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합본)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이라는 소설은 1998 년작이니 참 오래되었습니다. 벌써 20여 년 전이네요. 90년대에 유행했던 코드였는지 아니면 제가 그런 걸 좋아해서 찾아다녔기에 눈에 더 띄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영혼이 서로 뒤바뀌는 내용의 소설, 만화,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영혼이 뒤바뀌어 육체를 잘 못 찾아들어가는 경우 웃픈 해프닝들이 벌어지는데요. 보통은 마지막에 영혼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고 신기한 경험을 했던 그들은 그 후로도 잘 살아갑니다. 아, 그러고 보니 90년대에만 유행했던 게 아니네요. 시크릿 가든에도 그런 내용이 들어 있었으니까요. 아무튼, 저는 그런 이야기들을 좋아합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일까요? 지금은 어휴. 싫습니다. 뚱뚱하고 못생겼지만 그런 제 자신의 그릇 안에 들어 있길 원합니다. 

영혼이 뒤바뀌는 내용의 소설 <비밀>은 몇 년 째 읽지 않고 미뤄두고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이런 종류의 소설들은 참 마음을 후벼파거든요. 그러니 우울함에 우울을 더하지 않으려고 몇 년 동안 못 본 척하고 있었는데, 오늘 느닷없이 충동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후회했습니다. 다른 날 읽을걸. 오늘은 혼자 있는 날이거든요. 실과 바늘 관계에 있는 제 딸이 오늘은 수련회에 가서 없는 날이에요. 그런 날, 딸아이와 영혼이 바뀌는 소설을 읽다니. 그것도 사고가 나는 바람에 말이에요. 


스키버스를 타고 친정으로 가던 나오코와 모나미는 기사의 졸음운전으로 전복사고를 당합니다. 엄마는 죽고 딸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생각했건만, 살아난 것은 딸의 육체와 아내의 영혼이었던 것입니다. 남편 헤이스케와 아내 나오코는 혼란스러웠지만, 어쨌든 서로의 호칭을 조심하며 아빠와 딸 모나미로서 살아가기로 합니다. 아내의 결혼반지는 모나미의 곰인형 안에 넣고 꿰매었습니다. 호칭은 달라졌지만, 부부라는 사실은 잊지 않기 위해서.



"이 곰인형은 우리 두 사람만의 소중한 비밀이에요."

그녀는 마치 곰인형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마지막 끈인 것처럼 꼭 껴안았다.

-p.77


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내를 온전히 아내로 대하기도, 그렇다고 온전히 딸로 대하기도 어려운 헤이스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소설은 한없이 무거울 법도 한데, 가벼운 위트를 곁들이며 시간이 흘러갑니다. 헤이스케는 말하자면, 여러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여서, 사고를 낸 기사의 가족에게까지 신경을 씁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만으로도 버거울 텐데요. 처음엔 이 소설이 만화나 드라마처럼 어느 정도 짧은 시간, 길어봐야 일이 년 사이에 끝날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무척 긴 시간을 소요하며 진행됩니다. 메인으로 보이는 시간만도 무려 5년이거든요. 그 사이에 모나미- 의 모습을 한 나오코-는 인생을 열심히 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사립 중학교에 진학하고 또다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합니다. 의대에 가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그들은 점점 적응해가고 어쩐지 정말로 아빠와 딸의 모습 같아집니다. 마음 좋았던 아빠는 점점 질투합니다. 혼자서만 젊음을 누리는 아내에게, 혹은 남자아이들과 어울리는 아내에게. 그것은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뺏기는 것만 같아 불안해하는 모습 같겠지만, 특수한 상황이라는 걸 빼고 객관적으로 본다면 사춘기 딸과 그 딸을 사랑하는 아빠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아빠와의 관계는 멀어지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데다가 속내를 다 알 수 없으니 아빠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모습에 진한 질투를 더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도 조금씩 변화가 생깁니다.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모나미가 사실은 그 안에 함께 살고 있었던 듯. 깨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 그들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됩니다. 


간단한 줄거리로 모두 말할 수 없는 이 이야기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기에 더 가슴 아프게 받아들였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길을 택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이기적이기 때문이지요. 소설은 그들이 상황에 적응해 나갈수록 점점 무거워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저를 무척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이 감정이 슬픔인지 사랑인지 아픔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헤이스케도 마찬가지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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