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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 - 한강의 기적에서 헬조선까지 잃어버린 사회의 품격을 찾아서 ㅣ 서가명강 시리즈 4
이재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평점 :
어릴 적, 겨울이면 연탄을 들이고 새벽 세시쯤 억지로 일어나 연탄불을 갈곤 했습니다. 곤로라고 부르던 풍로에서 보글보글 김치찌개를 끓이고, 고등어를 튀겼습니다. 빗자루로 청소하며 비닐 장판 틈새에 들어간 먼지까지 싹싹 쓸어내고 손걸레질을 했습니다. 읽었던 책을 또 읽고, 책이 많은 친구 집에 가면 신나서 책을 읽었습니다. TV도 정해진 시간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던 만화영화의 마지막 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제시간을 맞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겨울이면 가스보일러를 틀고, 가스레인지와 전자레인지 또는 각종 조리 가전제품을 이용하여 음식을 준비합니다.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막대 걸레질을 합니다. 책은 사서 보고, 보내주는 책도 보고, 도서관도 이용하며 전자책 월 결제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TV도 영화도 애니메이션도 월 결제 서비스를 이용하며 언제든 시간이 날 때 풍요롭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생활 패턴은 최신식이 아니라 구식이 아닐 뿐으로 최신식으로, 얼리어답터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보다는 상당히 풍요롭고 편리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한국은 헬조선이 되어버린걸까요? 생각해보면 과거보다 훨씬 민주화도 되어있고, 복지도 나아졌으며, 성 평등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루어져가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고, 생활수준도 올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헬조선이라고 말합니다. 나 때는 이 정도로 살았는데 너는 뭐 이 정도 가지고 징징대는 소리를 하느냐는 꼰대는 수 세기를 거쳐서 반드시 있어왔으므로 그런 꼰대질을 하려고 질문을 던진 게 아닙니다. 분명 이 사회는 슬픔이 많은 사회입니다. 자살자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습니다. 아이와 제가 한집에서 살고 있다고 해서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건 아닙니다. 저는 과거의 힘들었던, 몸으로 때워야 할 일이 많았던 시대로부터 나이를 먹어온 세대이고, 아이는 월드컵 신화 탄생부터가 자신의 세상인 세대입니다. 시작점이 달랐던 만큼 2019년의 세상은 서로 다른 세상입니다. 다른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 세대의 사람들은 지금 이 한국을 아름답다, 유토피아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먹고살기 힘듭니다. MIT의 앨리스 암스덴은 <아시아의 다음 거인, 한국>이라는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한국은 한 해도 위기가 아닌 해가 없었다. 매년 위기였다. 늘 이런 위기가 없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그 위기를 성공적으로 넘기지 않은 해가 한 번도 없었다."(p.192) 그래서 우리는 한국 전쟁 이후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독재에 시달렸다가 민주화가 되었다가 다시 독재에 시달렸다가를 반복해오다 이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정치판이나 경제의 구린 이야기를 뉴스로 접하면 명치가 묵직해집니다. 세상은 좋아지고 있는 거 같긴 한데 그런 거 같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20세기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저도 그럴진대, 21세기의 소년 소녀들은 어떨까요. N포세대는 밀레니엄에 가깝긴 하지만 그들이 겪어야 하는 좌절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곳을 헬조선이 아닌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을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이 책은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고 사회, 경제, 정치면에서 분석하고, 해외의 사례와 비교하기도 하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생각하게 합니다.
한국 사회의 변화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압축적인 고도성장과 민주화는 큰 성취지만 그런 경제적, 정치적 변화의 폭과 깊이가 깊을수록 전통적인 규범이나 가치와의 간극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도덕, 규범의 지체나 괴리의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 지금 문제가 되는 사회의 품격이라고 할 수 있다.(p.33)
현재 우리나라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팽배해 있고, 제도와 정부를 불신하며 현실에 불만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청년층은 위험은 기피하려 하고 사회적 의제에 대한 참여가 소극적이며, 변화 의지가 부족하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도생하되, 경쟁이 심하고 공동체 의식은 낮다 보니 이 모두가 행복감이 떨어지는 사회적 원인이 된다. 이는 사회의 품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겪는 증상이다. 그렇다면 ‘좋은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치고, 제도에 대한 신뢰가 높고, 현실에 만족하며, 적극적으로 위험을 감수해 창업과 혁신 노력을 기울이고, 참여를 통해 능동적 변화를 끌어내려는 공동체 의식이 높은 사회, 이런 사회라면 국민들의 행복감은 높아질 것이다. (p.239-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