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친밀한 폭력 - 여성주의와 가정 폭력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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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편에게 맞는 여자를 본 적이 있었고, 때리는 남편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단수로 표현했지만, 그 단수들은 모여 복수를 만들고, 그 복수는 또다시 커다란 하나의 단수를 만듭니다. 사회적 통념이라는 단수를 말이에요.

맞는다는 물리적 폭력도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어느 정도는 폭력이 아니라고 여기고, 언어적, 정신적 폭력은 아예 폭력의 범주에 넣지 않는 모양입니다. 어쩌다 뺨 한 대 맞은 거 가지고 폭력을 당했다고 말하지 않거든요.(어쩌다는 괜찮은 겁니까?) 게다가 여자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한 경우, 맞을만했다고 여기고 서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해서 살아가는 사이에서 폭력이 발생하는 건 살다가 지겨워져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놀랍게도 결혼 후 3개월 이내에 첫 번째 폭력 상황이 벌어진다고 하는데요. 어디다 하소연해도 이만한 일로 흥분하는 거 아니라며 여자 보고 참으라고 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아주 친밀한 폭력>은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의 개정판인데요. 처음 그 책이 출판된 지 11년이 지났으니 지금은 상황이 좀 나아졌을까요? 아뇨.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11년 전이라고 하니 갑자기 가슴이 아프네요. 저는 당시, 가정 폭력의 피해를 입고 긴급 피난한 분들과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연도 정말 다양하더군요. 주먹세례부터 성적인 모멸감까지 고통의 종류도 다양했습니다만, 깊은 상처를 갖게 되었다는 것만큼은 공통적이었어요. 가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길게 하지는 않지만 눈빛에서 느껴지는 우울감과 불안감만큼은 서로가 알 수 있을 정도였는데요. 그것은 상담으로도 치유되지 않습니다. 단지 그 피난처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하고 안정을 취할 시간을 가지는 것이었죠. 그리고 몇 달 뒤 각자의 길로 떠납니다. 독립하는 경우도 있고, 가정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병원에 실려가야 할 정도로 맞고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것도 일종의 학습된 무기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자들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전자레인지를 사달라고 했다는 이유로, 말을 예쁘게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술 먹고 들어왔는데 귀찮아했다는 이유로, 성관계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김을 밀폐 용기에 넣어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력 후 며칠이 지나 미안한 마음에 화해를 시도했지만, 거부했다는 이유로, 된장찌개가 먹고 싶었는데 오므라이스를 했다는 이유로. 그냥 비위 맞춰주면 맞을 일도 없을 텐데 왜 매를 버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핑계일 뿐이에요. 맞을 만한 짓은 도처에 널려있고, 이번에 잘 넘어가더라도 다음에는 맞을 일로 치부될 수 있으니 장단을 맞출 수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폭력의 모습들도 너무나 다양했는데, <아주 친밀한 폭력>을 통해 바라본 아내 폭력의 세계는 끔찍하고 슬펐습니다. 그리고 화가 났습니다. 머리말부터 슬프면 어쩌자는 건가요. 여자를 때리는 놈은 쓰레기라는 인식이 생겨서 이젠 때리는 남자가 줄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때리지는 않고 목을 조르거나 벌을 세우더군요. 그건 때리지 않았으니 폭력이 아니라고요. 무슨 소리입니까. 본인이 당해보세요. 폭력인가 아닌가.

부부간의 지독한 폭력의 희생자는 주로 아내이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아이들입니다. 그러니 아이 때문에 참고 산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주세요. 아이는 자라면서 때리는 아빠가 아니라 맞는 엄마를 원망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엄마가 좀 조심하면 집안이 조용할 텐데 왜 풍파를 일으킬까 하면서 말이에요. 왜 그런 생각을 할까요? 무섭기 때문입니다. 아빠를 원망하기엔 너무 크고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무력한 엄마를 원망하는 거죠. 물론 엄마를 안타깝게 여기고 아빠에게 분노를 키우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정상일까요? 

