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개인 게 낫겠어 - 개, 고양이 암 전문 수의사는 어떻게 갑상샘암을 이겨냈나
세라 보스톤 지음, 유영희 옮김 / 책공장더불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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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동물을 못 키웁니다. 어렸을 때 키웠던 고양이들, 성인이 된 후 키운 개들이나 그리고 소동물들의 고통을 이젠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건강하고 발랄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아플 때는 정말 힘들어요. 그러다가 죽기라도 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햄스터 같은 소동물은 생애 주기가 짧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다 죽는다 해도 저나 아이에겐 큰 상처로 남지요. 그런 이기적인 이유로 다시는 동물과 함께 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며칠 전 저희 집 지붕에서 - 어쩌면 지붕 아래, 천장 위의 공간에서 뛰어노는 고양이와 마주쳤습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막연하게 고양이로구나... 했었는데, 실제로 만나고 나니까 걱정이 되지 뭡니까. 어디 아프거나 다치면 어떡하나 하고요. 잠시 대구에 살 때 반월당 근처의 펫샵에서 골든 햄스터를 한 마리 데리고 왔습니다. 골든이니까 이름은 금동이라고 지었는데요.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녀석의 상태가 이상해졌습니다. 귓바퀴에 상처가 생기는 듯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툭하고 귀가 떨어져 버렸어요. 놀라서 펫샵 맞은편의 동물병원에 갔는데요. 수의사는 그걸 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는 표정으로 절 보더군요. 원인은 알지도 모른 채, 치료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포비돈이나 대충 발라주래요. 결국 며칠 후 금동이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 뒤에도 몇 마리의 햄스터, 금붕어를 보내고, 제주에 와서 다시 골든 햄스터를 데리고 왔지만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작은 동물이라도 고양이나 개가 죽었을 때와 같은 정도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겹겹이 쌓인 상처는 더 이상 동물을 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만들었지요. 생명과 함께 하는 건 그게 사람이건, 사람을 제외한 동물이건, 그리고 식물이건 모든 걸 함께 할 수 있다는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차라리 개인 게 낫겠어>라는 책은 개나 고양이의 암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수의 종양외과의가 어느 날 자신이 갑상샘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치료를 받으며 절망했다가 그 절망에서 다시 일어나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더불어 암에 걸린 동물들이 얼마나 의연하게 대처하는 가에 대한 것, 그리고 보호자들의 태도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동물의 의료체계와 인간의 의료체계를 비교하며 이야기하기도 하고, 느려터지고 답답한 치료 과정, 의사소통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데요. 우리나라의 의료체계와는 다르니  약간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리더군요. 하지만 솔직히, 저는 우리나라의 암 치료 과정에 대해서도 잘 몰라요. 그러니 어느 정도 다른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근에 대학병원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환자를 다른 선생님께 보내길 꺼렸던 한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분개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순조롭지는 않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입니다. 

이 책에 대한 자세한 리뷰는 하기 어렵습니다. 책에 관한 설명은 제가 하는 것보다 출판사 서평이나 책 뒤편을 읽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무척 정직하게 책의 내면을 요약해두었으니까요. 표지를 제외한 책의 재질에 잠시 당황했습니다. 예전에 갱지나 신문용지라고 불렀던 종이로 되어 있거든요. 평소엔 그 종이를 무척 좋아합니다. 일부러 구입해서 연습장으로 쓸 정도니까요. 그러나 책의 재질로서 만난 건 예전에 영어 원서 책을 샀을 때 이후, 그러니까 거의 20년 만이었거든요. 하지만 책 뒷면 하단에 환경과 나무 보호를 위해 재생지를 사용했다는 문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자연을 아끼는 출판사로구나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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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커플
샤리 라피나 지음, 장선하 옮김 / 비앤엘(BNL)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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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으니 가족 아니면 누굴 믿겠냐 싶지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은 허다합니다. 예전에 누가 그러더군요. 부부는 무촌이니 촌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친밀하다는 뜻도 되지만, 헤어지면 바로 남이 될 수 있는 사이라고요. 게다가 그분은 그런 말도 했습니다. 아내가 죽으면 제일 의심받는 사람은 바로 남편이라고. 덕분에 저는 이미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부간엔 음모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죠. 실은 그분 때문이 아니어도 셜록 홈스나 뤼팽을 열심히 읽던 시절인데다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거나 포의 소설을 읽곤 했으니 음모나 음해가 없는 곳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무튼, 그분의 말씀대로 - 게다가 여러 소설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그렇듯이 - 아내나 남편이 죽거나 다치면 제1 용의자는 배우자가 되는데요. 어린아이가 실종된 사건에서는 제1 용의자로 누가 지목될까요? 

