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 난 시체의 밤
사쿠라바 카즈키 지음, 박재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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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이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처음엔, 이 정도의 채무라면 이렇게 저렇게 상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빌리겠지요. 정말로 성실하게 꾸준히 노력하여 갚아나가는 사람들도있습니다만, 예기치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고 안일한 마음이 변제 시기를 놓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잠시 허둥대다 방법을 찾아내죠. 빚을 내서 빚을 갚는 방법. 그 순간에는 무척 개운합니다. 어쩐지 리셋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하지만, 다시 시작입니다. 빚을 내는 법을 알게 된 사람이 그 빚을 빚으로 매우는 방법은 배운 것뿐. 정말로 개선된 것은 아닌데도 한고비 넘겼다며 안심합니다. 그렇게 하나씩 정리하고 융자를 갈아타는 방법을 택한 것이라면 조금 다행인지도 모르겠지만, 빚을 내어 이자를 갚는 식의 돌려 막기를 하다가 빚이 점점 불어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처음엔 초조합니다. 어떡하지. 큰일이다. 두려움에 잠도 잘 못 자다가 어느 순간 멍해지며 현실도피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 괴로움에서 달아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도 큰일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는 있거든요. 


시로이 사바쿠 역시 처음엔 소액의 빚이었습니다. 갚아나갈 수 있었지요. 그러나 그게 점점 불어나더니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고서점 2층에 얹혀사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별로 가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가 무척 싫어하는 타입이었거든요. 빈말로도 건전하다거나 성실하다거나 어떻게든 살아보려 한다거나 하는 생기 따위는 전혀 없습니다. 

요시노 사토루도 정말 비호감입니다. 마흔이 넘은 번역가이자 교수인 그가 재력가 처갓집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는 건 제가 싫어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이 남자, 과거에 잠시 생활했던 고서점의 2층 방에서 만난 사바쿠를 강간합니다. 사바쿠가 강간당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만, 처음 보고 인사한 당일 갑자기 되돌아와 그녀의 동의도 없이 갑자기 덮치는 건 강간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에게도 빚이 있습니다. 청년 시절 학자금과 생활을 위해 지고 있던 빚은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가 갚아나가야만 하는 그의 몫이었습니다. 아내에게 말하면 한번에 갚아 줄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지만, 그의 자존심 때문인지. 어쨌거나 그는 스스로 성실히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사바쿠와 사토루는 그 고서점 2층에서 자주 관계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바쿠는 사토루에게 300만 엔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말이 빌려달라는 것이지 둘의 동영상을 몰래 촬영하고서 SD카드를 흔들어대며 입막음비를 요구하는 것이었지요. 자신이 진 빚에서 탈출하기 위해 요구한 그 돈이 자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을 것이라는 건 알지 못한 채 말이죠. 그리하여 그녀는토막 난 시체가 되고 맙니다. 


이 소설의 가독성은 좋습니다. 분량 자체도 많지 않기 때문에 금방 읽힙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빚'이라는 문제는 일본 사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기에 가벼이 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설의 성적인 묘사나 자극적인 표현은 좀 불편했습니다. 현재 이 책은 절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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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족일까 푸른도서관 71
유니게 지음 / 푸른책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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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소녀 이혜윤은 부모가 이혼 한 후 아빠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며 외로움이란 자신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강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갑자기 미국에서 돌아오게 된 12세의 동생 때문에 짜증이 납니다.  귀엽지 않은 모습으로 돌아온 동생이 전혀 반갑지 않았으며 돌볼 생각도 없습니다. 게다가 아빠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동생은 누나와 아빠의 눈치를 보는 듯 착하게 지내려고 합니다. 낄낄거리며 TV를 보다가 소파에서 잠이듭니다. 왜냐하면, 방이 없었거든요. 아빠도, 누나도 방을 함께 쓰자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혜윤이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동생이얄밉기도 하고 언젠간 엄마를 만나러 갈 거라는 희망마저 꺼져버린 지금, 사춘기 소녀는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동생인 형준이가 눈치 보는 것도 안쓰럽습니다. 느닷없이 엄마가 돌아가신 것에 마음 다쳤을 아이를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 역시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형준이는 누나가 버린 모형집을 주워다가 몰래 만듭니다. 엄마의 죽음을 알고 더 이상 모두가 함께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좌절에 던져버렸던 모형집이었지요. 아이에겐 가족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했습니다.모형집은 누나와 아이를 이어주는 매개체 같은 것이었나 봅니다. 형준이가 몰래 만드는 모형집, 그것을 묵인하며 차츰 다가서는 혜윤. 아이들은 서로 가까워집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눈물이 찔끔찔끔 나왔습니다. 

