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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그라운드
S.L. 그레이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6년 5월
평점 :
"부셰 씨?"
꼬마의 으스대는 말투가 사라졌다. 브렛은 그저 겁먹은 열일곱 살 소년일 뿐이었다.
"우리 나갈 수 있죠? 그렇죠?"
윌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답이 그의 얼굴에 분명히 쓰여 있었다.
아니.
그들은 이 안에 갇혔다.
-p. 154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듯, 현대의 지구인들은 핵 전쟁이나 각종 기상이변으로 인한 대재앙이 닥칠 것에 대비해 나름대로의 방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가 그런 건 아니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주에 탑승을 허락받지 못한 동물들처럼 - 종류별로 한 쌍이니 그 외에는 다 수장되었을 테죠. - 설마 무슨 일이 나겠냐며 현재를 살아가지만, 일부의 어마어마한 재벌들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 벙커나 셸터의 입주권을 마련해 둔다고 합니다.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바스토의 황무지에는 테라 비보스라는 이름의 지하 벙커가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지어진 민간용 노아의 방주인데요. 핵 전쟁, 슈퍼 바이러스, 소행성 충돌, 기상이나 태양풍 이변으로 인한 각종 재앙에서 안전히 지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밀폐된 공간으로 어떤 바이러스나 생화학 무기도 침투할 수 없으며 공기 정화장치와 정수장치도 완벽히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1인당 점유 면적은 10제곱 미터가 채 안되지만 호화 요트급의 편의시설 제공으로 아주 안락한 생활을 보장한다고 합니다. 물론 의료실도 갖추고 있고요. 입주권은 생각보다 저렴(?) 합니다. 성인 5만 달러, 미성년자 2만 5천 달러니까요.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입주자 선정에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고 하니 입주는 만만치 않겠습니다. 이 안에서 생활할 수 있는 기간은 1년 정도. 사진을 봤더니 없는 게 없네요. 아주 호화롭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하느니만큼, 그 구성원들이 제발 협조적이고 온화한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건 저 뿐만이 아니겠지요.
종말론을 믿거나 정신적 불안, 혹은 미래에 대한 대비, 자식 사랑 등의 이유로 벙커의 입주권을 마련한 사람들이 <언더 그라운드>에 등장합니다. 여기는 테라 비보스보다 좀 작은 시설인가 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입주자 수가 많지 않거든요. 개인적으로 지어서 분양하는 일명 '성소'라는 지하 벙커에 입주계약이 완료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WHO가 아오바 바이러스로 인한 세계 비상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이 슈퍼 바이러스는 아시아를 장악하고 미대륙을 덮쳤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모두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불안해져 서둘러 성소에 입주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시공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생각보다 많이 부실합니다. 운영자 그레그의 말에 따르면 공사비가 부족했다고 하는데요. 이건 기술자 윌과 그레그, 그리고 독자인 저 사이의 비밀입니다. 입주자들이 알면 난리가 날 테니까요. 입주하는데 150만 달러나 지불했는데 고작 이런 시설이라니 화가 납니다. 지하 8층까지 오르락내리락. 엘리베이터가 가동이 안되다니 어쩌자는 건지. 그들이 불편을 호소하기 전에 수리하면 되겠죠. 윌이 나설 때입니다. 그래요. 지하에서 운동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계단을 이용한다고 긍정적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레그는 분명 완벽한 의료시설도 있다고 했었다고요. 의료시설은커녕, 의사라고는 입주자 중 치과의사인 스텔라 박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입주자들에게도 문제가 있어요.
청소년기의 방황이라고 하기엔 그 정도가 지나쳐 폭력성이 가득한 브렛, 그의 가부장적인 아버지 캐머론,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늘 희생하는 지나, 광신도에 제정신이 아닌 엄마 보니. 이 거스리 가족이 제일 문제입니다. 거칠고 개념 없어요.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니까요. 아내가 받은 유산을 모두 이 시설에 털어 넣고 트레일러에서 생활하다가 입주했는데요. 종말론자라면 기도하면서 종말을 잘 맞이할 것이지 왜 피난을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가지고 어디 구원받겠어?
한국계 미국인 유진 박 - 바이올린을 연주하지는 않습니다- 과 치과의사 아내 스텔라, 그리고 와우에 빠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년 재이.
불과 몇 달 전 아내가 자살해버려 어린 딸 새리타와 함께 입주한 타이슨, 일을 그만두고 고향인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가려다 공항이 폐쇄되는 바람에 얼떨결에 같이 입주하게 된 새리타의 보모 매력적인 케이트.
변호사이지만 짜증 나는, 말하자면 여왕님 캐릭터의 빅토리아와 그녀의 남편 제임스.
과거에 스파이였던 데다가 전기, 기술, 통신 능력자 레오와 발레리나였던 딸 트루디. 그리고 아픈 아내 캐럴라인.
누가 봐도 어딘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한데 모였으니, 특별한 상황이 아니어도 함께 하기엔 부척 불편한 상황입니다. 빨리바깥세상이 정리가 되어 이곳을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큰일 났습니다.
광신도인 보니는 딸인 지나가 재이의 컴퓨터 게임을 구경하는 것을 보고 딸을 구하기 위해 -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제어실에 불을 질러 와이파이를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운영자인 그레그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바깥세상에 연락할 수도,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해치를 열 수도 없습니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는 데, 사람들도 하나씩 죽어갑니다. 갇힌 공간, 이들 가운데에 살인자가 있습니다.
이 소설은 보편적인 섬 고립 살인사건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섬 안의 성에 초대된 사람들, 전화선이 끊기고, 마을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다리가 끊어지고, 보트마저 못쓰게 된 상황. 누군가가 우연히 구하러 오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 안에 머물러야만 하는 공포, 게다가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살인사건. 살인자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신경이 예민해지고, 그럴 때면 여지없이 나타나는 마초 캐릭터와 본능에 충실한 캐릭터. <언더 그라운드>는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섬이 아니라 지하였지만요. 지하 벙커라는 폐쇄적인 환경이 섬에서보다 긴장감을 더해주었습니다. 맑은 공기나 물조차 마음껏 취하지 못하는 그들의 운명은 차라리 벙커 밖의 세상이 더 안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거든요.
이 소설에 영웅 캐릭터는 없습니다. 탐정 역할도 없고요. 모두가 그저 하나하나의 평범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소설의 장르는 뭘까요? 미스터리? 스릴러? 혹은 호러?
그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소설.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인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