섹스를 혐오하는 건 아닙니다. 짬뽕 알레르기가 있어서 못 먹는 건 내 사정이지 그걸 남들까지 못 먹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내 아이는 올바른 성 지식을 갖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어릴 때부터 그 수준에 맞는 교육을 계속해왔습니다. 쑥스럽거나 하진 않았어요. 어차피 둘 다 이과 감성이라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걸로 시작하니 쉬웠습니다.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엄마 씨와 아빠 씨가 어떻게 만나느냐는 설명을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 있게 딸 성교육 하는 법>에서처럼 블록의 요철이 만나는 것으로 했으면 좋았을걸. 우주 정거장에서 도킹하는 걸로 설명하고 말았지 뭔가요. 손동작 덕분에 알아들어 다행이었습니다. 초기 교육 덕분에 지금은 스스로 야설도 찾아 읽는 건전한(?)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원래 이런 건 독학하면 잘못된 - 폭력적이고 여자 입장에선 수동적인- 지식을 쌓을 수도 있기에 제대로 된 것을 알고 영화를 볼 때처럼 현실과 망상을 분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산에듀에서 출판된 손경이의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 있게 딸 성교육 하는 법>을 읽으며 난 참 잘해오고 있었구나 하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데 딸이 그런 책은 뭐 하러 빌려왔냐고 물었습니다. 빌린 게 아니라 내 책이라 하니 자신은 더 이상 교육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였습니다.
"읽다 모르는 거 있음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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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게 (반양장)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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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어릴 때, 언젠간 엄마가 늙고 그러면 죽는다는 생각에 공포를 심하게 느꼈었습니다. 허구한 날 엄마 죽으면 안 돼. 늙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절대 늙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이를 먹어가며 몸이 여기저기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도 진통제나 진경제 같은 걸 먹어가며 일시적인 현상이라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심지어 건강보험공단에서 실시하는 기본적인 건강검진도 받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나는 건강하니까요. 쌩쌩하니까요. 하지만 한계에 도달했나 봅니다. 
몸의 모든 곳이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습니다. 소화기계, 순환기계, 근골격계 할 것 없이 말이에요. 의사 선생님께서 꾸준히 약물 복용하며 생활습관을 개선해나가면 좋아지는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거라 말씀하셨는데요. 다행이긴 한데 충격이 좀 크더군요. 내가 이렇게 늙어가는 건가.
거울 속의 저는 어느새 미간에 세로줄이 패인 중년이더군요. 영원히 젊게 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스스로의 상태를 인지하고 나니 좀 우울하고 슬펐습니다. 

기시미 이치로의 <마흔에게>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건강과 행복은 말하자면 공기와 같은 겁니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것들 덕에 살 수 있었구나.'하고 알게 됩니다. 그때까지 행복을 의식하지 않았던 사람도, 불행하다고 느끼던 사람도 병에 걸리면 어제까지 행복했다는 것을 '통감'하게 됩니다.

-p.68


어제까지 누렸던 행복이 이제 멈춰버린 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조금 힘이 났습니다. 기시미 이치로는,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다, 춤과 같은 것이라서 순간순간 즐겁게 지내는 것을 권합니다. 마라톤은 목표가 있어 도달해야 하는 곳이 있지만 춤은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추는 게 아니니 인생을 춤처럼 살아가라 이야기합니다. 

저자가 나이 오십에 뜻밖의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나이 듦'에 관해 쓴 책 <마흔에게>가 내 나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저에게 부드럽게 충고합니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노화를 퇴화라고 보지 말고 변화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계절이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바뀌더라도 각각의 계절마다 특성이 있기에 다른 계절과 우월을 가릴 수 없다고 - 노년의 삶은 청년의 삶과 비교할 대상도 아니고 결코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p.6-7)

마흔이라는 생애 전환기에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나약함의 표현이라는 걸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새로운 계절 - 아마도 가을을 맞아 높고 푸른 하늘과 부드러운 바람, 알록달록한 단풍과 좀 더 짙어진 색의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이 순간도 행복하게 누릴 수 있다는 걸 미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무가 낙엽을 떨구며 겨울을 준비하듯이 저도 머리에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을 준비해야겠죠.