도서관인데, 앞자리에 앉은 남학생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눈치도 보였지만, 마음이 저려오는 걸 제 눈은 감추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혜윤이도 안타깝고, 형준이도 안타깝습니다. 표현을 잘 할 줄 모르던 아이들의 아빠도 안타깝습니다. 심지어 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생각하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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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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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간단한 줄거리.

찰리라는 여자가 제멋대로 살면서 흑역사를 구축하던 중 지우고 싶은 과거를 지워준다는 묘한 컨설턴트의 말에 넘어가 흑역사를 지웠지만, 결국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건 아니었는데... 자, 이제 원상복구해야겠지. 대부분의 로맨스 코미디 영화나 소설이 그렇듯이.


이 여자, 정말 멋대로 사는데...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정말 말 그대로 막 삽니다. 그렇게 막 살면서 행복해하는 것도 아닙니다. 학생 때의 첫사랑과의 첫 경험을 충격적으로 겪은 뒤 그 트라우마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튼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스물아홉. 동창회 소식과 함께 옛사랑도 나타났는데, 그는 자기 애인과의 트러블을 해소하기 위한 질투 작전에 찰리를 이용합니다. 이에 상처받은 찰리. 폭음 후 다음 날 자신이 다니던 주점 사장님이 빌려준 코트에서 발견한 컨설턴트 주소로 찾아가 보는데요. 헤드헌팅 업체였던 그곳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합니다. 그때, 마치 요정 대모님 같은 모습의 한 컨설턴트가 그녀에게 원치 않는 기억을 지워주겠다고 하는데.... 그녀가 지우고 싶은 기억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흑역사들을 지우고 났더니, 세상에. 오늘이 그 첫사랑과의 결혼식 날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치는 않았는데...


아, 찰리. 이런 캐릭터를 뭐라고 해야 하죠? 원래의 그녀도, 기억을 지운 후의 그녀도 정말 부적응 자입니다. 자신이 현재 처해있는 상황에서 개선을 하려는 노력을 하거나 적응을 하려는 그런 캐릭터가 아닙니다. 이런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니야!라고 외치는 캐릭터인데요. 현실이 아무리 개떡 같더라도 과거의 '내'가 쌓여 현재의 '내'가 된것이니 어쨌든 앞으로 전진만이 살 길인데, 그걸 모르는 모양입니다. 나중에는 깨닫게 되지만요. 

정정하고 싶은 과거가 있더라도 수정 후의 결과가 반드시 플러스일 거라는 보장이 없고, 설령 좋은 쪽으로 변화했더라도 미래의 행복까지 보장된 것은 아니니 그다지 과거를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비교적 평탄하지 못한 시간들을 살아온 편인데요. 그 괴로웠던, 죽음까지 생각했던 그 시절까지 모두 포함해서 바꾸고 싶은, 지우고 싶은 과거는 없습니다. 현재도 정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요. 과거를 바꾸고 나면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게 되니까요. 


