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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이 부서진 남자 ㅣ 스토리콜렉터 36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현 옮김 / 북로드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육체가 무너져가는 것과 정신이 무너져가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힘든 일일까요. 남의 일이라고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 없는화제인 것 같습니다. 만약 자신의 일이라면 사정이 달라질 테니까요.
저희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파킨슨병을 앓으셨습니다. 일흔이 넘으셔도 스커트 정장 차림으로 고운 구두 신고 씩씩하게 다니시던 분이셨는데, 여든이 넘으시면서 찾아온 파킨슨병으로 몸의 통제력을 상실하셨습니다. 병세가 깊어져서 요양원에 계셨었는데요. 파킨슨병도 할머니의 정신력은 좀 먹지 못했나 봅니다. 화장도 곱게 하시고 뭇 사람들에게 윙크를 날리시며 재미있게 지내셨거든요. 돌아가시기 전 날까지도요. 그래서 저는 파킨슨병이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병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왜 아니었겠습니까. 심한 몸살이 나 팔다리가 내 것 같지 않을 때에도 괴로운걸.
더욱이 중년의 나이에 찾아온 파킨슨병은 한 심리학자의 정신마저 흔들었습니다. 정신분석학 교수이자 임상 심리학자인 조 올로클린은 파킨슨병이 조금씩 진행되는 것 때문에 우울해합니다. 육체가 부서져가면서 조금씩 정신도 무너져 가는 것이었지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따로 움직이고 흔들리는 몸의 왼쪽 부분 때문에 힘듭니다. 환경을 바꿀 겸해서 런던 생활을 정리하고 잉글랜드 남서부의 작은 도시로 이사를 한 조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여전히 열심히 일하는 아내와 사랑스러운 두 딸들 모두 이곳에서의 생활을 만족스러워합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조는 경찰의 요청으로 벼랑에서 투신자살을 하려는 알몸의 여자를 설득하기 위해 그곳으로 갑니다. 하지만, 설득도 해보기도 전에 그녀는 '당신은 이해 못해'라는 말을 남기고 절벽에서 떨어지지요. 자신이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하고 있던 그에게 죽은 여자의 딸 다이시가 찾아옵니다. 엄마는 고소공포증이었기에 높은 곳에 올라가 뛰어내릴 리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요. 조는 오갈 데 없는 다이시를 보호하는 한편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스스로 탐정 역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런던에 있던 퇴직 경찰인 빈센트가 합류하면서 그들의 사건 추적이 본격화되려는데 또 한 명의 여자가 알몸으로 동사합니다. 범인은 같은 사람이지요.
그는 여자를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을 것이다. 여자는 내 말을 듣고 있었으니까. 이게 바로 전문가와 덜떨어진 아마추어의 차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여는 법을 안다. 마음을 구부릴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으며, 겨울 동안 폐쇄 조치를 내릴 수도 있다. 그 밖에도 오만 가지 방식으로 마음을 조져버릴 수 있다.
-p.29
조와 빈센트, 그리고 경찰 베로니카가 찾는 범인은 기드온입니다. 그는 군 출신이거나 탈영한 군인입니다. 범행 동기는 자신을 떠나버린 아내와 딸을 찾기 위함입니다. 아내와 딸은 그리스 여객선 침몰 사고로 죽었다고 하지만 절대 믿지 않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딸에게 심각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내의 친구들을 하나씩 괴롭히다가 죽인다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아내가 나타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정신이 부서진 남자였습니다. 기드온은 군에서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잠입하고 이동하는 데 전문가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댈 수 있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튼튼한 신체를 가졌지만 그의 정신은 무너져가고 있었지요. 그는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딸을 데리고 있다고 합니다. 사전 조사를 통해 완벽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그는 상대방이 믿지 않을 수 없도록 교묘하게 말을 잇고 그녀의 통제력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합니다. 딸을 구하고 싶었던 엄마들은 그렇게 그의 희생물이 되고 맙니다.
"조, 나는 사람이 희망을 모두 잃는 순간이 언제인지 알아. 긍지, 기대, 믿음, 욕망이 모조리 사라지는 순간. 나는 그 순간을 지배해. 완전히 장악해버리지. 그리고 그 순간, 내가 기다리던 바로 그 소리가 들려."
"무슨 소리?"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 뼈가 부서지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는 아니야. 그렇다고 심장이 저며지는 것처럼 부드럽고 축축한 소리도 아니지. 그건 하나의 인간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을 수 있는지 자연히 상상하게 되는 소리야. 가장 강력한 의지가 무너져내리고, 과거가 현재로 스며들어오는 소리. 너무나 높은 고음이라서 지옥의 사냥개들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 네게도 그 소리가 들리나?"
-p.574
마이클 로보텀의 <산산이 부서진 남자>는 대단한 스릴러물입니다. 6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전혀 그 두께를 실감할 수 없을 정도로 흠뻑 빠져들게 만듭니다. 게다가 묘사력도 대단해서 점점 숨이 막혀오는 기분, 싸늘해지는 기분들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저 역시 딸을 키우고 있는 엄마이기 때문에 만일 기드온과 같은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아이를 해치겠다고 말한다면, 과연 나는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가 지켜보는 것 같은 상황에서 PC를 이용해서 도움을 청하는 건 가능할까... 어떻게 사실을 확인해서 대처해야만 하지... 하며 불안했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남자>는 피터 도넬리라는 사람에 의해 일어났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쓰인 소설입니다. 후속작인 <내 것이었던 소녀>가 24일, 어제 날짜로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내 것이었던 소녀>는 호주에서 발생한 리네트 도슨 실종사건을 모티브로 한다고 합니다. 그 소설은 또 얼마나 제 마음을 뒤흔들지... 기대하며 기다려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