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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조 R. 랜스데일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누구나 남에게 쉽사리 털어놓지 않는 비밀은 있는 법입니다. 감추려고 말하지 않는 것도 있을 테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기에 드러내지 않는 것도 있을 겁니다. 저에게도 그런 것이 몇 가지 있는데요. 전자의 것도 있고, 후자의 것도 있습니다. 만일 털어놓는다면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지요. 정말 그럴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어릴 때보다는 더 많이 가지고 있고, 앞으로 더욱 많은 비밀을 쌓아가면서 살아갈 것 같아요. 그러나 어릴 때 안고 있었던 비밀 중 일부는 다 털어내 버렸는데요. 생각보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비밀 없이 산다면 그것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건 저 역시 남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테죠.
조 R 랜스데일의 소설 <밑바닥>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소한 비밀이나 상처이기도 했고, 인생의 방향을 다르게 만들어 버릴 만큼의 큰일도 있었죠. 왜 아니겠어요. 어른들이었는데요. 중장년, 그리고 노인들. 모든 걸 털어놓고 살 수 없는 인생의 뒤안길에 서 있었는데다가 시대적 배경이 1930년대니까 가슴속의 응어리 같은 것도 털어놓기 힘들었을 겁니다.특히 흑인이라면 더욱 그랬겠죠. 흑인이 대통령이 되는 세상인 지금도 인종차별 문제가 여전한데, 당시에는 더 심했거든요. 우리나라도 그랬잖아요. 신분제가 없어진 후에도 머슴이었던 자의 아들은 여전히 주인집의 아들에게 뭔가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는 무척 심각해서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차별과 오해를 받곤 했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점이 많이 드러나고 있는데, 자꾸만 깜둥이, 깜둥이 운운하면서 비아냥 거리는 인간들, 특히 네이선네 집안사람들은 짜증 그 자체입니다. 책은 좋은데 그들 때문에 덮을 뻔했습니다. KKK 단도 등장하는데, 복면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괴팍하고 파괴적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비밀들을 가지고 있을까요?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텐데요. 동부 텍사스의 - 텍사스 치고는 비옥한 마을과 그 옆 흑인 마을, 그리고 그 사이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비밀을 감추고 이웃을 대하고 있을까요.
<밑바닥>의 화자는 자신의 13세 소년 시절을 추억합니다. 그 나이에도 비밀은 있기 마련이죠. 나름대로의 비밀. 지금 우리나라로 치면 중1,2 때이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 만 하군요. 호기심도 많고, 말썽도 많이 부릴 때입니다만, 주인공인 소년 해리는 나름 예의도 바르고, 누이동생을 지킬 때는 지키는 멋진 오빠입니다. 어른들은 대공황이니 뭐니 힘들어도 아직 그런 건 잘 모르는 - 아이에 가까운 소년이었습니다. 하루는 누이동생과 함께 키우던 개의 안락사를 위해 강의 저지대를 탐험하는데요. 그곳에서 심하게 훼손된 흑인 여자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심지어 염소 인간에게 쫓기기까지 하는데요. 간신히 도망친 아이들은 이발사이자 지역 경관인 아버지께 사건을 이야기하고 그 후 마을은 뒤숭숭해집니다. 개는 안락사 당하지 않고 함께 살기로 결정되고, 사건에 대한 소년의 호기심은 그치지 않습니다. 백인들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범인은 흑인이었을 것이고, 흑인이 흑인을 죽인 사건이므로 별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여기지만, 다음번에 백인 여성이 시신으로 발견되자 사건은 인종적인 것으로 발전합니다. 그 와중에 모스라는 흑인 노인이 범인으로 지목당해 잔인하게 공개 처형됩니다. 그를 지키지 못 했던 해리의 아버지 제이콥은 큰 좌절에 빠집니다. 정말로 모스가 범인이었을까요. 아니었다면 진범은 어둠 속에서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었을텐데요.
모두가 지니고 있었던 서로 다른 비밀들. 그것들을 털어놓았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도 아니었지만, 비밀들이 조금씩 얽혀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분노를 낳고, 잔인함을 낳고, 슬픔을 낳았습니다. 광기 어린 한 인간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