<아주 친밀한 폭력>은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사이좋게 잘 살아가는 부부도, 전쟁을 치르고 있는 부부도. 가부장적이라고 말하며 그냥 넘어가버리는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가 과연 옳은 것인가도 생각해보고, 가정폭력이 은폐되거나 부부 사이의 일로 여기며 더 큰 사단을 만드는 이 사회의 흐름이 옳은 것인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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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잠든 숲 1 스토리콜렉터 5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박종대 옮김 / 북로드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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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는 미스터리가 함께하는 본격 막장 드라마 같습니다. 그리 넓지도 않은 지역에서 어쩌면 이다지도 흉악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걸까요. 이러다 마을 주민 중에서 범죄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한 다리 건너 한 명 꼴이라도요. 전작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 책이 바로 그 느낌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을 줄은 전혀 상상 못했거든요. 게다가 주인공 올리버 폰 보덴슈타인의 지인들 마저도 이럴 수가. 코난의 지인은 안전해도 김전일의 지인은 미유키를 빼고는 안전하지 못한 것처럼 그들 역시 안전에서 멀어져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동창이나 그들의 부모, 신부님까지,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용의 선상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보덴슈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힘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뭐하나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이런 괴로운 상황이라니, 이제 곧 안식년을 가지려 하는 그에게 시련도 이런 시련이 없습니다. 너무 안됐지 뭐예요. 작가를 좀 원망했지만, 사건이 해결된 후엔 오래 묵었던 가슴의 응어리를 털어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쉴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40년 전 절친 아르투어와 사랑하는 여우 막시가 함께 실종되고 결국 친구가 살해된 것으로 결론지어졌으나 시신도 못 찾았던 사건으로 인해 상실감과 더불어 TV를 보느라 집에 바래다 주지 않아 친구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죄책감에 그 뒤로도 누구에게도 완전히 마음을 열 수 없었습니다. 막시와 아르투어를 동시에 잃은 경험은 또다시 사랑하는 것을 잃을까봐 염려하는 두려움을 만들었던 것이죠. 당시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레오는 자살 실패로 지능이 모자라고 거동이 불편해 완전한 사건 조사가 불가능했고, 현재는 시청에서 잡일을 하고 있으나 지난 40여 년간 아동 성애자에 살인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점점 그 일은 잊힌 듯했지만, 보덴슈타인도, 한때 어울렸던 패거리들도 그 일을 잊고, 아니 잊으려 애쓰며 살아갔습니다. 모든 비밀은 비밀로 한 채 이렇게 죽을 때까지 시간이 지나갔더라면 모두가 편했을지도 모르겠지만 - 마음에 남은 암과 같은 덩어리는 어떨지 몰라도 - 갑자기 벌어진 캠핑장 화재 사건으로ㅡ 클레멘스가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줄줄이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회고록을 쓴다던 클레멘스, 암 때문에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그의 엄마 로지, 심지어 신부님까지 어떤 연유로 살해되었고, 과거의 사건과는 어떤 연관이 있었을까요.

모든 사실이 밝혀진 후, 아르투어가 단 하루 저녁에 겪어야 했던 모진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상상하니 어린아이의 고통스러운 모습에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보덴슈타인은 어땠을까요. 아르투어와 막시의 유골을 발견한 날에도 무척 가슴이 아팠는데.
 사건의 해결 후 휴직을 하는 보덴슈타인, 그 뒤를 이어 반장이 된 피아의 다음 이야기가 벌써 기다려집니다. 

<여우가 잠든 숲>은 예전의 시리즈보다 훨씬, 아주 훨씬 분위기가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등장인물이 여전히 무지 많긴 한데, 예전보다는 덜 산만합니다. 초기작은 산만함이 좀 있었던 데다가 잠시 지나가는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영혼을 주입하는 바람에 그렇잖아도 익숙하지 않은 독일의 지명과 인명 때문에 힘들어하는 저를 더 힘들게 했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곁가지가 줄어들고 캐릭터 설정도 뚜렷해서 좋았습니다. 게다가 출판사에서 친절하게 권두에 타우누스 지도와 더불어 등장인물을 정리해주어서 무척 편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미미 여사의 에도 시리즈와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가 등장인물 헷갈리기에 쌍벽을 이루거든요. 이번에도 한참 잘 읽다가 얘가 누구였지? 하는 건 여전했지만 괜찮았어요. 역시 이런 소설은 이름을 적어가며 읽거나 출판사에서 마련해준 등장인물 페이지를 이용해야 하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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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교수의 밤
다그 솔스타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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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하여 불안증에 시달리던 저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흐름에 몸을 맡기며 그렇게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 없이 살아도 되나 싶은데 생각을 할수록 점점 불편한 상태가 되어 오히려 일을 망치기에 필요할 때만 생각이라는 걸 하기로 했습니다. 되도록 빠른 결정을 내리고, 저의 우유부단함에 제동을 걸기 위해 이미 쏟아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으니 지금의 결정 그대로 계속 밀고 나가자며 일단 실행 한 후에는 다시 생각을 멈춥니다. 제가 평소에 생각이라는 걸 하는 때는 책을 읽고, 기록할 때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가 하면,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오만 생각이 다각도에서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벌써 심장이 두근거리고 장에서는 꾸르륵 소리가 납니다.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빨리 해치워버리고, 그렇지 않으면 빨리 포기를 해버려야 편안합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같은 고민을 반복하는 건 정말이지 괴로운 일이거든요. 세상에 고민 없이 사는 법은 간단하지 않습니까. 내가 행동해서 처리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건 해버리면 되고, 행동해도 처리할 수 없는 건 고민해도 해결이 안 되니까 고민하지 말고,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관한 기우는 버리고. 그런 걸 책에서 배우기 전까지는 온통 고민 투성이었기에 몸의 여기저기가 무척 아팠었습니다. 지금은, 그래요. 노화로 아픈 것 뿐이겠죠.