부부 사이에 -가능하면 없었으면 좋겠지만 없을 수 없는 - 비밀은, 나쁜 뜻을 가지고 숨기는 경우도 있지만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아 그러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후자 쪽이 더 많은 것 같은데요. 샤리 라피나의 <이웃집 커플>은 전자 후자가 다 섞여 있는 대 막장극입니다. 

이웃집 남자 그레이엄의 생일파티에 아기를 데리고 오지 말라는 그의 아내 신시아의 당부 때문에 앤과 마르코는 아기를 재운 후 베이비 모니터를 들고 한밤중에 옆집으로 갑니다. 원래는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기로 했지만, 갑자기 조모 상으로 오지 못하게 되자, 이들 부부가 차선으로 선택한 게 바로 이런 말도 안 되는 방법이었는데요. 30분마다 부부가 번갈아가며 집으로 가서 아기가 괜찮은가 살피긴 했지만 명백한 방임이며 아동 학대입니다. 아기를 두고 현관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이 부부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6개월 된 아기를 두고 옆집으로 가서 술을 마시다니요. 우리 정서로도 이상한 일인데 아동 학대 기준이 엄격한 나라에서 그러다니. 결국 일이 터졌습니다. 부부가 없는 집에서 아기가 사라져버린 겁니다. 맙소사.

앤과 마르코는 패닉에 빠졌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그들 부부을 의심합니다. 혹시 신생아 살해를 감추려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는데요. 이렇게 사라진 아기가 있는 경우엔 제1 용의자로 부모를 지목하는군요. 특히 산후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앤이라면 가능한 일이라 부인이 저지른 일을 감추려 남편이 아이를 어디에 처리한 게 아닌가 했습니다. 납치했으면 몸값을 요구할 텐데 전화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앤의 재력가 부모님도 집으로 오시고 아이의 몸값은 친정에서 얼마든지 마련해주기로 합니다. 아니, 범인에게 금액을 선제시 하는데요. 초초하게 기다리던 어느 날, 범인이 아기의 옷을 보냅니다. 그리고 몸값은 500만 달러로, 마르코 혼자 들고 오게 합니다. 경찰에 알리지 않고 몸값을 가지고 간 마르코는 현장에서 누군가의 습격을 받고 돈을 탈취당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까발려지는 진실과 음모, 그리고 배신은 소설을 끝까지 붙잡고 있게 만듭니다.

뭐.... 88페이지에서 '그'가 수상하다는 건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80 페이지에서 또 다른 그가 수상하다는 것도요. 누구나 다 눈치챌 수 있게 해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모든 것이 다 정리되고 이젠 괜찮아졌다 싶은 마지막에 뒤통수를 후려치는 한 방은 무척 깔끔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젠 어쩌면 좋죠? 
<이웃집 커플>은 범인과 사건의 진행과정이 다소 뻔하지만 문장이 주는 스릴감 덕인지 현재 소설 베스트셀러 톱10에 들어 있습니다. 범인을 다 알고 있는데도 참 재미있단 말이죠. 

그런데, 제목은 왜 <이웃집 커플>일까요? 
혹시 옆집 신시아의 입장에서 이웃집 커플이라서 그런 걸까요? 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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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죽이기
아멜리 노통브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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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는 운명의 장난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합니다. 후에 그 사실을 알고 제 눈을 뽑고 장님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납니다. 어머니의 자살이라는 비극과 자신의 패륜으로 인해 테베에 내렸던 재앙의 원망을 안고서 괴로워하고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습니다. 여기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말이 생겨났는데요. 아들은 아버지를 질투하고 자신이 어머니의 짝이 되길 원한다는 것인데, 실제로도 그러한 기간이 있는지 어떤지는 제가 아들인 적도 없고, 아들을 키워 본 적도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들을 때마다 오이디푸스가 억울해 할 것 같습니다. 신의 예언 때문에 아버지에 의해 내쳐졌고, 자라서는 아버지인 줄 모르고 죽게 했으며, 스핑크스를 퇴치한 공으로 부재중인 왕의 자리에 앉아달라는 국민들의 바람을 들어 왕이 되었으며, 그러니 당연히 왕비가 자신의 것이 되었을 뿐 어머니일 거라고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그런데 나라에 재앙이 생기자 그것이 오이디푸스의 패륜 때문이라는 신탁을 내리다니. 애초에 '신' 네가 벌인 일이잖아.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질투한 적도 없고, 어머니를 성적으로 원한 적 없습니다. 죽인 사람이 아버지였고, 결혼했는데 어머니였을 뿐. 알았더라면 그랬을 남자는 아니었습니다. 알고도 그랬다면 부모를 못 알아봤다며 자기 손으로 눈을 뽑았을까요. 세상에 어떻게 알아봅니까.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한 것을.