기시미 이치로의 <마흔에게>는 중년부터 병든 노년의 삶도, 건강한 노년의 삶도 소중히 살아갈 것을 이야기합니다. 
병든 몸으로 삶에 강한 집착을 갖는 게 혹시 자녀나 배우자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하여 미안해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들이 힘을 합치고 모일 기회를 주는 것이므로 살아있는 것 자체를 기쁘게 생각해도 좋다고 합니다. 제가 딸의 입장에서는 위의 말에 동의하지만 엄마의 입장에서는 미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가 그리 생각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그러므로 겨울이 오기 전의 이 가을을 즐겁고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을에 다람쥐가 겨울 양식을 대비하듯, 곰이 겨울잠을 준비하듯, 저도 저의 겨울을 준비하며 이 가을을 느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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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사회력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27
가도와키 아쓰시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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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아이가 책에 대해 대화하고 싶어 하길래 저도 급하게 읽어보았습니다. 워낙 빠르게 읽어서 자세한 내용을 습득하지는 못했고 대략의 내용만 파악했는데요. 
유전자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번식해나가 후대로 이어가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기 때문에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원시 수프 속 DNA로서의 우리는 그러했으며 그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상호 교류를 통하여 사회적 동물로서 살고자 합니다. 이타성이 있다는 것인데요. 박애주의자나 순간적인 행동으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런 분들을 따로 모셔두고서 보통의 우리를 두고 생각해보아도 때로는 이기적으로, 때로는 이타적으로 행동합니다. 유전자의 명령을 거부하는 셈인지도 모르지만 학습에 의해서건 본능에 의해서건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결국엔 무리 전체의 유전자 보호를 위해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면 이기적 유전자 법칙에 의해서 이타적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또한 호혜적 이타행동을 하기도 하는데요. 호혜적 이타행동이란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 사이라도 훗날 상대방이 갚아줄 가능성만 있다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해서라도 다른 누군가의 이익이 될 일을 기꺼이 해주는 인간의 행동을 말합니다.(p.89) 다른 동물에게서도 간혹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에게서 종종 관찰되는 이런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타자를 인식하는 능력이나 타자에 대한 공감능력, 감정 이입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데요. 이는 사회력의 기반이 됩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회력'의 최초 훈련은 주 양육자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책에서는 엄마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되어있지만 엄밀히 말해 '주 양육자'가 될 것입니다. 책 후반에서는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언급해두었고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부작용도 잠깐 이야기합니다만, 어쨌든 이 책이 쓰인 당시 일본의 가정에서는 주 양육자가 엄마였나 봅니다.(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만요.) 지금에 와서는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있으므로 아기와 엄마의 커뮤니케이션이라기보다는 주 양육자와의 그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주 양육자와 아이와 쌍방 소통이 끊임없이 부지런히 이루어져야 앞서 말한 것들 - 타자 인식, 공감능력, 감정 이입 능력 - 이 자라납니다. 

요즘 마트나 아파트 단지에서나 서너 살 된 아이들이 부모에게 말을 걸거나 질문하는 걸 자주 봅니다. 그런데 엄마나 아빠를 부르는데도 대꾸하지 않는 부모가 흔합니다. 대답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던가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렵다 하더라도 부모를 부를 때 "응? 왜?" 이 한마디 하는 게 뭐가 그리 힘들다고 아이가 서너 번씩 불러도 한 번 대꾸를 안 합니다. 현대의 아이들은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도 못하고 자신의 요구에 즉각 반응하는 스마트폰만 붙잡고 있는 셈입니다. 엄마 아빠는 대답해주지 않아도 스마트폰은 바로 대답해주거든요. 

이 책에서 말하는 사회력은 사회성과는 다릅니다. 

사회성의 개념이 실제로 있는 사회 측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에 반해, 사회력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사회를 만드는 인간 측에 역점을 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성이 기존 사회에 대한 적응을 메인으로 하고 그 사회의 유지를 지향하는 개념이라면 사회력은 기존에 있는 사회의 혁신을 지향하는 개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금 어린이들이나 젊은이들의 사회성 부족이 지적되고 있지만, 필자의 시작에서 보면 젊은 세대에게 부족한 것은 '사회성'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력'이다. 좀 더 나아가자면, 사회력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비단 젋은 세대만이 아니다. 기성세대인 어른에게도 상당히 결여되어 있는 것이 현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p.99

양육자가 올바른 태도로 아이의 사회력을 길러주는 것 - 가능하면 태교부터 전 성장과정에서 올바르게 적용되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죠.-이 무척 중요하며 이는 아이가 자라나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는가 결정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모두가 환경요인에 적용받는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좋지 못한 길로 빠지는 청소년이나 성인 중에선 제대로 된 사회력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많으므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에는 크게 동의합니다. 사회력을 갖춘 아이가 사회력을 갖춘 어른이 되는 법이니까요. 사회력은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데 있으므로 아이의 사회력을 배양하는 것에 힘써야 합니다. 주 양육자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말이에요.

실은 저도 가능하다면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어서 사회력이 좋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누굴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아이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커뮤니케이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다소 폐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써 천성이라고 우기고 싶지만, 어쩐지 후천적으로 학습된 것인 것 같아서 미안하며 안타깝습니다. 타인과의 교류는 어색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므로 고통스러운 감정노동이라고 종종 느끼는 저에게서 새어나간 그 무엇이 아이를 물들인 것 같아 속상합니다. 
어쩌면 '단절'이나 '비사회적'이라고 보이는 형태도 실은 새로운 사회와 커뮤니티를 형성해가는 과정일 뿐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처럼 불편한 인간관계는 피하는 사람도 집 밖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일처리를 할 때는 숨어들지는 않거든요. 혹시 <편의점 인간>처럼 매뉴얼화해서 응대하고 행동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것대로 슬프면서 행복하군요.

글 쓰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아이의 사회력을 기르는 것은 분명 주 양육자의 태도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러나 주 양육자가 자신의 감정을 삭이며 무리하여 시행한다면 그것 또한 전달될 텐데 어쩌면 좋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음. 우선 자신의 태도와 사회력을 먼저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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