이 소설은 제가 그다지 좋아하는 분야의 소설은 아닙니다. 내용도 뻔하고, 주인공도 마음에 안 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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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콜렉터 30
아르노 슈트로벨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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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업의 상속녀인 에바는 어느 날부터 잠자리에 들면 끔찍한 악몽을 꿉니다. 관 속에 누워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다가 꿈에서 깨어나면 실제로도 팔꿈치나 손에 상처가 남아있었습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에 여자를 관에 넣어산 채로 암매장하는 살인마가 등장했다는 사실이지요. 에바의 이복 여동생 잉에마저도 희생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에바의 꿈과 여자들의 죽음은 묘하게 닮아있었습니다. 그녀는 어째서 그런 꿈을 꾸는 걸까요?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브리타는 어릴 적 학대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경험이라고 말할 수 업을 정도로 끔찍한 일들을 겪었지요. 그 학대의 크기가 너무나 커서 어른이 된 이후에도 가끔씩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사건 담당 형사인 베른트와 유타는 피해자 잉에의 주변 인물들을 수사하다가 에바가 어린 시절에 새어머니로부터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에바에게는 잉에 외에도 마누엘이라는 이복동생이 있었는데요. 그 아이도 학대를 당했으며 어느날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에바는 마누엘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요. 자신이 그 조그만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마누엘이 죽을 때 에바 역시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지켜 낼 수 없었을 겁니다. 어린 에바는 멍투성이의 몸으로 마누엘을 안아서 위로해주곤 했거든요. 가해자였던 새어머니는 에바가 10대때 암으로 죽었고, 지켜주지 않았던 무능한 아버지 역시 돌아가셨지만 에바의 상처는 여전해서 사람들과 엮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동학대란 그런 깊은 상처를 남기는 법이니까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끔찍한 아동학대 사건들이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어쩜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럴 수 있을까 싶은 일들이 말이지요.

우리 어린 시절에는 그런 일들이 없었을까요? 아니요. 더 많았습니다. 다만 당하는 쪽도 가하는 쪽도 그것이 학대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아동학대는 어린시절의 일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걸 스스로의 의지로 극복하지 못하냐며 이죽거리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만큼의 상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회복하며 산다는 건 정말이지 힘든 일입니다. 아무리 꿰매고 약을 발라도 커다란 흉터가 가슴에 남아 지워지지 않습니다. 방임, 언어폭력 정도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부모들도 많고, 신체 폭력, 성폭력, 심리적 폭력, 혹은 복합적인 폭력들이 아이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의 2011년 아동 학대 실태 조사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중앙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신고된 아동 학대 건수는 총 2만 9,381건으로 집계되었다. 또한 가해자의 79.7%가 부모로 조사되었으며, 아동 학대 유형으로는 복합적 학대가 41.40%로 가장 많고, 방치 33.30%, 심리적 학대 13.88%, 신체적 학대 6.93%, 성적 학대 4.50%로 나타났다.

미국에서는 2010년에 대략 69만 5000건의 아동 학대가 입증되었고, 이중 78.3%가 방치였다. 2010년 미국의 전체 아동 중 학대받고 있는 아동의 비율은 1% 미만으로 나타났다. 또한 2008년에 미국에서 아동 학대로 사망한 아동은 1730명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동 학대 [child abuse] (심리학용어사전, 2014. 4., 한국심리학회)


이 책의 등장인물들도 그렇게 하루하루 죽어갔습니다. 간신히 어른이 되긴 했지만, 그들은 관에 눕는 존재가 되었고, 관에 눕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누가 그들을 그 관에서 꺼내어 구해 줄 수 있을까요.


빠른 전개와 호흡, 탁월한 심리 묘사, 소설에 깔려있는 수많은 복선들이 저를 끝까지 끌고 간, 그런 소설입니다. <스크립트>와 더불어 북유럽 특유의 군더더기, 오지랖 등이 없어서 읽기 편했던 책이었습니다. 내용은 상당히 슬프고 끔찍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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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20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봐야겠어요. 장르소설 좋아함!^^
잘 읽고 가요.^^

포니 2016-02-21 22:05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시리즈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권일영 옮김 / 검은숲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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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의 소설들은 독특함이 있습니다. 20세기 초기에 쓰인 작품들이니 현대의 문체와는 많이 다르기에 독특하다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는데요. 만일 번역자가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게 상당 부분을 현대적으로 고친다면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20세기 초기 스타일로 번역한다면 너무 예스러워지기에 광범위한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은 그 텐션을 잘 조절한 것 같습니다. 적절한 용어와 문장의 길이 조절로 읽어나가는데 조금도 부담 없이 앞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누드사철본이라 혹시 책이 이 부분에서 쪼개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잠시, 손에 들고 읽지 않고 책상에 두고 읽으니 아주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지요. 종이의 질도 참 마음에 듭니다. 미색의 부드러운 종이가 노안이 될까 말까 망설이는 저의 눈을 편안하게 해주었지요. 물론 내용은 편안하지 않았지만요.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은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가 절묘하게 버무려져 있기에 마냥 신나게 읽기에는 부담스럽습니다. 그 기괴함은 스티븐 킹의 호러물과는 다릅니다. 동양적인 기괴함이지요. 