저같이 필요할 때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늘 철학 하는 자세로 사는 사람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그 솔스타의 <안데르센 교수의 밤>에 등장하는 안데르센 교수가 바로 그런 사색하는 사람인데요. 저명한 문학 교수인 안데르센 교수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 크리스마스의 의미라거나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사색하다가 우연히 건넛집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목격합니다. 아니, 남자가 여자의 목을 조르는 걸 본 교수는 철석같이 살인 사건이라고 믿고 있지만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인 제 견해로는 살인 사건은 아니고 가정폭력의 장면을 목격한 건 아닐까 합니다. 교수가 목을 조르는 걸 목격한 후 커튼이 닫혀서 그 뒤는 알 수 없거든요. 아무튼 살인 사건을 목격한 교수는 재빨리 경찰에 신고를... 왜 안 할까요? 갑자기 건넛집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사색합니다. 신고를 안 해요. 차라리 오해한 걸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고 편안해졌으면 좋겠는데, 살인 사건이 분명하다고 믿으면서 신고를 안 합니다. 밤에도 사건이 신경 쓰이고, 다음날 친구 집에서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너무 지적이라 제가 졸고 만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에도 문득 사건을 떠올립니다. 친구에게 말해 볼까 입이 근질거리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새해를 맞이해도, 그 일은 문득문득 떠올라 생각의 꼬리를 잡습니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얼른 신고를 하면 좋을 텐데 여전히 신고하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몇 달이 지나 신고하는 것도 우습지 싶은데요. 그러다 문제의 - 살인자라고 여겨지는 - 남자 헨리크 노스트륌을 우연히 만나고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하게 평범한 이야기를 하는 그를 보며 몸서리칩니다. 뭘까요. 제가 볼 때는 교수도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해본다면 - 교수님은 모르나 본데, 이 사람은 아직까지 문제가 없는데요.

교수는 신고하는 일에 대해 철학적으로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신고하지 않는 핑계를 지적으로 대는 거죠. 이른바 지식인의 변명입니다. 어쩜 이렇게 생각을 깊고도 많이 하시는지. 내면에 대한 고찰이 너무 심해요. 보통 문학이 그렇지만, 이 소설은 특히 한 호흡이 무척 깁니다. 호흡 곤란이 뇌에 영향을 미쳐서 산소 부족으로 졸렸어요. 어쩌면 전날 잠을 별로 못 잔 탓일지도 모르지만요. 내 수준은 여기까지인 건가 좌절했지만 생각하기를 멈추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자리를 옮겨 다시 읽으니 오! 읽을 수 있었어요. 환기의 문제였나 봐요. 

살인사건의 목격으로 시작된 소설이고 주인공의 신경은 오롯이 그 일에 가 있는데 이렇게 평탄하고 밋밋할 수가 있나요. 주인공은 바짝 긴장해 있는데 반해 저는 담담하게 읽고 있으니 이일을 어쩌면 좋은가요. 특히 문학 이야기를 할 때 저는 잠과 사투를 벌여야만 했습니다. 200여 페이지의 책을 정복하는 기분으로 읽을 줄은 몰랐어요.

철학하고 사유해야 읽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책 중량의 가벼움에 반해 집어 들었다가는 내용의 무게에 깔릴지도 모릅니다. 주의하세요.

** 책 정보를 읽어보니 이 책은 무척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군요.
** 저에겐 어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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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이가라시 다카히사 지음, 이선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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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리카>가 호러, 스릴러물이었다면, <리턴>은 형사 소설에 가깝습니다. 소설을 이리저리 분류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리카>에서의 충격을 이어가기엔 장르가 달라져서 조금 맥이 빠진 기분이라 짚고 넘어갑니다. 재미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읽어버렸던 것과는 달리 <리턴>에서는 한숨도 조금씩 쉬어가며 읽을 수 있어서 이건 또 이것 대로 맛이 있었거든요.