<아버지 죽이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니 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오이디푸스를 위해 잠시 변호를 해 봤는데요. 이 책의 주인공 '조'와 오이디푸스는 다르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었던 거예요. 조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릅니다. 엄마의 수많은 남자들 중 하나일 텐데, 엄마조차 그의 아버지가 누군지 잘 몰라 합니다. 안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겠죠. 조는 아버지가 필요했습니다. 엄마의 남자 중 하나가 아버지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는데. 엄마에게 동거남이 생겨 그를 아버지로 여기고 싶었으나, 그는 조가 독학으로 익힌 마술 기술을 비웃고 비난합니다. 말대꾸를 하는 조의 따귀를 날린 엄마는 집에서 나가서 살라며 내쫓습니다. 한 달에 천 달러는 주겠다고 하는군요. 겨우 열다섯인 조는 바에서 카드 마술을 하다가 한 남자를 만납니다. 그는 전문가에게 교육을 받으라고 하고 조는 노먼이라는 마술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생활하며 마술을 배우지요. 이제야 겨우 제대로 된 가족이라는 걸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자 아버지 역할을 해주는 노먼과 다정하고 아름다운 그의 아내 곁에서 제자이자 아들로서 생활하던 조는 노먼의 아내 크리스티나를 사랑하고 마침내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 애는 당신을 굉장히 좋아해요! 」
「그래. 열다섯 살 먹은 아이가 아버지를 좋아하듯 나를 굉장히 좋아하지. 그래서 나를 죽이고 싶어 해.」
「그러는 당신은, 당신은 그 애를 아들처럼 여겨요?」
「그런 점도 있어. 나는 조에게 무척이나 감탄하고, 애정도 갖고 있어. 집을 떠나 있으면 그 애가 보고 싶어. 하지만 막상 집에 돌아오면 그 애 때문에 짜증이 나고 화가 나.」
「당신, 그 애를 겁내는군요.」
「아니야. 그 애가 걱정돼서 겁이 나는 거야.」
「그렇다면 그 애는 당신 아들이에요.」

-p. 42-43

그 뒤로 조는 사사건건 노먼과 대립합니다. 사실 좀 울컥했어요. 이 녀석이 정말 말 그대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발현하고 있잖아요. 어이없을 정도로 뻔뻔합니다. 사춘기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으면 이 가족 내에서 알파 수컷이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요. 단 한가지 무척 대단한 점은 있습니다. 내면의 비뚤어짐은 둘째 치고라도, 무언가를 해내야겠다고 생각하면 끈질기게 노력해서 반드시 해낸다는 건데요. 시간이 아무리 들어도 꼭 해내고 맙니다. 머리도 좋고요. 그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 건 아니라서 아쉽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조의 행동에 황당했습니다. 멋진 척, 의연한 척, 조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노먼이 안쓰러웠습니다. 아니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으며 어떻게 저럴까요. 마지막의 반전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소름 끼쳤어요. 지금까지 조의 행동이 그런 거였다니! 

아멜리 노통브의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도 파격적이었는데 후속작들도 인상적입니다. <아버지 죽이기>는 제목부터가 자극적이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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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술사 1 - 기억을 지우는 사람 아르테 미스터리 10
오리가미 교야 지음, 서혜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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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방울이라는 강아지를 키웠습니다. 엄마가 퇴근길에 구조해 온 아이였는데요.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한 걸 보고 엄마가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강아지를 아꼈고, 방울이도 저를 무척 따랐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정말 방울 같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지독한 독감에 걸렸습니다. 너무 아파서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열이 펄펄 끓었었죠. 이모의 남자친구가 놀러 와서 그런 저랑 남동생이랑 방울이랑 함께 있는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사진들을 찍었었죠. 그리고 다음날, 갑자기 감기가 싹 나은 거예요. 몸이 무척 가벼웠어요. 일어나자마자 방울이를 찾았는데, 방울이는 부엌 문 뒤쪽에서 피와 이상한 것들을 토하고 죽어있었습니다. 놀라 울면서 외할머니를 불렀어요. 나는 가뿐해졌는데, 어제까지 멀쩡했던 방울이가 갑자기 죽어버리다니. 게다가 며칠 후 현상된 사진을 가지고 이모의 남자친구가 다시 놀러 왔는데요. 방울이와 함께 찍은 사진만은 현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일만으로도 기이하다고 여기며 살았는데, 15년쯤 흘러 엄마와 이모들께 방울이 이야기를 했는데, 어느 누구도 그 아이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외할머니 조차도요. 남동생과 저만 기억하고 있었어요. 잠깐 있다가 간 것도 아니고 그래도 몇 달은 같이 살았는데, 어째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걸까요? 시간이 지난다고 잊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닌데... 누군가가 방울이의 기억을 먹어버린 걸까요? 당시에 혹시 방울이가 나 대신 죽은 건 아닐까 하고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에 저만은 또렷이 기억하는 걸까요? <기억술사>의 작가 오리가미 교야도 혹시 저와 비슷한 기억이 있는 걸까요?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준다는 도시 전설 '기억술사'라는 걸 탄생시켰으니 말이에요.

