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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 ㅣ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시리즈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권일영 옮김 / 검은숲 / 2016년 2월
평점 :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들은 독특함이 있습니다. 20세기 초기에 쓰인 작품들이니 현대의 문체와는 많이 다르기에 독특하다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는데요. 만일 번역자가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게 상당 부분을 현대적으로 고친다면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20세기 초기 스타일로 번역한다면 너무 예스러워지기에 광범위한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은 그 텐션을 잘 조절한 것 같습니다. 적절한 용어와 문장의 길이 조절로 읽어나가는데 조금도 부담 없이 앞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누드사철본이라 혹시 책이 이 부분에서 쪼개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잠시, 손에 들고 읽지 않고 책상에 두고 읽으니 아주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지요. 종이의 질도 참 마음에 듭니다. 미색의 부드러운 종이가 노안이 될까 말까 망설이는 저의 눈을 편안하게 해주었지요. 물론 내용은 편안하지 않았지만요.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은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가 절묘하게 버무려져 있기에 마냥 신나게 읽기에는 부담스럽습니다. 그 기괴함은 스티븐 킹의 호러물과는 다릅니다. 동양적인 기괴함이지요.
앞서 문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요.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의 독특함은 서술기법에서도 드러납니다. 작가는 서술을 하다 말고 독자를 향해 이야기를 합니다. 넌지시 독자에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말을 걸어버립니다. 독자 여러분 여기를 주목해주세요. 이 부분이 중요한 부분입니다...라는 식으로요. 독자 여러분은 눈치채셨겠지요?라는 말을 들을 때 나도 모르게,뭘? 하고 대답하고 마는데, 소리 내어 대답하고선 민망함에 웃음 지으며 다음 장을 넘깁니다. 그러니 소설을 읽으면서도 목소리 걸쭉한 전기수나 변사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하여 더 신나게 이야기의 흐름을 타고 달립니다.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은 세 권으로 분권되어 있는데요. 첫 번째 권은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애벌레','천장 위의 산책자'의 세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둘째권과 셋째권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거미남' 입니다. 사실 저는 에도가와 란포의탐정소설보다는 괴기 소설을 좋아합니다. 그가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고 하더라도요. 란포의 탐정소설은 그렇습니다. 이러저러한 사건이 벌어지고. 왁!! 놀랐지? 이건 몰랐지? 하는 놀라움을 주고자 하는 면이 참 재미있습니다. 아, 제가 탐정소설을 싫어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괴기 소설을 더 좋아한다고 했던 건데, 혹시 오해하신 분은 없으시겠지요? -라고 란포의스타일을 흉내 내 보았습니다.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는 기괴하면서도 애틋한 것이 사랑이란 이렇게 별스럽기도 하고, 쓸쓸하게 만들기도 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시에 기법으로 만들어진 그림의 액자와 함께 여행하는 이 남자의 사연이란 어쩐지 그 끝을 알 것 같은 기분에 추욱 가라앉고 맙니다. '애벌레'는 앞서 흑림귀인단의 소책자로 읽고 리뷰한 일이 있기에 간략하게 이야기합니다만, 저는 란포의 소설들 중 인간 의자 다음으로 애벌레가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되지 않은 '거울 지옥'까지가 제가 꼽는 란포 3대 기괴 환상입니다. 애벌레는 그로테스크한 에로티시즘의 집약체이지요. 장면은, 상상하지 마시길. '천장 위의 산책자'는 범죄 이야기에 심취했던 한 남자가 천장 위의 통로를 발견하고 범죄를 저지르기로 결심하고 실행하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두근두근. 함께 조마조마 해집니다.
'거미남'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소설입니다만 어쩐지 어디선가 부분부분 보았던 것 같은 데자뷔가 느껴집니다. 어쩌면 다른 소설에서 그 트릭을 차용했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아니면 탐정 만화에서 그랬을는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이 '거미남'은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었다고 합니다. 자신만의 미학으로 엽기적인 살인을 벌이는 괴이한 살인마를 쫓는 탐정 소설인데요. 당시에는 이름 지어지지 않았던, 요샛말로 하면 사이코패스가 등장합니다. 거미남이라는 이름으로요. 이 살인마를 쫓는 탐정은 구로야나기 박사. 희한하죠. 에도가와 란포의 탐정은 아케치 고고로(혹은 코고로)이고 조수는 고바야시인데요. 이번 소설에선 구로야나기 박사가 탐정역이고 노자키가 조수입니다. 조금 다른 스타일인가 보군. 하며 읽고 있는데, 네. 아케치가등장합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범인의 허를 찌르며 범행을 밝혀내지요. 약간 웃음이 새어 나오는 부분도 있었지만, 경쾌하게 읽어나가다 보면 끔찍한 살육 현장에 도착합니다. 이 소설에서도 란포의 그로테스크함이 드러나더군요. 신나게 마차를 타고 달려가다가 화염 속으로 뛰어든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 책은 란포의 직계손과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소설 평론가들이 기획한 <에도가와 란포 전집 30>의 국내 유일 정식 완역본으로 국내판에서는 초판을 비롯한 각 판본의 차이 비교 및 해설, 초판 표지 및 당시 신문광고 등 화보, 에도가와 란포의 자작해설 등이 실려있기에 소장가치 또한 높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에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인 것으로 보아 앞으로 계속 출간될 예정인 듯하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