<리카>에서 납치되었던 혼마 다카오의 시신이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슈트케이스 속에 담긴 채로 발견됩니다. 전작을 읽지 않은 분께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만 어쩔 수 없군요. 이번의 이야기를 하려면 필요한 부분이니까요. 사지와 눈, 귀, 코, 혀를 남기고 나머지 부분만 챙겨간 리카는 혼마와 10년 동안 동거를 한 모양입니다. 최근까지 살아있던 흔적이 남아있었으니까요. 살해당한 시체가 아닌 음식을 먹다가 기도가 막혀 죽은 질식사의 형태로 발견되었다는 것도 참 무섭습니다. 저항하지도 달아나지도 못하는 상태로 그녀와 10년을 함께 살다니. 죽으려고 해도 죽지도 못하는 지옥이었을 겁니다. <리카>에서 마지막에 그의 흔적을 발견했던 스가와라 형사는 정신이 닫힌 채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그때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했던 탓이지요. 스가와라를 잘 따랐던 나오미 형사는 콜드 케이스 전담반으로 지난 10년 동안 거르지 않고 매달 스가와라를 만나러 다녔습니다. 그러다 혼마의 시신이 발견되어 콜드 케이스 전담반의 활약이 필요하게 되자 이번에야말로 리카를 꼭 잡겠다 결심합니다. 한편, 친한 동료인 다카코는 애인이며 형사인 오쿠야마 형사와 연락이 되지 않자 나오미와 함께 집을 방문하는데, 이미 늦었습니다. 오쿠야마는 팀원이나 상사에게 비밀로 하고 독자적으로 리카를 추적하고 있다가 그녀에게 당해버렸습니다. 분해된 그의 시신을 보며 다카코와 나오미는 직접 리카를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반드시 복수해주마고 결심하지요.

내용은 그냥 그렇습니다. <리카>의 강렬함은 작가 자신도 넘어서지 못하는 건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보통의 형사 소설과 비슷한 정도의 긴장감으로, 재미있다는 정도의 소설이었지요. 그런데, 모든 사건이 해결된 후. 마지막에 나오미가 스가와라를 위해 내린 결정과 말이 어째서 그렇게 무섭게 느껴진 걸까요. 원래는 무척 사랑스럽다, 이제야 자신의 마음의 방향이 무엇인지 알았구나, 감동적이다...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응원하고 칭찬해야 마땅한데, 도리어 그 장면에서 공포를 느꼈습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리카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아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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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
이가라시 다카히사 지음, 이선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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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만남 사이트 같은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2000년 전후에 채팅 프로그램이 무척 유행했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세이 클럽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친한 친구가 있는 방에 들어가서 채팅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제목에 이끌려 들어가기도 했었습니다. 저는 한때 세이 클럽 음악방에서 CJ(사이버 자키)를 했었는데 그땐 참 재미있었지요. 온라인에서만 친하게 지내는 게 아니라 오프모임도 활성화되어 있어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채팅이 점점 이상하게 변질되더니 원조교제의 장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로 사람들이 그렇게 만나서 관계를 갖는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이미 저는 채팅에 흥미가 없어졌기에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소설 <리카>에서는 만남 사이트를 이용하다가 된통 당하는 남자가 등장합니다. 처음엔 괜찮았어요. 단순 호기심으로 시작해 많은 여자들과 메일을 주고받는 정도였으니까요. 독수리 타법을 쓰는 통에 채팅은 너무 어려워서 메일만 하루에 한 두통씩 교환하곤 했는데요. 아내와 아이 몰래 그런 일을 한지 2년쯤 된 어느 날, 승진을 합니다. 이제부터는 바빠질 테니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기 위해 만남 사이트에 접속하는 걸 그만두려 하는데요.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명만 만나보고 그만두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사람이 하필 리카였다니 딱하죠. 리카는 처음엔 괜찮았습니다. 예의도 바르고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성격에 애교도 있는 편이고. 그러나 전화번호를 알려주자 돌변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걸려오는 전화. 받지 않으면 끈질기게 남겨 놓는 메시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이 여자는 안되겠다. 여기서 그만두자고 생각한 순간, 그의 악몽이 시작되었습니다. 
전화를 바꾸고 전화번호도 바꾸었지만 리카는 그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첫 만남은, 아아 정말로 무섭습니다. 호랑 작가의 봉천동 귀신보다 무서웠어요. 경찰도 썩 도움이 되지 않아 친구인 하라다에게 연락합니다. 이런 탐정 친구가 있다니 다행이야!라고 생각했지만, 리카에게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웬만한 스릴러나 공포에 별로 겁을 먹지 않는 편이라 불을  끄고 북 램프를 켠 채 <리카>를 읽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너무 강했어요. 그녀의 모습이 그려져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의 결말이 너무 끔찍했습니다. 소설은 끝났지만 끝나지 않을 주인공의 고통이 무서웠습니다. 이렇게까지 악하고 괴이할 수가. 리카는 순수 악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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