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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9PM 밤의 시간 ㅣ 다음, 작가의 발견 7인의 작가전
김이은 지음 / 답(도서출판) / 2016년 9월
평점 :
11: 12 PM 책을 덮고 잠시 해선이 되어봅니다. 끈적끈적한 피들이 손가락 사이에 들러붙습니다. 그 질척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느낌이 싫어 거품 세정제로 손을 세심하게 씻어냅니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이런 날엔 무언가가 나를 찾아올 것만 같아 두렵습니다. 하지만, 낮은 더 두렵습니다. 밝은 곳은 현실, 이렇게 어두운 밤엔 꿈이라도 꿀 수 있으니까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생각해보면 <11:59 PM 밤의 시간>의 주인공 해선의 처지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신이 운영하는 유기농 쿠키 카페도 잘 되어가고 있고, 공무원이며 순진한 남편 동식이도 그냥저냥 나쁘지 않습니다. 자기를 꼭 닮은 딸, 교영도 있고 - 지나치게 닮아서 위험합니다만 - 철모르는 아들 진영도 있습니다. 바로 옆집이 시댁인 것만 빼면 완벽합니다. 시장 터줏대감인 시어머니 문자는 옛날 통닭을 팔며 생활하니 경제적 문제도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산다면요. 하나뿐인 시누이는 딱 시누이스럽습니다.
그러나 해선의 마음속에는 고르고가 살고 있었습니다. 페르세우스가 나타나도 퇴치하지 못할 그런 고르고 세 자매가 그녀의 마음 속에 단단히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그 고르고는 인형의 모습을 하고서 교영의 품 안에서도 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괴물은 해선의 엄마에게서부터 스며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디기탈러스의 위험한 향을 맡으면서 말이죠.
<11:59 PM 밤의 시간>은 어둡습니다. 무척 어둡고, 검은빛을 띄고 있습니다. 이곳이 바닥인가 싶은데, 점점 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갑니다. 해선의 마음속의 어둠은 한밤중이면 밖으로 기어 나와 그녀의 주변을 물들입니다. 붉은색으로.
그녀가 원한 건 '진정한 평안'이었습니다.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는 편안한 생활,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저도 자주 하고 있기에 그녀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저는 스스로를 가두는 것으로 타인과의 접촉을 하지 않으려는 히키코모리적인 - 어쩌면 퇴행적인 행동을 하고 있지만, 해선은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갑니다. 아무도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무시하지 않는 곳으로 가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롭 곤살베스의 그림과 같아서 그녀가 느끼는 것과는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모른 채 말입니다.
그녀의 스위치가 켜진 건, 디기탈러스 과량 복용으로 자살한 엄마로부터 였는지, 좋아하는 걸 실컷 드시다가 저세상으로 -예정보다 빨리 - 하늘로 가버린 아버지 때문이었는지, 도대체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 수 없는 교영의 친아빠이자 해선의 죽은 전남편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교영이 진영을 계단에서 밀어 죽이는 걸 본 것 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그녀는 서서히 주변의 장애물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걸어갑니다. 그녀의 엄마가 어린 시절 귀에 속삭여주었던 우아함을 잃지 않기 위해. 호텔 엑시트에서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는 동반자 클럽에 입성하는 것이 그녀의 꿈이고, 그녀의 종착지는 호텔 엑시트가 될 것입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꿈의 공간 엑시트. 그곳에서는 설령 자살을 하겠다고 결심했다면, 그것마저도 이룰 수 있습니다. 다만, 클럽 가입비가 있는데요. 얼마인지는 비밀입니다. 해선은 아는데, 저는 모릅니다. 어찌 되었건 겨우 몇 억 정도는 아닐 것 같습니다. 파라다이스에 가는데 고작 그 정도이려고요. 해선이 알려주지 않았지만, 상현이 알려주지 않았지만, 보험 설계사 병숙이 알려주지 않았지만 기분 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그곳에 갈 생각이 없으니까요. 내가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해준다는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걸리적거리는 것도 싫지만, 누가 옆에서 시중들고 비위 맞춰 주는 건 더 싫거든요. 그런 생활을 꿈꾸는 해선에게는 그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고 여겨졌겠지만요. 그래서 그녀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인간임을 포기했습니다. 그때마다 찾아오는 투견 더스트의 눈빛을 바라보면서요.
더스트는 그녀의 짝이었을지도 모르고, 그녀 자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1:59 PM 밤의 시간>은 한 여자가 파멸에 이르는 길을 잘 그려낸 소설입니다.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방어하는지도 보여주고요. 마리 유키코의 <골든 애플>의 테마 감응정신병을 이 책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변의 여럿에게 전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엄마로부터 아이에게로 전염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는 대개 어린 시절 양육자의 사상이나 정신적인 면을 걸러내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양육자에게 문제가 있다면, 아이에게서도 문제가 발견되기 마련이지요. 해선의 엄마도 우아한 사람이긴 했지만, 타인을 멸시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이 우위에 서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바닥으로 추락했을 때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일 테죠. 자신이 벌레처럼 바라보던 바로 그것이 되다니. 그리고 해선은 자라나 교영의 엄마가 됩니다. 교영은 또래 아이들보다 파괴적이고 가학적인 상상을 하며 그것을 즐깁니다. 그 아이에게 아름다운 동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 교영이 그렇게 되었을까요? 마음에 들지 않는 남동생을 계단에서 굴려버린 것은 - 그러다가 죽을 줄 몰랐기에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교영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생이 죽은 뒤에도 전혀 죄책감이나 두려움 같은 건 없었던 걸 보면요. 해선은 아이에게 사이코패스 기질을 물려준 모양입니다.
두 사이코패스가 한자리에 있을 때,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둘은 정말 서로를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