<기억술사>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개인의 기억의 일부만을 지워버립니다. 그렇다고 함부로 아무 기억이나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의뢰받은 일을 신중하게 지웁니다. 그를 도시전설이라고 하는 이유는 기억이 지워진 사람은 자신이 기억술사를 만났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기에 누구의 누가 그러는데... 하는 형태로 전해질뿐이라 기억술사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주인공 '료'는 어릴 적 소꿉동무이자 여동생처럼 여기는 마키에게서 기억의 일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도시전설 기억술사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게다가 반복되는 이상한 꿈. 대학생이 되어 마음을 주었던 선배도, 우연히 알게 된 변호사의 지인도 기억이 사라져버리자 기억술사에 대한 집착은 더욱 심해지는데요. 그를 꼭 만나서 자신의 기억을 지우길 바라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지워진 기억에 포함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상실감이 생기기에 상처가 되지요. 어제까지만 해도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여자가 오늘은 나를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합니다. 슬프지 않나요. 

기억을 지우길 원했던 사람은 어쩜 저렇게 이기적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아픈 것과 즐거운 것들이 층층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어 있는 것이니, 모든 건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소설에 등장해 기억을 지우기 원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상대방을 위해서 기억을 지웠으니 그건 안타깝고 슬픈 사랑이라고 해야 좋을지,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은 정말이지 울컥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소설의 첫인상은 일본의 정적인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는데요. 나중에는 아무 생각 없이 푹 빠져 읽게 됩니다. 2,3권도 챙겨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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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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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좀머 씨 이야기>로 유명한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집입니다. 무척 얇은 책인데요. 세 편의 소설과 한 편의 수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아직 <향수>조차 읽지 않아서, 이번이 쥐스킨트와의 첫 만남입니다. 집에 얌전히 꽂혀 있는 향수는 언제쯤 꺼내 읽을까요.

단편집의 맨 처음 수록되어 있는 <깊이에의 강요>는 작품에 '깊이가 없다'라는 비평가의 말 때문에 깊은 고민에 빠진 데다가 예민해진 한 화가가 비극적인 결말을 선택한다는 이야기인데요. 정말 어이가 없는 건, 그녀가 죽은 후 '깊이가 없다'라고 했던 평론가가 한 이야기입니다. 깊이가 없다는 말 때문에 자신에게 없는 깊이가 무언인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그녀의 인생이 죽음으로 끝났으니 깊이가 생긴 거라면, 그런 깊이는 필요 없어요. 그녀도 비평가의 말에 너무 귀를 기울였죠. 자존감을 가졌어야 했는데요. 저 사람은 내 그림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며 정신 승리를 했더라면, 비극은 없었을 텐데 하는 마음에 정말 아쉬웠습니다. 
그러고 보면 요즘은 그런 일들이 참 많아요.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법은 - 온 오프라인을 통해 참 많죠. 사람들이 몰려와 칭찬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제대로 된 비평도 있겠지만, 그냥 심심해서 몰려오는 악플러들도 있어요. 알아서 걸러내야 합니다. 비난과 비평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해요. 비평가라는 이름으로 근거 없는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수용할 것과 버릴 것을 알아서 구분하고 챙겨야겠죠. 

간혹 출판사나 작가가, 블로거가 쓴 리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찾아와 이런저런 덧글을 달거나 글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있는 걸로 압니다. - 저는 아직 그런 일이 없었지만요, 그리고 없길 바랍니다. - 너무나 파괴적이고, 편파적이고, 모독적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 수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당신의 엄마가 아니니까 오구오구 할 수는 없잖아요. 기분이 나쁠 겁니다. 하지만 정신 승리하면 되잖아요. 고든 램지의 키친 나이트 메어에선 지나친 정신 승리로 제정신이 아닌 식당 주인이 많이 등장하긴 합니다만. 적정한 선에서 수용과 거부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쉽지 않지만 노력해야겠죠. 

나머지 작품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 은 긴장감 있는 단편이었습니다. <승부>에선 사람들의 짐작과 실제의 마음이 전혀 다르다는 걸 긴장감 있게, 위트 있게 보여주는데요. 그렇죠. 어떻게 알겠어요.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라고 확대해석해도 좋을는지. <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그래요. 우리는 조개였어요. 맞아요. <...... 그리고 하나의 고찰>과 더불어 공감 가고 납득되었어요. 특이한 시선이더군요. 그런 거 무척 좋아해요. 맞아요. 우리는 어쩌면 조개인지도 몰라요.

책은 무척 얇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어요.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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