앞서 문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요.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의 독특함은 서술기법에서도 드러납니다. 작가는 서술을 하다 말고 독자를 향해 이야기를 합니다. 넌지시 독자에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말을 걸어버립니다. 독자 여러분 여기를 주목해주세요. 이 부분이 중요한 부분입니다...라는 식으로요. 독자 여러분은 눈치채셨겠지요?라는 말을 들을 때 나도 모르게,뭘? 하고 대답하고 마는데, 소리 내어 대답하고선 민망함에 웃음 지으며 다음 장을 넘깁니다. 그러니 소설을 읽으면서도 목소리 걸쭉한 전기수나 변사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하여 더 신나게 이야기의 흐름을 타고 달립니다.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은 세 권으로 분권되어 있는데요. 첫 번째 권은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애벌레','천장 위의 산책자'의 세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둘째권과 셋째권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거미남' 입니다. 사실 저는 에도가와 란포의탐정소설보다는 괴기 소설을 좋아합니다. 그가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고 하더라도요. 란포의 탐정소설은 그렇습니다. 이러저러한 사건이 벌어지고. 왁!! 놀랐지? 이건 몰랐지? 하는 놀라움을 주고자 하는 면이 참 재미있습니다. 아, 제가 탐정소설을 싫어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괴기 소설을 더 좋아한다고 했던 건데, 혹시 오해하신 분은 없으시겠지요? -라고 란포의스타일을 흉내 내 보았습니다.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는 기괴하면서도 애틋한 것이 사랑이란 이렇게 별스럽기도 하고, 쓸쓸하게 만들기도 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시에 기법으로 만들어진 그림의 액자와 함께 여행하는 이 남자의 사연이란 어쩐지 그 끝을 알 것 같은 기분에 추욱 가라앉고 맙니다. '애벌레'는 앞서 흑림귀인단의 소책자로 읽고 리뷰한 일이 있기에 간략하게  이야기합니다만, 저는 란포의 소설들 중 인간 의자 다음으로 애벌레가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되지 않은 '거울 지옥'까지가 제가 꼽는 란포 3대 기괴 환상입니다. 애벌레는 그로테스크한 에로티시즘의 집약체이지요. 장면은, 상상하지 마시길. '천장 위의 산책자'는 범죄 이야기에 심취했던 한 남자가 천장 위의 통로를 발견하고 범죄를 저지르기로 결심하고 실행하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두근두근. 함께 조마조마 해집니다. 


'거미남'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소설입니다만 어쩐지 어디선가 부분부분 보았던 것 같은 데자뷔가 느껴집니다. 어쩌면 다른 소설에서 그 트릭을 차용했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아니면 탐정 만화에서 그랬을는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이 '거미남'은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었다고 합니다. 자신만의 미학으로 엽기적인 살인을 벌이는 괴이한 살인마를 쫓는 탐정 소설인데요. 당시에는 이름 지어지지 않았던, 요샛말로 하면 사이코패스가 등장합니다. 거미남이라는 이름으로요. 이 살인마를 쫓는 탐정은 구로야나기 박사. 희한하죠. 에도가와 란포의 탐정은 아케치 고고로(혹은 코고로)이고 조수는 고바야시인데요. 이번 소설에선 구로야나기 박사가 탐정역이고 노자키가 조수입니다. 조금 다른 스타일인가 보군. 하며 읽고 있는데, 네. 아케치가등장합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범인의 허를 찌르며 범행을 밝혀내지요. 약간 웃음이 새어 나오는 부분도 있었지만, 경쾌하게 읽어나가다 보면 끔찍한 살육 현장에 도착합니다. 이 소설에서도 란포의 그로테스크함이 드러나더군요. 신나게 마차를 타고 달려가다가 화염 속으로 뛰어든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 책은 란포의 직계손과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소설 평론가들이 기획한 <에도가와 란포 전집 30>의 국내 유일 정식 완역본으로 국내판에서는 초판을 비롯한 각 판본의 차이 비교 및 해설, 초판 표지 및 당시 신문광고 등 화보, 에도가와 란포의 자작해설 등이 실려있기에 소장가치 또한 높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에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인 것으로 보아 앞으로 계속 출간될 예정인 듯하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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